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년 메시지(다니엘서 12:1-4, 요절 12:3)
누가 지혜 있는 자인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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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들을 만납니다. 이 문제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문제들을 잘 해결할 때 행복하고 아름답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문제들을 잘 풀어갈 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지식은 돈으로 또는 짧은 시간에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지식처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오랜 경험의 축적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교육과 많은 독서량, 그리고 부모의 영향이 큽니다. 무엇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5). 그리고 지식은 어떤 사물이나 이론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지식을 바르게 사용하는 힘,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판단력입니다. 지혜란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Wisdom is the ability to use well the experience and knowledge in order to make a good decision.).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질축복을 위한 기도는 많이 하지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지식보다 지혜를 가르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리했을 때 오늘날 3%(미국 인구 3억, 900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의 정치 경제 금융 문화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상위 6대 은행 중 대부분이 유대인의 자본입니다. 세계 최고의 투기꾼으로 불리는 소로스도 유대인입니다. 세계적 언론재벌 머독도 유대인입니다(뉴욕 포스트, 타임스, 폭스 방송, 20세기 폭스 등). 영화계도 유대 마피아가 할리우드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스탠리 큐브릭, 우디 앨런 등이 유대계 감독들입니다.
성경은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여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소중하다고 말씀합니다(잠3:13-15).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이 얻는 복이 무엇입니까? 신년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합니다.
잠언 11장 2절을 보겠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When pride comes, then comes disgrace, but with humility comes wisdom.).”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교만은 자기가 좀 배웠다고, 좀 많이 가졌다고, 좀 많이 안다고, 자기가 좀 뛰어나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대개 빈 깡통이 요란하다고 든 것 없는 사람이 교만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분수나 자기 위치를 몰라 할 말 못 할 말을 합니다. 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따라서 우리는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일이 잘 될 때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다 보셨을 것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떠다니는 궁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배가 왜 침몰했습니까?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4월 12일 승객 2,206명을 태우고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출항한지 나흘 후 배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항해사는 거대한 ‘타이타닉 호’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선장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점점 빙산을 향하여 나아갔고, 급박해진 통제소에서는 계속 무전을 보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항해사는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전방에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설마 이 ‘타이타닉 호’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 선장도 “하나님이라도 이 튼튼한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해안 통제소의 경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킬로미터도 못 가서 타이타닉 호는 북대서양 한복판에서 거대한 빙산과 충돌하여 차가운 바다 속으로 침몰했습니다. 결국 2,206여명의 승객 중 1,500여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알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높이십니다(약4:6, 벧전5:5).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크리스천의 덕목 중에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처럼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익으면 익을수록 쳐드는 보리이삭처럼 머리를 꼿꼿이 세웁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울 때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길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계급과 서열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교회는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곳입니다. 군 교회를 가면 장군들이 차량을 안내하고 사병들을 고개 숙여 인사하며 안내합니다. 인정은 직장에 가서 받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힘이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누가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고, 누가 교회를 섬기고, 젊은이들을 섬길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이 시대를 섬기고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는 어머니를 기념하여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그 자리에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문을 좁고 또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교만하고 뻣뻣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자기를 낮춘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울 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겸손하여 선배가 후배를 보살펴 주고, 후배가 선배를 섬겨 주고, 같은 동료끼리는 서로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올드미스, 골드 미스, 노총각들이 겸손하여 믿음 안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멀리합니다.
잠언 14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을 멀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무엇이 악한 일인지, 빨리 알아차리고 올바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악을 떠나지 않다가 결국 망하게 됩니다.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명의 젊은이가 도박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도박장 바로 옆에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도박장으로 들어가던 두 청년 중 한 명이 다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오늘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 그러자 그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면서 “사나이가 한번 결심을 했으면 가야지. 교회라니 무슨 소리야?”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도박장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람은 교회로 갔습니다.
