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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3 강(말씀, 1:12-26, 요절 : 1:14)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니라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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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습니까(12,13a)? 그곳에 누가 모였으며 그 수는 얼마였습니까(13-15)? 그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14)?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그들로부터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2.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유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16-20)? 이런 그를 통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3. 사도가 될 사람의 자격과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21-25)? 그들은 어떻게 맛디아를 뽑았습니까(26)?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아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시킨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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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4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기간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정함이 없는 기다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 행동에 앞서 순종하는 것, 순종하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이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내려와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인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는 예루살렘성전 뜰 밖으로 한 바퀴 도는 거리를 말합니다. 이 거리가 약 2000큐빗, 그러니까 약 900m의 거리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 숫자가 120명입니다. 120명이 좁은 다락방에서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모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몇 일간이나 그곳에 있었습니까? 하루 이틀? 아닙니다. 무려 10일입니다.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는 50일이고, 예수님의 승천에서 오순절까지는 10일입니다. 제자들은 10일간 좁은 마가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자, 120명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렇게 순종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모여서 10일간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이 모여서 토론했습니까? 그들이 모여서 우리 잘 해보다고 단합대회를 했습니까? 그들이 모여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세미나를 열었습니까? 아니면 작전을 짰습니까? 그들은 모여서 3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 첫째는 그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여 가룟 유다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셋째는 그들이 깨어진 성령의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3가지를 하나하나 묵상하여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합심하여 기도하는 제자들(13,14). 13절과 14a절을 보면 가룟 유다를 뺀 11명의 사도들과 여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14b절을 보겠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들의 기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도이고, 기도 중에서도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이고, 이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하되, 그것도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120명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만 모여도 각기 생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뜻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셋만 모여 보세요.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120명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귀하게 여기지만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더욱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기도를 속히 응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르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미국의 캐서린 쿨만은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 다르고,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다르다.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피우는 것과 같다. 장작불을 피울 때에 나뭇가지를 하나 피울 때와 둘 피울 때가 다르지 않는가? 장작을 많이 갖다놓고 불을 피우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더 큰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열 명, 백 명, 천 명이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일심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부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친구와 함께 마음으로 함심하여 기도할 때, 요회(셀) 식구들과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한 목적, 한 마음,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독일 보헤미아 지방의 진젠도르프 공작이 만든 모라비안 형제단이 처음 생겼을 때에 그들은 두 명씩 기도를 24조로 만들어서 아침 일찍부터 하루에 1시간 씩 24시간 내내 그치지 않고 계속 합심 기도가 연결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24시간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이 24시간 내내 기도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기도조가 모여 합심 기도를 백 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모라비안 형제단이 크게 부흥하여 세계 선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선교로 세운 교회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선교의 세력은 미국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의 기도를 보면 자신의 어떤 개인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소원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어떤 일에든지 순종하겠으니 성령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집중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옆에 누가 있는지, 추운지 더운지, 배고픈지,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인위적인 기도, 때우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 전심으로, 집중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아주 전심으로 기도하는 한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지만 입은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얼굴이 벌거질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아주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이런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해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그 때 그녀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만들지 마소서.” 엘리는 이런 한나의 마음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같이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한나의 집중적인 기도를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넷째로 그들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의하시는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의하시는 기도는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 기도의 산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도가 웅변적이냐 하는 기도의 수사에도 있지 않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긴가 하는 기도의 기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는 기도의 음악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논증적인가 하는 기도의 논리에 있지도 않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순서와 규모에 맞느냐하는 기도의 방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의가 얼마나 옳으냐 하는 기도의 신학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귀하게 여기시고, 이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끙끙거리며, 문맥이 맞지 않는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도 매일 부딪치는 문제와 사건 앞에 마음으로 전심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마음으로, 전심으로, 집중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하는 마음으로, 생명으로 결탁된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가정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민족 복음화, 직장 복음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둘째, 가룟 유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도들(15-23). 초대 교회에 큰 걸림돌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어떻게 예수님이 가장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 있는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변증했습니다. 두 번째는 가룟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가”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저런 배신자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배신자는 원수보다 밉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많지도 않은 12명,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역자가 스승을 배반하여 참혹한 십자가에 죽게 하다니? 그것도 우발적으로 배반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획을 짜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승을 배반하다니? 그것도 뻔뻔스럽게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여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다니”
그들은 그런 가룟 유다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가룟 유다는 꺼림칙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공동체의 암적 존재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 문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지로(指路)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그는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 말씀을 기초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문제를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본래부터 예언된 것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천지는 폐할지언정 성경은 폐하지 못합니다(마5:18).
