2022년 전도서 1:1~18, 2:1~26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지식과 제품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제의 제품은 이미 구제품이 되고, 어제의 학문은 구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새로운 무엇이 없는가를 찾아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이런 곳에는 삶에 진지함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삶에 진지함이 없다보니 생각도 가볍고, 꿈도 가볍고, 말도 가볍고, 행동도 가볍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전도서는 “해 아래에 영원한 것이 없고 새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과 영원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까요? 삶의 희망이 없게 됩니다. 삶에 희망이 없다면 절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해 아래에 새것이 없고 영원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안에 새것이 있고, 하나님께 영원한 것이 있다고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파랑새를 찾아 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돌이켜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펴서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아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는 새것이 있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말씀 앞에서 진지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1. 해 아래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전 1:1~11).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서 1장 2절 말씀은 전도서 1~6장의 대전제이자 ‘해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헛되다’(meaningless)는 추운 겨울에 입김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모습, 몸부림을 쳐보지만 잡을 수 없는 그런 현상을 말합니다. 해 아래 사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마치 노, 장자의 철학이나 불교의 철학처럼 들립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이 헛됩니까?
첫째, 해 아래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전 1:3~7).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해 아래’는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이 없는 관점에서 볼 때를 뜻합니다. ‘유익한가’는 남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왜 장사를 합니까? 밑지기 위해 장사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3대 거짓말이 있는데, 처녀가 시집 안 간다,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이 밑지고 판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유익을 남기기 위해 장사합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장사했는데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생을 열심히 장사했는데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그런데 전도서는 해 아래에는 남는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절망과 허망을 넘어 무망한 것입니다.
전도서 1장 4~7절을 보면 땅이란 무대가 나옵니다. 땅이란 무대는 여전하지만 한 세대가 오면 한 세대가 갑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한 세대가 오면 어김없이 떠나야 합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를 586세대라고 부릅니다. 이제 그들도 MZ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를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MZ세대가 영원할까요? 이대남 세대가 오면 그들도 무대를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극장과 같습니다. 극장의 무대는 변함이 없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주연은 때를 따라 달라집니다. 5,000년 동안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라는 무대에 여러 왕조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에는 여러번 공화국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여러 대통령이 나타났다가 무대를 떠났습니다. 이처럼 세상 역사는 언젠가는 다음 세대에 맡기고 퇴장해야 합니다. 해는 떴다가 그 떴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강물은 역사이래 바다로 흘러가나 바다를 채우지 못합니다.
우리는 역사와 대자연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 무상하고 허무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는 것 자체가 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고, 직장 다니는 것이 헛되어 보입니다. 그러다가 속세를 떠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해 아래’에서 새것이 없다는 세계관으로 자신을 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세계관으로 자기 자신을 본 사람들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하나님이 없는 세계관으로 자기 자신과 역사를 보면 새것이 없고 영원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 세계관, 성경의 세계관으로 보면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는 영원토록 빛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하였고, 다니엘서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고 했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새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영원한 것이 있고 새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수고는 유익하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주의 일’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일생을 걸고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일생은 거는 삶, 믿음에 목숨 거는 삶, 주님의 뜻이라면 죽을 수 있는 삶입니다. 세상에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가는 삶입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복을 나눠주는 주인공,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삶입니다.
‘견실하다’는 내면의 것이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외면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회의와 의심을 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 신앙을 굳게 하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하고 가치가 있고 새롭습니다.
둘째, 해 아래에는 진정한 의미가 없다(전 1: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눈은 아무리 보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습니다. 더 갖고 싶고, 더 취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기자가 록펠러에게 “당신은 백만장자이니 부족함이 없겠습니다”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록펠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a litter more”(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습니다. 바다를 메울 수는 있어도 인간의 욕망은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만족이 없을까요? 무엇이 없어서 만족이 없습니까? 돈이 없어서, 명예와 권세가 없어서입니까? 재벌 3세들이 왜 마약에 손을 댑니까?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할까요? 아모스 선지자는 일찍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고 했습니다.
요즘 먹고 마실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기갈은 양식과 물이 없는 기갈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오는 영혼의 기갈입니다. 잠언은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 28:25)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나 욕망이라는 길을 숨이 막힐 듯이 달려가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손을 폅니다. 탐욕은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풍족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붙들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주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붙들 때 만족이 있고, 예수님 안에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았을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가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소유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목자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모든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과 비례합니다. 성경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되면 성령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하게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은혜가 충만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원수의 목전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잔이 넘치게 됩니다(시 23:5~6).
