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전도서 6:1~12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 6:6)
요즘 사람들의 화두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섭니다. 행복을 다른 말로 삶의 질, 혹은 ‘웰빙’(well being)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필립 반 덴 보슈(Bosch, Philippe van den)는 《행복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에서 “모든 사람은 행복이란 목적을 향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행복을 목적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심히 좋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행복의 동산 에덴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행복의 동산을 상실했습니다. 에덴 동산을 상실한 인간은 오늘도 행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찾고 갈망하지만 행복을 충족할 능력을 상실했기에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을 허비합니다. 사람들은 T.V.의 각종 드라마와 오락, 영화와 게임, 먹고 마시고, 여행과 학문과 예술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의 부유와 존귀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러한 것들은 ‘불행한 일’로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한 일’이란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질병, 악한 일을 뜻합니다. 그러면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 삶의 과정에서 행복을 누려라(전 6:1~6)
전도서 6장 1~6절을 보면 행복과 불행을 대비하여 행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보통 사람들이 받기 힘든 복을 다 받았습니다. 그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얻었습니다. 그는 자녀의 복도 얻었습니다. 그는 장수의 복까지도 누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행복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런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진 재산을 가지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허무한 삶입니다. 건강하여 오래 살아도 행복하지 않으면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욕이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를 일컬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전 6:3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살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면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자녀의 복도 필요하고 건강의 복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성도의 깃발은 기쁨입니다. 성도의 깃발은 얼굴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구원의 은혜가 뜨거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말씀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전도의 열정도 있었습니다. 내게 무엇이 없어도 마냥 기뻤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크고 놀라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이 식어집니다.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져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경력이 3년이면 무덤덤해지고, 5년이면 식고, 10년 이상이 되면 화석화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하).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새 포도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부대의 반대는 낡은 부대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없습니다. 신축성이 없다는 것은 굳어진 마음입니다. 굳어진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 16:18).
사람이 교만하고 거만해지면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우지 않으니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니 감격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으니 행복이 없습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배우는 마음입니다. 배우는 마음이 있을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니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우리의 영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했지만,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해 불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은 허망한 목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평안해야 행복합니다. 영적인 평안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옵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첫째는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순간의 쾌락을 즐기다가 죽어 영원한 심판을 받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죽어서 천국 간다면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수도승처럼 심각하게 사는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다가 영광중에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11절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이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학에서 행복의 등급을 넷으로 구분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살맛이 나고 결과에서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제1급의 행복입니다. 제2급의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는 살맛이 나지만 결과에서는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순간의 쾌락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제3급의 행복은 과정에서는 살맛이 없지만, 악전고투의 노력 끝에 오는 보람입니다. 제4급의 행복은 과정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하므로 행복이 없고 결과 또한 실패하여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에서 살맛이 없고 행복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NO Cross, NO Crown)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십자가는 영광이 보장된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도 기쁨으로 져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내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새찬송가 458)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기쁨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물질의 풍부함과 존귀와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릴지라도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이런 복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바울은 감옥에서도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바울은 환상과 계시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교만하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a messenger of Satan)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가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시는 끊임없이 그를 찌르고 괴롭혔습니다. 가시가 찌를 때마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No’하시며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 후에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연약한 데서 온전해집니다. 사람은 가시와 같은 고통과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약해집니다. 이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쇠가 달구어졌을 때 대장장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쇠가 달구어지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흙이 곱고 부드러워야 완전한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작품은 전적으로 재료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간성이 강하고 내면이 딱딱하고 교만할 때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세가 혈기가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40년간의 광야 훈련과 연단을 받아 온유해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데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능력을 행하십니다(사 57:15).
우리가 살면서 할 수만 있으면 먹구름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삶이 청명한 날씨처럼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구름으로 태양의 찬란한 빛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연약함으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것을 체험한 후에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고후 13:10).
우리는 신앙 생활하며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믿음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는데 이에 따른 보상이 없다고 생각할 때 행복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쓰임 받는 자체로 기뻐해야 합니다. 나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이 존귀하게 되신다면 내가 무엇이 되어도 괜찮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신앙생활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12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음성을 세 번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족한 은혜를 주심을 깨닫고 낙망과 슬픔과 고독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2년의 옥중생활 속에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만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사람이 슬픈 생각을 하면 과거의 슬프고 아팠던 기억들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기쁨이 넘치면 과거의 슬픔과 아픔이 깨끗하게 씻어집니다. 이때 행복이 넘칩니다. 따라서 재물이 많든 적든 간에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의 만드신 뜻대로 살라(전 6:7~9)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먹어야 합니다. 먹는 재미가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나서 돌아서면 또 먹고 싶습니다. 부자라도 입의 욕구를 다 채울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6:9)
이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직 먹기 위해 수고합니다. 대부분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고의 땀을 흘립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양심의 소리도 무시하고 거짓과 술수를 서슴없이 행합니다. 사람들은 잘 먹은 사람이 죽으면 때깔도 좋다며 잘 먹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더 편하게, 더 멋있게, 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솔로몬은 왕궁에서 산해진미를 먹었을 것입니다. 최고급의 옷을 입었으며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렸습니다. 솔로몬은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사셔서 구원하신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은 사람입니까? 건강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만드신 바라’(ποίημα, workmanship)는 피조물, 작품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작품입니다. 작품 중에 최고의 걸작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면서 가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to do good works, NIV)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일,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하신 선한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 선한 일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삽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죄의식에 이끌려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상처로 원망과 분노에 이끌려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 근심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과 쾌락과 자기 영광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방황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기쁨과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은 분명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살 때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일평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애썼습니다(행 13:36). 그때 그의 마음은 넉넉하고 어디를 가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살 때 따르는 부가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삶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내 마음과 내 뜻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3. 강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전 6:10~12).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전 6:10)
인간의 장래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에 의해 오래전부터 그 이름이 불린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구원의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연약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는 강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감히 다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세상에서 다 될 것처럼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이 있으랴.”(전 6:1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강한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강하신 하나님과 다투지 않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따라 삽니다. 그런 사람은 재앙을 만나지 않습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라고 했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전 6:12)
우리는 오늘의 삶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장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누구도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50대의 젊은 목사 사모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내일 산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만이 내 시간입니다. 잠언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 손에 쥐어진 돈만이 내 돈입니다. 그러므로 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현재,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강하신 하나님을 내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이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7:1~3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1~3)라고 했습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런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삶의 과정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강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