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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메시지제 4강(사사기 21:25, 마26:39)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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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절대주의가 사라지고 상대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사회가 지나가고 정보화지식 사회가 도래함으로 상대주의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렸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교회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해 절대적인 복음 진리가 무너지고 상대주의가 교회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가정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학교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와 가정이 어떻게 되겠고, 학교와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학교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게 됩니다.
상대주의는 헬라의 소피스트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성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오늘 읽은 사사기 21:25절과 똑같습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가치관이 옳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생각입니다. 그 때 그 사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리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여 죽게 한데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런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생이 선생이 때렸다고 폰으로 112에 신고합니다. 선생이 학생을 성추행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자식이 부모가 때렸다고 경찰에 고발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때리고, 남편이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 성윤리와 도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을 지탱해 준 버팀목은 그래도 유교의 덕목이었습니다. 유교의 덕목은 한마디로 仁입니다. 仁(人+二)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설정입니다. 仁에 대한 구체적인 덕목을 삼강오륜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삼강오륜은 상호간의 관계를 설정한 윤리입니다. 三綱은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 즉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五倫은 오륜올림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의 인간윤리, 즉 군신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부자 사이의 친애(父子有親), 부부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아이의 차서(長幼有序), 벗 사이의 신의(朋友有信)입니다.
십계명도 첫 번째 계명으로부터 넷째 계명을 빼고, 다섯째 계명으로 시작하여 10번째 계명은 상호 인간관계에 대한 말씀이라면 윤리의 기본 원칙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윤리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차이가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윤리는 케케묵은 봉건사회의 윤리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 가정과 사회를 지탱해 줄 어떤 절대적인 가치관, 절대적인 덕목이 없이 각자 자기 소신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도 성경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하나님의 가치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사기 21:25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성경은 왕 되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때 자기의 소견, 자기의 의지, 자기의 본성대로 살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본성대로의 삶은 마치 중력과 같아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이끕니다. 이성희 목사는 21세기의 정보화 사회를 일컬어 거미와 같은 삶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 web을 쳐놓고 중앙에 자리를 딱 잡아놓고 먹이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특징을 하나님 자리에 내가 자리 잡고 있다고 규정합니다. 나의 중심이 누구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시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 잡고 있느냐 하면 내가 들어가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내가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적인 본성, 이기적인 욕망이 우리를 강하게,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내 안으로 끌어당기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될 때에 모든 판단의 기준이 유익을 기초로 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릴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버립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믿음도 버립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친구도 버립니다. 심지어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아내를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스승도 버립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버리고, 자식까지도 버립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진리냐, 불의냐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느냐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귀하냐, 귀하지 않으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게 유익이냐, 유익이 아니냐를 따집니다. 기준이 가치가 있느냐보다는 이용가치가 있느냐, 가격이 얼마냐? 수량, 가격으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일찌기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天動說)이 아닌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획기적인 사상으로 기존 가치 체계를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신대륙을 발견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나를 중심한 ‘나동설’의 지배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인, 자기 멋대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에게 진리의 왕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진리의 왕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다스려 주십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좇을 때 상대적인 가치관에서 절대적인 가치관, 상대적인 삶에서 절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내 중심대로 사는 삶이 “나 動說”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중심대로, 성경의 원리대로 사는 “神 動說”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가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된 삶인가를 찾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찾습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귀하며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찾습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남을 돕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남을 사랑하고 섬기고 나눠주는 것을 아주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목적이 복을 받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함은 아닙니까? 물론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참된 목적은 복을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5은 신앙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리고 소요리 문답 제 1문에서 인생의 제 1 되는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복 받기 위함이라면 해나 달이나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돼지 대가리에다 절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만일 우리 중에 복을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십시오. 그리고 나 하나 믿고 구원받아 천당에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 또한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나 하나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증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하여져 이 시대의 문화, 세속문화를 변혁하여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여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를 꽃피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신앙의 목적이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고자 하는 무속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구원을 받고도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예가 있습니다. 한 믿음 좋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믿음으로 그 집 모든 자녀들이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딸이 결혼할 남편이 신자이기는 하지만 목사님보다는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한 교수님을 모시고 주례를 서고 싶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랑 편을 들어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5분, 10분, 30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양가 부모나 하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교통경찰이 신부가 화장을 하고 결혼식장에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딸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뭐랬니, 목사님 모시고 결혼하라고 했지 않아!”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교수님을 모시고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교수님을 주례로 모시고 하고자 했기 때문일까요?