성경은 일찍이 시편 41편 9절에서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다”고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하여 유다의 문제를 시편 69편 말씀으로 풀어 나갔습니다.시편 69편은 예수님께서도 5번에 걸쳐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에서는 무죄하게 고난 받는 한 사람의 원수들이 아무 이유 없이 어떻게 그를 미워하고 모욕하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시69:4).” 끝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악하고 완악한 이 무리에게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를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69:24,25).” 가룟 유다는 기도대로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받은 은 30량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마27:5).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습니다(25).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배반자, 은혜를 악으로 갚은 가룟 유다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는 지옥의 심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다 문제를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팔아넘겼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만 백성이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공로자가 아닌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한 것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구원의 왕으로 만들고 만 백성을 구원할 구주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사악한 마음으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원하였는데, 그렇지 않자,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공로자가 아니라 그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성경에서 찾아 해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문제를 어디에서 답을 찾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성경적인 시각과 안목,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해석하고 논지할 수 있는 그런 식견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웨슬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 몇 장 몇 절에 의해서 그것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성경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으면 해답을 찾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 즉흥적으로, 부화뇌동한, 남이 장에 간다니까 무릎에다 망건을 쓰고 따라가는 삶이 아닌, 성경에서 모든 문제를 찾아 해결하고, 결정하는 그런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그릇을 만든 사도들(21-26). 베드로는 유다 문제를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 종지부를 찍고, 유다가 빠진 열 두 사도의 반열에 한 명을 뽑아 그 자리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는 열 두 보좌를 상징하는 자리요, 열 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교회의 질서와 그릇을 위하여 한 명을 뽑아 사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자격 조건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역사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21,22a절을 보겠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그 이후, 복음을 증거하시기 시작한 그 삼년 동안을 늘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들은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하고 체험한, 예수님의 공생애에 삼년을 함께 한 사람, 예수님과의 뜨거운 인격적인 만남,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람들 앞에 딱 11번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또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도 그것 가지고는 안되고, 예수님께서 지명하고 뽑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12 사도를 택하시고 세우셨습니다. 사도의 자격은 시험을 봐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명하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 명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두 사람,유스도와 맛디아, 모두 사도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뽑아 세워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그 때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12 사도의 그릇이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120명이 모여서 10일간 합심 기도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유다 문제를 성경 말씀으로 해결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로 성령의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했을 때 사도행전 2장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임했습니다. 정말 하나의 기도 제목을 놓고 한 마음, 한 뜻, 진심으로, 집중하여 ,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 부흥과 성장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니라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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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습니까(12,13a)? 그곳에 누가 모였으며 그 수는 얼마였습니까(13-15)? 그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14)?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그들로부터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2.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유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16-20)? 이런 그를 통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3. 사도가 될 사람의 자격과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21-25)? 그들은 어떻게 맛디아를 뽑았습니까(26)?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아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시킨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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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4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기간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정함이 없는 기다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 행동에 앞서 순종하는 것, 순종하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이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내려와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인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는 예루살렘성전 뜰 밖으로 한 바퀴 도는 거리를 말합니다. 이 거리가 약 2000큐빗, 그러니까 약 900m의 거리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 숫자가 120명입니다. 120명이 좁은 다락방에서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모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몇 일간이나 그곳에 있었습니까? 하루 이틀? 아닙니다. 무려 10일입니다.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는 50일이고, 예수님의 승천에서 오순절까지는 10일입니다. 제자들은 10일간 좁은 마가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자, 120명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렇게 순종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모여서 10일간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이 모여서 토론했습니까? 그들이 모여서 우리 잘 해보다고 단합대회를 했습니까? 그들이 모여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세미나를 열었습니까? 아니면 작전을 짰습니까? 그들은 모여서 3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 첫째는 그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여 가룟 유다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셋째는 그들이 깨어진 성령의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3가지를 하나하나 묵상하여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합심하여 기도하는 제자들(13,14). 13절과 14a절을 보면 가룟 유다를 뺀 11명의 사도들과 여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14b절을 보겠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들의 기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도이고, 기도 중에서도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이고, 이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하되, 그것도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120명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만 모여도 각기 생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뜻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셋만 모여 보세요.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120명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귀하게 여기지만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더욱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기도를 속히 응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르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미국의 캐서린 쿨만은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 다르고,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다르다.