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전도서 5:10~20
소유보다 누림의 복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전 5:18)
4복음서에 예수님의 비유가 38개 나옵니다. 그중에 16개가 재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절반이 돈 내용입니다. 달란트, 데나리온, 므나, 청지기, 포도원 품군, 부자 비유 등은 물질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신약성경 평균 10구절에 한 번씩은 물질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복음서에만 288구절이 물질에 관한 내용이고, 성경 전체에 무려 2,300구절 이상이 돈과 재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은 돈에 관해 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삶의 실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돈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산다.”, “금강산도 식후경”, “사흘 굶어 담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 맹자도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라고 했습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여야 윤리와 도덕이 선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돈을 피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돈에 대한 바른 생각, 바른 자세입니다.
본문은 물질에 대한 성도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소유에 집착하기보다 나눔과 누림의 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1. 물질에 대한 바른 자세(전 5:10~17)
성도의 물질에 대한 바른 자세는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물의 특징이 어떠합니까?
첫째, 돈은 편리하게 하지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양우〉 드라마가 인기라고 합니다. 그 대사 중에 “돈 앞에서 사람의 마음처럼 나약한 것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족함이 없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재물의 특성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인간의 욕망은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고급 침대를 살 수 있지만, 단잠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진수성찬을 차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있지만, 사랑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웅장한 예배당을 지을 수 있지만, 영생은 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히려 풍요로움은 분노가 용광로처럼 끓어 오르게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사라집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에서 “노동으로 돈을 버는 속도가 자산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 자산 격차로 불평등이 심화 되고 있다. 노동의 가치가 높이 평가받던 시절에는 삶의 만족도가 높았지만, 자산으로 돈을 벌게 되면 한탕주의 물질 만능이 지배하여 삶의 만족도가 낮아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입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과 더불어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0년째 1위입니다. 2020년에 자살률이 10만 명당 25.7명으로 OECD 국가의 2.2배나 됩니다. 이는 경제력과 행복지수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둘째, 돈은 집착하면 할수록 오히려 고통이 커집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 5:11)
돈이 많다고 6끼를 먹습니까? 돈이 많다고 구두 두 켤레를 신고 다닙니까? 오히려 돈이 많으면 내가 먹일 사람들이 늘어나 고민이 더 많고 깊어집니다.
어떻게 투자해야 하나?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나? 전쟁이 나면 이 많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내가 해 아래서 한 비참한 일을 보았나니 곧 아끼던 재산이 소유한 사람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전 5:13).
지나친 부는 영혼을 약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재물이 많으면 유혹에 약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정도로 재물을 주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갖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더 주시지 않은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소유가 여기에서 멈춘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돈이 사람에게 해를 주므로 하나님이 여기에서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 갖고자 하는 욕망, 더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갖고 싶고, 더 취하고 싶은 마음은 세상과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어놓은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집착과 욕망의 바다로 이끌어 죽음의 바다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내가 볼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한 만큼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습니다.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 5:15)
인생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갑니다.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를 일컬어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1960년대 최희준 씨는 경복고와 서울대학 법대를 나온 엘리트였는데 대중 가수로 데뷔해서 1960, 70년대 가요계를 석권했습니다. 그중에 〈하숙생〉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가사에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가 있습니다. 이 가사는 전도서에서 인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돈이 많으면 힘들게 관리하다가 이 땅을 떠날 때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놓고 가는 재산이 아까워서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습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독수리처럼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돈은 날개가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이고, 얼마나 돈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까? 돈은 후 불면 날개가 있어 다 날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주위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재벌들이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는 것을 목도하지 않습니까? 돈은 날개가 있어 언젠가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있다가 없어질 돈에 목숨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살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탐심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알고 빈곤한 데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있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서입니다.
바울은 내 손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내 손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하실 때 주실 것이라고 믿고 감사했습니다. 적게 가졌다면 많이 갖는 것이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빼앗겼다면 그럴만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했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자족하는 마음과 넉넉한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명심보감에 안분지족(安分知足)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탐하지 말며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하여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2019년에 오스카상을 받은 〈기생충〉의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의 가훈이 ‘안분지족’이었습니다.