목사님을 모시고 했다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요? 목사가 무슨 신접(神接)한 박수(拍手)입니까? 목사는 박수가 아닙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베고 자면 머리가 좋아지고, 성경을 차에다 싣고 다니면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줄로 생각하여 성경을 베고 자고, 성경을 차에다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적을 일으키는 마술 책이 아니라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무속 신앙을 버리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각자 놀았습니다. 그 때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멸망이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마태복음 26:39절을 읽겠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거나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찌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워 주신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얼굴에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하나님께 복종코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양들 문제, 결혼 문제 등 수 없이 생깁니다. 이 때 어떤 분은 체념하거나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드러눕습니다. 어떤 분은 하필이면 나에게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두려움에 시달려 아무 것도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무조건 먹고 잠을 잡니다. 어떤 분은 남편의 속을 박박 긁어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없는 자녀들을 구박합니다. 어떤 분은 남자의 왕을 보라 갑니다. 어떤 분은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게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갈등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길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반면에 인간적인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사단 의 공격을 받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절망의 때에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39b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잔’이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합니다. ‘마일 할 만하시거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이외에 구원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통해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소원이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but)’ 이는 자기에게서 하나님께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이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요, 회피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코자 하시는 주님의 의지요, 소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특징은 첫째로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원도 많고 자기 계획과 뜻도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각자에게 두신 소원과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원대로 살고 싶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삶의 style대로, 자기 fashion대로, 자기 계획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인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뜻에는 No!, 하나님의 뜻에는 Yes! 합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자기 멋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멋대로 멋진 삶을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의 생애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본성대로 살면 멸망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인간의 소원과 뜻은 좁고 편협하지만 하나님의 소원과 뜻은 장엄하고 스케일이 크고 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우리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광대합니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태어난 작은 개구리는 대대로 이 우물에서 살면서 마음껏 놀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없을 거야.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물 꼭대기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개구리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 위에는 뭐가 있을까?’ 개구리는 우물 벽을 타고 천천히 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이르러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럴 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연못이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연못은 자신이 살던 우물보다 수백배나 크지 않은가! 과감히 앞으로 더 나아갔더니 이번에는 커다란 호수가 보였습니다. 개구리는 놀라움에 입을 딱 벌리고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개구리는 더 큰 희망을 품고 강ㅇ[서 바다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온통 물 천지였습니다. 개구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비좁은 생각 속에서 살아왔는지 한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에 비하면 우물 안에 누렸던 모든 즐거움은 양동이 속의 물 한 바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조그만 우물에 갇혀 시시한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낮은 수준의 삶과 비좁은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드넓은 비전과 소망을 좇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세계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까? 이는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고 아픔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고자 할 때 고난이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난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 뜻을 구하고 자기 가치관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나라(막8:34).” 믿음생활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리는 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믿음 생활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삶은 신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생활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신자란 모름지기 2중 3중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2중, 3중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믿음생활이란 바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easy going이 아니라 hard workingship을 갖는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의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인류 구원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금년에는 자기 소견대로, 자기 원대로, 자기 뜻대로 살지 말고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비전대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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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절대주의가 사라지고 상대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사회가 지나가고 정보화지식 사회가 도래함으로 상대주의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렸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교회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해 절대적인 복음 진리가 무너지고 상대주의가 교회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가정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학교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와 가정이 어떻게 되겠고, 학교와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학교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게 됩니다.
상대주의는 헬라의 소피스트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성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오늘 읽은 사사기 21:25절과 똑같습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가치관이 옳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생각입니다. 그 때 그 사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리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여 죽게 한데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런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생이 선생이 때렸다고 폰으로 112에 신고합니다. 선생이 학생을 성추행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자식이 부모가 때렸다고 경찰에 고발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때리고, 남편이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 성윤리와 도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을 지탱해 준 버팀목은 그래도 유교의 덕목이었습니다. 유교의 덕목은 한마디로 仁입니다. 仁(人+二)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설정입니다. 仁에 대한 구체적인 덕목을 삼강오륜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삼강오륜은 상호간의 관계를 설정한 윤리입니다. 三綱은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 즉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五倫은 오륜올림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의 인간윤리, 즉 군신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부자 사이의 친애(父子有親), 부부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아이의 차서(長幼有序), 벗 사이의 신의(朋友有信)입니다.
