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로마서 13:11-14
이 시기를 알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본문은 탕자 아우구스티누스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변화시킨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생활이 방탕했습니다. 그는 16살 때부터 동거생활을 했고,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을 일삼았으며,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읽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과거 죄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지금 당장 죄의 줄을 끊어버려야지. 지금이야말로 이 줄을 벗어버릴 때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죄의 뿌리를 뽑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결심을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옛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봤지만 넘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원의 무화과나무 아래 엎드려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제가 내일, 내일 할 것입니까? 왜 저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
이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들려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바울 서신을 펴들고 가장 먼저 눈이 닿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그는 더 이상 읽지 않았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옛 생활에서 깨끗이 벗어났습니다. 그는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덧입었습니다. 탕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변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 주님께 무릎을 꿇고 간구하여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경건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라
바울은 독특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기독교의 역사관’, ‘기독교의 시간관’, ‘기독교의 종말론’이라고 일컫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본문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현재 어느 시점에 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 배가 좌초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쥐가 소란을 피운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 위기에 빠져 있는데도 쥐가 꼼짝 않고 숨어서 곡식을 파먹는다면 이는 정상적인 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대 성도들은 재림 신앙으로 무장되어 믿음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재림 신앙으로 기도에 힘썼으며,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했으며, 생명을 내놓고 복음을 전했고, 기쁨으로 이웃을 섬겼고, 희생적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초대 성도들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향락에 빠져 있을 때 세상의 종말을 경고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삽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마지막 때가 있음을 압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반드시 오심을 믿고 살아갑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습니다.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롬 13:11상).
“이 시기를 알라”란 이때를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시간’이라는 단어에는 헬라어로 카이로스(καίρος)와 크로노스(χρὀνος) 등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일상적인 때를 말합니다. 달력,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 정해 놓으신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정해 놓으신 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 시기’란 카이로스를 가리킵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느 만큼의 한계를 정해 주신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정해진 기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무줄처럼 우리의 필요에 의해 늘릴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습니다. 이 시간은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활용하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시간관에는 모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불교 시간관으로, 윤회적 시간관입니다. 불교나 힌두교는 시간을 하나의 원으로 생각하여 역사가 순환한다고 봅니다. 가만히 있으면 빙 돌아서 그 자리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면 또 봄이 오듯이 시간이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또 다른 생명으로 나타나고, 그 생명이 죽음을 낳고,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등 계속해서 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관을 갖게 되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회가 다시 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관에 묶여 있습니다.
둘째, 헬라의 시간관으로, 변증법적 시간관입니다. 이 시간관은 곧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모순되는 주장인 ‘반’(反)이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에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열역학 제2법칙을 볼 때 역사는 새로운 창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로 향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변증법적 시간관을 갖게 되면 과학과 사회학은 발전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창조 역사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셋째, 기독교의 시간관으로, 종말론적 시간관입니다. 이 시간관은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는 직선적인 시간관입니다. 종말론적 시간관은 삶을 시작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이 분명합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청년의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간은 또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의 시간, 한번 뿐인 우리의 일생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의 삶에는 세상 잔재미로 허비할 수 없는, 연습이 없는 엄숙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심판을 향해, 재림을 향해,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노벨이 값진 삶을 살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노벨의 형이 사망하자 신문에 노벨이 죽었다는 오보가 실렸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죽음의 상인, 사망”이라는 기사 제목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기사를 읽는 순간,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단지 ‘돈이 많은 사람’, ‘죽음의 다이너마이트를 팔아 부자가 된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죽었을 때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노벨은 위대한 삶을 살았다”는 평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노벨상을 제정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팔아 모은 돈을 모두 기부했습니다. 죽음의 때를 생각하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매사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는 인생이 영원할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음이 영원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젊음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젊음은 일순간입니다. 루마니아의 이에스더 선교사가 교회에 처음 왔던 1983년, 그녀는 꽃다운 20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이를 물어보니 50세라고 합니다. 우리는 젊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젊음은 정해져 있습니다. 죽음 역시 정해져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습니다(히 9:27).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언제든지 내 앞에 닥쳐올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예측불허의 위기가 항상 우리를 위협합니다. 아침밥을 잘 먹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일할 수 없는 죽음의 때, 병들 때가 찾아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젊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림의 때는 정해져 있고, 재림은 정해져 있는 사건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일시를 가르쳐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재림은 하나님만 아시는 역사적인 사건이요, 언제든지 현재일 수 있는 현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재림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항상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 됩니다. 먹고 마시고 쾌락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이 오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주 오늘에 다시 오신다면 부끄러움 없을까 잘하였다 주님 칭찬하며 우리 맞아주실까 주 안에서 우리 몸과 맘이 깨끗하게 되어서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모두 기쁨으로 맞으라”(새찬송가 176장 2절).