그 날 교회에 갔던 청년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박장에 갔던 청년은 더욱 타락하여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흘렸습니다. 그때 교회에 간 청년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제 22대 24대 대통령인 클리블랜드입니다. 그러나 30년 전 도박장으로 들어갔던 청년은 감옥에서 자신의 친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복 있는 사람같이 악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시편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2).”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들의 뿌리는 선과 악의 기준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동안 서구세계의 선악의 기준은 성경이 절대기준이었습니다. 이제 성경을 부인함으로 절대기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전통과 가부장적 전통이 모든 사회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모든 제도가 무너졌습니다. 연장자의 말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요즘은 누가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느냐가 권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전통이 무너지고, 정보가 권위가 되었고,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정보에 어둡기 때문에 무시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의 특징인 다원주의는 기존의 선악의 기준을 완전히 파기시켜 버렸습니다. 이로써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리어 자신들이 선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가정과 결혼은 자신의 자유를 옭아매는 구속의 틀로 생각하여 가정과 결혼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가격 파괴, 상식 파괴, 기존 가치관 파괴, 권위 파괴, 파괴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가격 파괴는 우리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상도덕이 있는 것입니다. 롯데 마트에서 LA갈비를 50% 세일한다고 합니다. 지금 소와 돼지를 100만 마리나 살 처분하는 등 축산업계가 초비상 상태인데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것을 싸다고 사먹는 시민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마구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의 파괴, 가치관의 파괴, 인간관계의 파괴, 윤리와 도덕 파괴, 사회질서의 파괴, 인격과 양심은 파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멸망은 바로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파괴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파괴할 때 사회에 가져다주는 것은 혼돈과 혼란뿐입니다.
사람들은 선악의 기준 없이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 옳은 소신대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옳으며 그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선이냐 보다, 무엇이 유익이 되느냐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중이 가는 길이 선이고, 다수가 가는 길이 선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가치보다 물량을 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판단 기준을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비싸냐? 규모가 얼마나 크냐? 아파트 평수가 얼마냐? 사이즈에 관심이 큽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버드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수의 길,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전차 기관사이고, 시속 100km로 철로를 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저 앞에서 5명이 일하고 있어 전차를 멈추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가면 5명이 죽는다. 이 때 오른쪽에 비상 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인부가 1명이 있다. 핸들은 작동이 되기 때문에 핸들을 돌리면 한 사람이 죽는 대신 5명은 살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핸들 돌려, 죄 없는 한 명을 죽여 5명은 살릴 수 있지 않아? 당신은 그것이 정당한가?”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겠습니까?
우리는 거대한 자본주의 논리에 길들여져 크고 많고 대중적인 것을 선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것을 선으로 생각합니다. 대중의 스타를 최고로 여깁니다. 힘과 성공을 출세를 지상과제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중 속으로 의식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탐욕과 음란과 쾌락의 흐름으로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기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자리 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선은 선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고, 악은 악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또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이 최고 권위의 기준으로 삼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원리, 성경의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보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궁창의 빛은 어떤 빛입니까? 궁창이란 눈에 보이는 대기권의 하늘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한한 우주를 가리킵니다. 그 궁창에는 수많은 별들이 은하계를 이루어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 빛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온 우주에 비추인 그 빛입니다. 그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 빛은 태초에 모든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요, 모든 빛의 근원이 되는 빛입니다.
그런데, 지혜 있는 자는 바로 그러한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가장 짙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아무리 어두운 세상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사방이 완전히 막힌 캄캄한 곳에서도 빛을 발하여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두운 세상이라 할지라도 어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잠언 9장 10절은 지혜 있는 자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혜의 반대는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죽었다”, “인간이 아메바에서 나왔다”, “인간의 조상을 원숭이다”라고 말합니다. 고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도리어 우준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만들어 우상숭배자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경험주의 교육에 익숙해 눈으로 봐야만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지어지는 것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했다고 우리 교회가 우연히 생겼을까요? 물과 모래와 시멘트가 저절로 혼합되어 지어졌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창조주가 없이 이 우주가 우연히 생겼다고 말하면 그 또한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도 시대에 맡겨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이 시대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유일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빛의 밝기(촉수)를 줄여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큰 빛 예수님을 받아 비추는 작은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마저 빛을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빛의 생명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더욱 더 빛을 발하여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더욱 더 분명하게 피 묻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성경의 핵심 진리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고, 궁창의 빛과 같이 됩니다. 우리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됩니다.