기택이와 자녀들은 가훈대로 살지 않고 한 번에 사다리를 건너뛰어 부자가 되고자 하는 탐욕을 부리다가 다시 반지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탐욕을 버리고 한탕주의와 신기루를 따르지 말고 사다리를 올라가되 한 칸 한 칸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탐심을 이기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갈 5:22). 절제는 기독교 윤리의 덕목입니다(벧후 1:6). 절제는 자기 욕심이나 감정에 끌리지 않고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미혹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절제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라고 했습니다. 절제는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 승리의 비책입니다. 절제가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썩지 않는 생명의 관을 받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유로 평가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가지지 못한 최신, 최고의 상품을 가지고 사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 최신의 것, 최고의 것, 가장 큰 것을 소유합니다. 이것은 천민자본주의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론을 쓰기 전에 《도덕 감정론》을 썼습니다. 자본주의는 도덕의 가치 위에 세워야 합니다. 도덕의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기 위해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제된 삶을 살 때 자유롭고 멋진 삶을 살 수 있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절제된 삶에서 주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헤아리는 것 이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 6:38). 하나님 안에서 탐욕을 물리치고 자족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지만, 땀흘려 일하는 배고픈 노동자는 단잠을 잡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돈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대로 탐욕을 절제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전 5:18~20)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전 5:18~20)
사람이 슬퍼하고 불행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평생 자기 몫에 만족하면서,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특히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므로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사는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움과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안과 염려 근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살다가 결국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선하고 기쁘고 아름답게 살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실낙원을 복낙원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재물과 부요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이루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웃과 함께하며 친구를 사귀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재능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직장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내 몫입니다. ‘몫’이란 만족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몫에 만족하고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인생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자기 몫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몫을 탐하고 기웃거림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군시절에 흔하지 않은 고추장에 빨갛게 볶은 멸치 볶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옆에 있는 사관후보생의 밥이 더 많이 보였습니다. 저는 제 몫에 만족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다가 몇 초가 지나갔습니다. 그날 식사 시간은 30초였습니다. 다른 사관후보들은 후다닥 다 먹어치웠는데 저는 제 몫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몫을 탐내다가 몇 술 뜨고 구정물통에 버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몫을 탐하기보다 내 몫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몫에 절대로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몫에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도박장애자가 500만 명이고, 그런 증세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1,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도박 천국입니다. 인터넷 불법 도박, 부동산 투기, 주식 투기, 코인 투기, 환투기, 영끌 아파트 투기 등 셀 수 없습니다. 도박이 뭡니까? 투기입니다. 투기는 내 몫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몫을 탐하는 것입니다.
미국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의 도박장애 진단기준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1.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액수를 늘려 도박하려는 욕구 2. 도박을 줄이거나 중지하려고 할 때 과민해짐 3. 도박을 조절하고 줄이고 중지시키려는 노력이 반복적으로 실패 4. 종종 도박에 집착(예 : 과거의 도박 경험을 되새기고, 다음 도박의 승산을 예견해 보거나 계획하고, 도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방법을 생각) 5. 괴로움(무기력감, 죄책감, 불안감, 우울감)을 느낄 때 도박 6. 도박으로 돈을 잃은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음날 다시 도박(손실을 쫓아감) 7. 도박에 관여된 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함, 8. 도박으로 중요한 관계, 일자리,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상실하거나 위험에 빠짐 9. 도박으로 생긴 경제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돈 조달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삼성 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숨을 거두기 얼마 전에 의료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년만 더 살게 해주시오. 1년만 더 살면 그동안 내가 할 일이 있소. 나는 지금까지 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돈을 돈답게 써보지 못하고 이 자리까지 왔소. 1년만 더 살면 멋지게 쓰다가 죽겠소.” 그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유하고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들게 번 돈을 잘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많이 달라고 기도해야겠지만, 그 물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필요한 곳에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디 신학교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 박사는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묻게 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소유한 재물이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부흥시키며 인재를 키우는 데 사용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작은 서점을 경영하다가 공황으로 파산하고 10만 불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진지하게 기도하다가 자신의 헌금 생활을 회개하고 자기 집을 팔고 빚 정리를 한 후에 십일조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이 정황에 무슨 십일조냐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하나님께 빚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셨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기도하며 약품을 연구하고 제조하고 판매하는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얻은 수입의 십의 1조를, 십의 2조를, 십의 3조를 드리며 전 세계의 선교사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마침내 4년 만에 세계적인 제약회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유명한 소염진통제인 맨소래담 제약회사를 차린 앨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A.Hyde)입니다. 그는 죽을 때 십의 9조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믿음을 알아보는 데는 여러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태도, 행동, 고난 중의 자세를 보면 그의 인품과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보다 정확히 알 수 있는 시금석은 그의 돈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 사람의 돈에 대한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관심과 인격과 품격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관심과 소비는 그의 인격과 품격과 신앙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비례합니다. 돈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도 교회 지출 내용을 보면 그 교회가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감사하게도 어렵고 힘든 분들을 위해 많이 지출합니다. 6, 7월에 북한 어린이 마스크 보내기, 우크라이나, 뇌 수술한 선교사 지원비, 그리고 이령자 사모님의 치료비로 1,050만 원을 지출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여기저기 연락하여 후원비를 받아 보냈습니다. 교회는 나보다 좀 더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소유보다 누림이 복된 삶입니다. 소유가 복이 아니라 누림이 복입니다. 소유만 하고 누리지 못한 사람의 모델이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그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자 창고만 계속 짓고 곡식을 쌓아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밤에 생명을 거두니 그 많은 재물을 선한 일에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자신의 영혼을 도로 찾아가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소유보다 더 복된 것은 가진 것을 하나님 나라와 복음 사역,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섬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몫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여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소유가 복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소유와 누림의 복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소유보다 누림이 복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몫을 감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특징을 잘 알아 자족하여 나누며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