셋째,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전 1:9~11).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9~10)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다 똑같습니다. 한 예를 들어 자동차를 보더라도 전기 자동차 수소 자동차 이야기를 하지만 본질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탄소 에너지에서 전기나 수소로 전환하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모든 전자 제품도 성능과 형태, 색상과 스타일과 디자인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새것이 없다면 “인생은 다 그렇고 다 그런 것이다”라며 회의주의, 아니면 냉소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것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된 삶,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한 몸이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근본의 변화, 새로운 존재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덧입은 고귀한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아담 생명이 아닌 예수 생명입니다.
예수 생명을 소유하면 새 성품, 새 사람, 새 인격이 됩니다. 예수 생명을 소유하면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삶의 목적이 자기를 중심으로 한 데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자신을 왕 같은 제사장이요, 새 언약의 일군으로 보게 됩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여깁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로 여깁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편에서 바라봅니다. 매일 새롭기에 벅찬 감격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비전이 새롭기에 삶의 의욕이 생깁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새찬송가 436장 3절)
우리가 삶의 기쁨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 1:11)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 많이 애씁니다. 외국의 관광지에 가보면 한국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란 존재를 드러내고자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전 세대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10년 아니 20년 후, 30년, 40년 후, 우리가 사라진 다음에 누가 우리를 기억하겠습니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시는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두시고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만 인생의 허무와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2. 헛된 것을 구하면 헛됩니다(전 1:12~18, 2:12~17).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3~14)
전도자는 마음과 지혜를 써서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폈습니다. ‘살폈다’는 것은 문제의 근원, 뿌리까지 살펴서 깊이 연구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결론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와 지식은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을 셀 수 없기 때문입니다(전 1:15).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으로는 굽어진 마음을 펼 수 없고, 어그러진 것을 펼 수 없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패한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 문명과 의학, 그리고 기술 문명과 AI가 인간의 내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과학 문명과 기술 문명은 자매들을 많은 수고로부터 벗어나게 하였고, 삶을 좀 더 편리하게 했고, 여러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공헌했지만 구부러진 것은 여전합니다. 미움, 시기, 질투, 탐욕, 혈기 등은 여전합니다. 그 많은 지식을 삶의 지혜, 지식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떤 사람도 전도자의 지식과 지혜를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지혜를 얻고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한다고 했습니다(전 1:18).
그러면 지식이 쓸 데 없습니까? 아닙니다. 전도서 2장 12~17절을 보면 지혜자는 우매자보다 낫습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은 반면에 우매자는 어둡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혜자의 죽음이나 우매자의 죽음이나 다 똑같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 1:7). 하나님 안에 참된 지식이 있고, 하나님 안에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이 참된 지식이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고, 인간을 위해 가치 있고 효과적으로 쓰여집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롬 1:16).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부패한 본성을 바꿀 수 있습니다.
3. 해 아래 즐거움은 헛됩니다(전 2:1~11).
전도서 2장 1~11절을 보면 해 아래 즐거움은 헛되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별별 수다를 다 떨었습니다(전 2:1).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들을 웃깁니까? 사람들은 음담패설로 웃깁니다. 별로 웃을 일도 아닌데도 웃기고 웃습니다. 요즘 TV의 코미디를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웃기고 웃습니다. 순간의 농담에 웃고 웃지만 뒤돌아서면 왠지 모르게 공허합니다.
전도자는 이제 술로 쾌락을 찾고자 했습니다(전 2:3). 그는 세상에서 좋은 술이라는 술은 다 마셔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업하여 돈을 많이 버는데서 쾌락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어 고급 저택을 지어 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여자에 미쳐 보았습니다.
이를 볼 때 돈과 여자,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누리는 쾌락의 탐닉을 아무도 막는 자가 없었습니다. 정욕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쾌락에 몰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당연히 얻을 수 있는 분복, 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본즉 다 헛되고 무익한 것이었습니다. 술이 깬 후의 그 허무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해 아래에는 진정한 기쁨, 진정한 즐거움, 진정한 쾌락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쾌락은 허무만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며”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8장 10절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해 아래서 열심은 헛되다(전 2:18~26)
전도자는 해 아래서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전 2:18)
내가 땀을 흘려 열심히 벌었지만 내가 쓰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써버립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가져간다”는 말과 같이 열심히 벌어 좀 돈을 쓸만하면 놓고 가야 합니다. 열심히 벌어 집을 사면 다른 사람이 살게 됩니다.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하여 증권을 투자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각종 투자를 해서 돈을 벌어도 나중에는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돌아갑니다. 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부자는 한 세대를 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헛됩니다.
전도서는 결론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전 2:24~26). 하나님의 손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고, 영광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한 세대가 오면 한 세대는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라지는 삶에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 무엇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 무엇이 새것인가? 세상에는 영원한 것, 새것이 없는가? 참된 의미는 없는가? 예수님 안에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새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된 의미가 있고, 예수님 안에 지식과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