누가 지혜 있는 자인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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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들을 만납니다. 이 문제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문제들을 잘 해결할 때 행복하고 아름답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문제들을 잘 풀어갈 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지식은 돈으로 또는 짧은 시간에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지식처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오랜 경험의 축적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교육과 많은 독서량, 그리고 부모의 영향이 큽니다. 무엇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5). 그리고 지식은 어떤 사물이나 이론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지식을 바르게 사용하는 힘,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판단력입니다. 지혜란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Wisdom is the ability to use well the experience and knowledge in order to make a good decision.).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질축복을 위한 기도는 많이 하지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지식보다 지혜를 가르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리했을 때 오늘날 3%(미국 인구 3억, 900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의 정치 경제 금융 문화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상위 6대 은행 중 대부분이 유대인의 자본입니다. 세계 최고의 투기꾼으로 불리는 소로스도 유대인입니다. 세계적 언론재벌 머독도 유대인입니다(뉴욕 포스트, 타임스, 폭스 방송, 20세기 폭스 등). 영화계도 유대 마피아가 할리우드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스탠리 큐브릭, 우디 앨런 등이 유대계 감독들입니다.
성경은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여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소중하다고 말씀합니다(잠3:13-15).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이 얻는 복이 무엇입니까? 신년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합니다.
잠언 11장 2절을 보겠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When pride comes, then comes disgrace, but with humility comes wisdom.).”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교만은 자기가 좀 배웠다고, 좀 많이 가졌다고, 좀 많이 안다고, 자기가 좀 뛰어나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대개 빈 깡통이 요란하다고 든 것 없는 사람이 교만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분수나 자기 위치를 몰라 할 말 못 할 말을 합니다. 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따라서 우리는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일이 잘 될 때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다 보셨을 것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떠다니는 궁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배가 왜 침몰했습니까?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4월 12일 승객 2,206명을 태우고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출항한지 나흘 후 배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항해사는 거대한 ‘타이타닉 호’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선장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점점 빙산을 향하여 나아갔고, 급박해진 통제소에서는 계속 무전을 보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항해사는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전방에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설마 이 ‘타이타닉 호’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 선장도 “하나님이라도 이 튼튼한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해안 통제소의 경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킬로미터도 못 가서 타이타닉 호는 북대서양 한복판에서 거대한 빙산과 충돌하여 차가운 바다 속으로 침몰했습니다. 결국 2,206여명의 승객 중 1,500여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알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높이십니다(약4:6, 벧전5:5).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크리스천의 덕목 중에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처럼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익으면 익을수록 쳐드는 보리이삭처럼 머리를 꼿꼿이 세웁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울 때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길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계급과 서열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교회는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곳입니다. 군 교회를 가면 장군들이 차량을 안내하고 사병들을 고개 숙여 인사하며 안내합니다. 인정은 직장에 가서 받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힘이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누가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고, 누가 교회를 섬기고, 젊은이들을 섬길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이 시대를 섬기고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는 어머니를 기념하여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그 자리에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문을 좁고 또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교만하고 뻣뻣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자기를 낮춘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울 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겸손하여 선배가 후배를 보살펴 주고, 후배가 선배를 섬겨 주고, 같은 동료끼리는 서로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올드미스, 골드 미스, 노총각들이 겸손하여 믿음 안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멀리합니다.
잠언 14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을 멀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무엇이 악한 일인지, 빨리 알아차리고 올바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악을 떠나지 않다가 결국 망하게 됩니다.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명의 젊은이가 도박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도박장 바로 옆에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도박장으로 들어가던 두 청년 중 한 명이 다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오늘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 그러자 그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면서 “사나이가 한번 결심을 했으면 가야지. 교회라니 무슨 소리야?”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도박장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람은 교회로 갔습니다.