십계명도 첫 번째 계명으로부터 넷째 계명을 빼고, 다섯째 계명으로 시작하여 10번째 계명은 상호 인간관계에 대한 말씀이라면 윤리의 기본 원칙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윤리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차이가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윤리는 케케묵은 봉건사회의 윤리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 가정과 사회를 지탱해 줄 어떤 절대적인 가치관, 절대적인 덕목이 없이 각자 자기 소신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도 성경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하나님의 가치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사기 21:25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성경은 왕 되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때 자기의 소견, 자기의 의지, 자기의 본성대로 살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본성대로의 삶은 마치 중력과 같아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이끕니다. 이성희 목사는 21세기의 정보화 사회를 일컬어 거미와 같은 삶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 web을 쳐놓고 중앙에 자리를 딱 잡아놓고 먹이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특징을 하나님 자리에 내가 자리 잡고 있다고 규정합니다. 나의 중심이 누구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시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 잡고 있느냐 하면 내가 들어가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내가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적인 본성, 이기적인 욕망이 우리를 강하게,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내 안으로 끌어당기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될 때에 모든 판단의 기준이 유익을 기초로 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릴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버립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믿음도 버립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친구도 버립니다. 심지어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아내를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스승도 버립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버리고, 자식까지도 버립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진리냐, 불의냐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느냐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귀하냐, 귀하지 않으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게 유익이냐, 유익이 아니냐를 따집니다. 기준이 가치가 있느냐보다는 이용가치가 있느냐, 가격이 얼마냐? 수량, 가격으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일찌기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天動說)이 아닌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획기적인 사상으로 기존 가치 체계를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신대륙을 발견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나를 중심한 ‘나동설’의 지배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인, 자기 멋대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에게 진리의 왕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진리의 왕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다스려 주십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좇을 때 상대적인 가치관에서 절대적인 가치관, 상대적인 삶에서 절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내 중심대로 사는 삶이 “나 動說”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중심대로, 성경의 원리대로 사는 “神 動說”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가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된 삶인가를 찾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찾습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귀하며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찾습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남을 돕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남을 사랑하고 섬기고 나눠주는 것을 아주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목적이 복을 받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함은 아닙니까? 물론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참된 목적은 복을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5은 신앙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리고 소요리 문답 제 1문에서 인생의 제 1 되는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복 받기 위함이라면 해나 달이나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돼지 대가리에다 절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만일 우리 중에 복을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십시오. 그리고 나 하나 믿고 구원받아 천당에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 또한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나 하나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증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하여져 이 시대의 문화, 세속문화를 변혁하여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여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를 꽃피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신앙의 목적이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고자 하는 무속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구원을 받고도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예가 있습니다. 한 믿음 좋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믿음으로 그 집 모든 자녀들이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딸이 결혼할 남편이 신자이기는 하지만 목사님보다는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한 교수님을 모시고 주례를 서고 싶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랑 편을 들어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5분, 10분, 30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양가 부모나 하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교통경찰이 신부가 화장을 하고 결혼식장에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딸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뭐랬니, 목사님 모시고 결혼하라고 했지 않아!”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교수님을 모시고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교수님을 주례로 모시고 하고자 했기 때문일까요?
목사님을 모시고 했다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요? 목사가 무슨 신접(神接)한 박수(拍手)입니까? 목사는 박수가 아닙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베고 자면 머리가 좋아지고, 성경을 차에다 싣고 다니면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줄로 생각하여 성경을 베고 자고, 성경을 차에다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적을 일으키는 마술 책이 아니라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무속 신앙을 버리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각자 놀았습니다. 그 때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멸망이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마태복음 26:39절을 읽겠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거나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찌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워 주신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얼굴에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하나님께 복종코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양들 문제, 결혼 문제 등 수 없이 생깁니다. 이 때 어떤 분은 체념하거나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드러눕습니다. 어떤 분은 하필이면 나에게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두려움에 시달려 아무 것도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무조건 먹고 잠을 잡니다. 어떤 분은 남편의 속을 박박 긁어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없는 자녀들을 구박합니다. 어떤 분은 남자의 왕을 보라 갑니다. 어떤 분은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게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갈등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길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반면에 인간적인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사단 의 공격을 받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절망의 때에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39b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잔’이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합니다. ‘마일 할 만하시거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이외에 구원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통해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소원이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but)’ 이는 자기에게서 하나님께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이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요, 회피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코자 하시는 주님의 의지요, 소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특징은 첫째로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원도 많고 자기 계획과 뜻도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각자에게 두신 소원과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원대로 살고 싶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삶의 style대로, 자기 fashion대로, 자기 계획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인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뜻에는 No!, 하나님의 뜻에는 Yes! 합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자기 멋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멋대로 멋진 삶을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의 생애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본성대로 살면 멸망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인간의 소원과 뜻은 좁고 편협하지만 하나님의 소원과 뜻은 장엄하고 스케일이 크고 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우리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광대합니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태어난 작은 개구리는 대대로 이 우물에서 살면서 마음껏 놀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없을 거야.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물 꼭대기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개구리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 위에는 뭐가 있을까?’ 개구리는 우물 벽을 타고 천천히 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이르러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럴 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연못이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연못은 자신이 살던 우물보다 수백배나 크지 않은가! 과감히 앞으로 더 나아갔더니 이번에는 커다란 호수가 보였습니다. 개구리는 놀라움에 입을 딱 벌리고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개구리는 더 큰 희망을 품고 강ㅇ[서 바다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온통 물 천지였습니다. 개구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비좁은 생각 속에서 살아왔는지 한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에 비하면 우물 안에 누렸던 모든 즐거움은 양동이 속의 물 한 바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조그만 우물에 갇혀 시시한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낮은 수준의 삶과 비좁은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드넓은 비전과 소망을 좇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세계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까? 이는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고 아픔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고자 할 때 고난이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난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 뜻을 구하고 자기 가치관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나라(막8:34).” 믿음생활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리는 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믿음 생활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삶은 신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생활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신자란 모름지기 2중 3중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2중, 3중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믿음생활이란 바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easy going이 아니라 hard workingship을 갖는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의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인류 구원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금년에는 자기 소견대로, 자기 원대로, 자기 뜻대로 살지 말고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비전대로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