우리는 각기 주어진 시간, 정해진 시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재림은 언제나 현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보통 옷장에 옷을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시간을 축적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시간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는 진리와 사실, 역사적인 사건만이 있습니다. 그 속에 시간이 존재합니다. 사건이 있어야 시간이 있습니다. 사건이 없으면 시간도 없고, 그것은 공(空)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100년을 살았다 해도 의미 없이 살았다면, 역사적인 사건이 없는 삶을 살았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 것입니다. 하루 종일 빈둥빈둥 놀았다면 시간을 공치고 허비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루 종일 열심히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했다면 그 시간은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사건으로, 즉 양이 아닌 질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33세의 일기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양에 비하면 우리의 반밖에 사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100% 채우셨습니다. 꽉 찬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볼 때 시간은 생명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합니까? 어찌 젊음을 탕진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인생을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젊음을 탕진하고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젊음을 의미 있는 삶에 투자해야 합니다. 가장 의미 있고 역사적인 사건은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변화로 이 시대와 이 세대가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작은 도토리 한 알로 시작해 거대한 도토리 숲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한 사람에게 전한 복음이 거대한 복음의 숲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토리(story) 인생이 아닌 히스토리(History)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시간을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종말을 기준으로 오늘을 생각하고, 종말을 기준으로 카운트다운했습니다. 우리는 “몇 살 먹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년 남았는가? 몇 년 며칠이 남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80으로 본다면 ‘아, 이제 30년 남았구나. 20년 남았구나. 15년 남았구나. 10년 남았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대학도 '이제 3년 남았구나. 2년 남았구나. 1년 남았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종말의 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말을 중심으로,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시점에 기준을 두고 오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을 허비하지 않고 진지하게 살게 됩니다. 내일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내일이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을 헛되이 보낼 수 있을까요?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며 인생을 허비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심판과 주님의 재림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 의식을 갖고 사는가, 아닌가를 보면 됩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르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긴박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주어진 시간,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일어나야 할 때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하).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원이 처음보다 훨씬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영화, 영광을 뜻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감각이 없고, 모든 것에 관심이 없고, 반응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자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에는 열심이지만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은 육신적인 안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밝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여기서는 밤과 낮, 어둠과 빛, 벗다와 입다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밤은 죄의 세상을 가리킵니다. 깊은 밤은 의와 불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세상을 말합니다. 반면에 낮은 의식입니다. 낮은 창조입니다. 낮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낮은 충성과 단정, 화목과 사랑입니다. 어두움은 혼돈이요, 무질서입니다. 어두움은 무가치입니다. 어두움은 방탕이요, 우상 숭배입니다. 어두움은 수군거리는 것이고, 당 짓는 것입니다. 밝은 데서는 남의 흉을 보거나 험담하지 않습니다. 밝은 데서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어두운 데서 이루어집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바울은 밤에서 낮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어두움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흑암에서 밝음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죄의 세상에서 주님의 재림을 보았습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의 여명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밝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롬 13:13상).
바울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밤인데 낮과 같이 불을 환히 밝힌 채 세수하고 화장하고 옷을 입고 단정히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아내는 세수하지 않은 얼굴을 남편에게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늘 단정한 모습, 늘 우아한 모습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깼는데도 아내가 잠을 자고 있다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상당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재림하셨는데 신부 된 우리가 어둠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보실 때 좋을까요? 우리는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재림의 임박함을 알고 깨어 일어나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 또한 ‘낮에와 같이’란 이미 낮이 된 것처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낮이 되기 전에 이미 낮이 된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5-8).
바울은 일어나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벗어야 할 옷을 여섯 가지로 열거했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하).
방탕의 옷
‘방탕’이란 목적과 기준과 중심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어두운 데서 사는 삶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고, 사명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삶이 없다면 이는 방탕한 삶입니다.
술 취함의 옷
술 취함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술로 인해서 오는 만용, 그것은 바로 죄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로 죄를 짓고, 술로 실수하고, 술로 망합니다. 술은 '에틸알코올'이라고 불리는 화학물질의 한 종류입니다. 알코올에는 인체에 해를 끼치는 독성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술 소비량이 세계 5위입니다(2008년 통계). 연간 술 소비량은 1인당 소주 50병, 맥주 100병입니다.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하루 평균 12.7명입니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남성들보다 여성들 가운데 알코올과 관련된 정신 및 행동장애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음주문화는 음주량도 문제이지만 질도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시중에 나오는 술로 취하지 않게 되자 폭탄주를 만들어 마십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아예 술집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 취함의 잠옷을 벗어야 합니다.
음란의 옷
‘음란’이란 헬라어로 코이테(κοίτη)로, 침대라는 뜻입니다. 이는 육체화된, 영적인 사랑이 없는, 정신적 사랑이 없는, 다만 육체를 따라 끌려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런 삶은 창기와 같은 삶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호색의 옷
‘호색’이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호색하는 사람은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죄를 짓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드러내놓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한 애정 표현을 합니다. 이것이 호색입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툼의 옷
‘다툼’이란 하나의 특권의식을 말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과 오만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과 오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시기의 옷
시기, 질투는 원수 맺는 전초입니다. 시기심은 미움을 가져오고, 미움은 뼈를 쇠하게 하는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어두움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라
우리는 방탕의 옷, 술 취함의 옷, 음란의 옷, 호색의 옷, 다툼의 옷, 그리고 시기의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란 그리스도 안에 숨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란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은혜로 옷 입고, 구원으로 옷 입고, 생명력으로 옷 입고, 거룩함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각종 죄악들이 둘러싸여있습니다. 마귀가 악한 불화살을 자나 깨나 우리를 향해 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때 우리는 모든 악의 불화살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옷을 입고 주님의 품에 안길 때 주님이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이 높이 일 때에 사랑 많은 우리 주 나를 품어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새찬송가 388장).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그때가 지금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종말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어두움의 일을 벗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주님의 옷을 입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죄에 빠져듭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