그 날 교회에 갔던 청년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박장에 갔던 청년은 더욱 타락하여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흘렸습니다. 그때 교회에 간 청년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제 22대 24대 대통령인 클리블랜드입니다. 그러나 30년 전 도박장으로 들어갔던 청년은 감옥에서 자신의 친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복 있는 사람같이 악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시편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2).”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들의 뿌리는 선과 악의 기준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동안 서구세계의 선악의 기준은 성경이 절대기준이었습니다. 이제 성경을 부인함으로 절대기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전통과 가부장적 전통이 모든 사회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모든 제도가 무너졌습니다. 연장자의 말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요즘은 누가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느냐가 권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전통이 무너지고, 정보가 권위가 되었고,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정보에 어둡기 때문에 무시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의 특징인 다원주의는 기존의 선악의 기준을 완전히 파기시켜 버렸습니다. 이로써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리어 자신들이 선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가정과 결혼은 자신의 자유를 옭아매는 구속의 틀로 생각하여 가정과 결혼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가격 파괴, 상식 파괴, 기존 가치관 파괴, 권위 파괴, 파괴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가격 파괴는 우리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상도덕이 있는 것입니다. 롯데 마트에서 LA갈비를 50% 세일한다고 합니다. 지금 소와 돼지를 100만 마리나 살 처분하는 등 축산업계가 초비상 상태인데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것을 싸다고 사먹는 시민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마구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의 파괴, 가치관의 파괴, 인간관계의 파괴, 윤리와 도덕 파괴, 사회질서의 파괴, 인격과 양심은 파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멸망은 바로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파괴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파괴할 때 사회에 가져다주는 것은 혼돈과 혼란뿐입니다.
사람들은 선악의 기준 없이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 옳은 소신대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옳으며 그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선이냐 보다, 무엇이 유익이 되느냐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중이 가는 길이 선이고, 다수가 가는 길이 선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가치보다 물량을 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판단 기준을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비싸냐? 규모가 얼마나 크냐? 아파트 평수가 얼마냐? 사이즈에 관심이 큽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버드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수의 길,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전차 기관사이고, 시속 100km로 철로를 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저 앞에서 5명이 일하고 있어 전차를 멈추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가면 5명이 죽는다. 이 때 오른쪽에 비상 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인부가 1명이 있다. 핸들은 작동이 되기 때문에 핸들을 돌리면 한 사람이 죽는 대신 5명은 살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핸들 돌려, 죄 없는 한 명을 죽여 5명은 살릴 수 있지 않아? 당신은 그것이 정당한가?”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겠습니까?
우리는 거대한 자본주의 논리에 길들여져 크고 많고 대중적인 것을 선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것을 선으로 생각합니다. 대중의 스타를 최고로 여깁니다. 힘과 성공을 출세를 지상과제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중 속으로 의식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탐욕과 음란과 쾌락의 흐름으로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기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자리 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선은 선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고, 악은 악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또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이 최고 권위의 기준으로 삼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원리, 성경의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보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궁창의 빛은 어떤 빛입니까? 궁창이란 눈에 보이는 대기권의 하늘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한한 우주를 가리킵니다. 그 궁창에는 수많은 별들이 은하계를 이루어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 빛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온 우주에 비추인 그 빛입니다. 그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 빛은 태초에 모든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요, 모든 빛의 근원이 되는 빛입니다.
그런데, 지혜 있는 자는 바로 그러한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가장 짙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아무리 어두운 세상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사방이 완전히 막힌 캄캄한 곳에서도 빛을 발하여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두운 세상이라 할지라도 어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잠언 9장 10절은 지혜 있는 자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혜의 반대는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죽었다”, “인간이 아메바에서 나왔다”, “인간의 조상을 원숭이다”라고 말합니다. 고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도리어 우준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만들어 우상숭배자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경험주의 교육에 익숙해 눈으로 봐야만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지어지는 것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했다고 우리 교회가 우연히 생겼을까요? 물과 모래와 시멘트가 저절로 혼합되어 지어졌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창조주가 없이 이 우주가 우연히 생겼다고 말하면 그 또한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도 시대에 맡겨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이 시대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유일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빛의 밝기(촉수)를 줄여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큰 빛 예수님을 받아 비추는 작은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마저 빛을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빛의 생명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더욱 더 빛을 발하여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더욱 더 분명하게 피 묻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성경의 핵심 진리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고, 궁창의 빛과 같이 됩니다. 우리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