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신년메시지(골 2:6-7, 3:1-4)
그 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용비어천가는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세,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 그칠세”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 안에서 뿌리를 박아 굳게 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안에서’라는 단어가 164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 구원받는다는 뜻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고 열매 또한 맺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는 유기적인 관계, 연합의 관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은 ‘아담 안’이라는 말과의 대조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는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이 왕 노릇 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그 안’이란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주 안’의 반대는 ‘주 밖’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허약과 좌절, 실패와 고통, 파괴와 분열입니다. 반면에 주 안에는 건강과 회복,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와 찬양입니다. 2017년 새 해를 맞아 주 안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굳게 서서 어떤 파고가 몰려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그 안에서 행하고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고 굳게 서라(골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리스도 예수를 주’에서 ‘주’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롬 10:9).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심은 복음의 핵심이자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주 되심(Lordship)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행한다(walk in Him, KJV, continue to live in Him, NIV)’는 함께 걷다 동고동락한다는 뜻입니다. 사제동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내가 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멈추시는 곳에 내가 멈추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밤에 불기둥이 멈추면 멈추고 출발하면 출발했습니다. 낮에 구름기둥이 멈추면 멈추고 출발하면 출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성도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 성경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뜻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으로 여기는 삶을 말합니다.
둘째, 그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뜻은 헬라어로 완료형 분사로, 주 안에 뿌리를 박는 것은 이미 완료된 기성사실이고, 이제부터는 계속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크기는 그 뿌리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뿌리가 깊이 내려진 나무는 비바람에도 넘어지거나 뽑히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뿌리를 예수님께 깊이 내리지 않으면 작은 역경과 환난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구체적으로 구원과 부르심에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합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불러내어 사랑하는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우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은혜에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나를 구워하신 예수님을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구원의 은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구원이 보편적이라면 부르심은 구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다를 수 없지만 부르심에는 사람의 모양이 다르듯이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vision statement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고백 위에 지역을 기도와 봉사와 말씀으로 섬기는 지역교회, 미래를 향한 대학을 섬기는 대학교회, 열방을 향해 나가는 세계선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됩니다(시 1:3).
셋째,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세움을 받는다’는 뜻은 헬라어로 현재 분사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그 기초 위에 계속적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짓되 어떤 재료로 집을 짓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13절을 보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을 수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금과 은, 보석으로 짓기보다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짓는 것은 구하기 쉽고, 또 쉽게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구하기도 힘들고,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요즘 같이 대량생산 시대와 속성재배 시대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것이 훨씬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 시련을 만날 때입니다. 불 심판을 받을 때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다 타 없어지지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않게 됩니다. 불에 타지 않는 금과 은, 보석들은 용광로에 몇 번씩 들어갔다 나와 모든 불순물들이 제거된 순도 높은 재료들입니다. 이처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다는 것은 자기가 온전히 깨지고 녹고 부서진 믿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믿음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과 훈련을 통해 순수하게 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고난과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니라.”(벧전 1:7)
이 세상은 혼탁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점점 퇴색되어 상대적이고 육신적입니다. 음란하고 물질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종 용광로 훈련을 통해 이런 죄악된 생각과 사상들이 다 녹아나고 순수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시련과 역경으로 형성된 믿음이야말로 고귀한 믿음입니다. 역경은 믿음을 견고히 할 수 있다는 도구요 재료입니다. 우리가 역경을 겪을 때 그 역경을 믿음의 재료 받아들여 믿음의 거목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굳게 서야 합니다.
‘굳게 서라’는 군사 용어로, 어떤 적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는 군인들의 임전무퇴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적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굳게 서있는 충성된 군인의 자세를 뜻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들고 짜증스럽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주의와 육신주의가 성행하여 도덕과 윤리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힘, 도덕적인 힘, 영적인 소망 같은 것은 저울에 달아보아도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며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 그리고 쾌락만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인간성은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에 시달립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해야 합니다. 이때에 나를 이기고, 시대를 이기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이 넘쳐야 합니다.
2.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골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1)
첫째, 위의 것을 찾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였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였습니다(롬 6:5). 이제 바울은 영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가진 사람은 위 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set your heart on things above, NIV).”에서 ‘찾는다’는 단어는 현재 명령법으로써 지속적으로, 그것에 대한 애정, 그것에 대한 열심, 그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으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 ‘구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위의 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중심한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늘의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외적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나가는지, 십일조를 드리는지의 여부와 같은 외적인 것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가치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매우 소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을 알지 못하고 영생을 알지 못하고 천국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세례를 받음으로 죽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우리는 이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영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이 계신 저 하늘을 바라보며 그곳을 소망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땅을 바라보면 죄악과 절망과 낙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 영광을 보고, 나 자신을 보면 나라는 존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란 존재가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이런 죄인을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게 될 때 우리는 해같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보고 다음에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직장을 보고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하늘을 보고 다음에 땅을 보게 되면 그 순간 마음에서 기쁨과 찬송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이웃을 보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되는 하늘 문이 열립니다. 온갖 좋은 것들은 위에 있고 위로부터 옵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땅 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위를 보면 그리스도가 보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아주 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실수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가 실수하게 된 것은 위를 보지 못하고 백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때 위를 보지 않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다가 실수했습니다.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데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두 번 쳤습니다(민 20:11). 그가 위를 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땅을 보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세상을 보다보니 그만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가로막히고 뒤로 돌이킬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위를 바라보고 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암벽을 오를 때 끝까지 위를 쳐다보고 오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오르다가 무섭다고 밑을 내려다보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하게 됩니다. 이처럼 끝까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 삶의 길이 있습니다.
둘째, 위의 것을 생각하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생각한다’(φρονείτε)는 것은 ‘판단하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의 것에 애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set your affection on things above). 우리가 어떤 것에 애정을 갖게 되면 늘 그것을 생각하게 되고 늘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간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이처럼 애정과 관심은 일치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생각의 정도에 따라서 그 수준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생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소유, 능력, 학벌 등 소위 ‘스펙’을 보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원대한 꿈을 꾸고, 원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깊고 깨끗한 사람이 고 상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분과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하는 것이 천박하면 천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위의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위의 것은 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등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땅의 것들은 현재 눈에 보이는 일체의 것들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할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골 3:3상).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땅의 것에 대해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땅의 것을 찾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골 3:3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추어진 현재적인 하늘의 영적 생명 입니다. ‘감추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골 3:4).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날은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재앙의 날이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는 영광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는 부활의 새 몸, 영광의 새 몸이 됩니다. 죽음이 최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는 영광 중에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새 해를 맞아 주 안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굳게 서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아 밀려오는 모든 파고를 이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