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피우는 것과 같다. 장작불을 피울 때에 나뭇가지를 하나 피울 때와 둘 피울 때가 다르지 않는가? 장작을 많이 갖다놓고 불을 피우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더 큰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열 명, 백 명, 천 명이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일심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부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친구와 함께 마음으로 함심하여 기도할 때, 요회(셀) 식구들과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한 목적, 한 마음,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독일 보헤미아 지방의 진젠도르프 공작이 만든 모라비안 형제단이 처음 생겼을 때에 그들은 두 명씩 기도를 24조로 만들어서 아침 일찍부터 하루에 1시간 씩 24시간 내내 그치지 않고 계속 합심 기도가 연결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24시간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이 24시간 내내 기도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기도조가 모여 합심 기도를 백 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모라비안 형제단이 크게 부흥하여 세계 선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선교로 세운 교회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선교의 세력은 미국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의 기도를 보면 자신의 어떤 개인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소원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어떤 일에든지 순종하겠으니 성령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집중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옆에 누가 있는지, 추운지 더운지, 배고픈지,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인위적인 기도, 때우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 전심으로, 집중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아주 전심으로 기도하는 한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지만 입은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얼굴이 벌거질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아주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이런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해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그 때 그녀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만들지 마소서.” 엘리는 이런 한나의 마음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같이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한나의 집중적인 기도를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넷째로 그들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의하시는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의하시는 기도는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 기도의 산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도가 웅변적이냐 하는 기도의 수사에도 있지 않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긴가 하는 기도의 기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는 기도의 음악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논증적인가 하는 기도의 논리에 있지도 않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순서와 규모에 맞느냐하는 기도의 방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의가 얼마나 옳으냐 하는 기도의 신학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귀하게 여기시고, 이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끙끙거리며, 문맥이 맞지 않는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도 매일 부딪치는 문제와 사건 앞에 마음으로 전심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마음으로, 전심으로, 집중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하는 마음으로, 생명으로 결탁된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가정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민족 복음화, 직장 복음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둘째, 가룟 유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도들(15-23). 초대 교회에 큰 걸림돌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어떻게 예수님이 가장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 있는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변증했습니다. 두 번째는 가룟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가”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저런 배신자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배신자는 원수보다 밉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많지도 않은 12명,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역자가 스승을 배반하여 참혹한 십자가에 죽게 하다니? 그것도 우발적으로 배반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획을 짜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승을 배반하다니? 그것도 뻔뻔스럽게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여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다니”
그들은 그런 가룟 유다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가룟 유다는 꺼림칙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공동체의 암적 존재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 문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지로(指路)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그는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 말씀을 기초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문제를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본래부터 예언된 것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천지는 폐할지언정 성경은 폐하지 못합니다(마5:18).
성경은 일찍이 시편 41편 9절에서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다”고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하여 유다의 문제를 시편 69편 말씀으로 풀어 나갔습니다.시편 69편은 예수님께서도 5번에 걸쳐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에서는 무죄하게 고난 받는 한 사람의 원수들이 아무 이유 없이 어떻게 그를 미워하고 모욕하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시69:4).” 끝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악하고 완악한 이 무리에게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를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69:24,25).” 가룟 유다는 기도대로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받은 은 30량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마27:5).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습니다(25).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배반자, 은혜를 악으로 갚은 가룟 유다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는 지옥의 심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다 문제를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팔아넘겼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만 백성이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공로자가 아닌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한 것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구원의 왕으로 만들고 만 백성을 구원할 구주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사악한 마음으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원하였는데, 그렇지 않자,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공로자가 아니라 그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성경에서 찾아 해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문제를 어디에서 답을 찾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성경적인 시각과 안목,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해석하고 논지할 수 있는 그런 식견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웨슬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 몇 장 몇 절에 의해서 그것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성경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으면 해답을 찾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 즉흥적으로, 부화뇌동한, 남이 장에 간다니까 무릎에다 망건을 쓰고 따라가는 삶이 아닌, 성경에서 모든 문제를 찾아 해결하고, 결정하는 그런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그릇을 만든 사도들(21-26). 베드로는 유다 문제를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 종지부를 찍고, 유다가 빠진 열 두 사도의 반열에 한 명을 뽑아 그 자리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는 열 두 보좌를 상징하는 자리요, 열 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교회의 질서와 그릇을 위하여 한 명을 뽑아 사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자격 조건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역사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21,22a절을 보겠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그 이후, 복음을 증거하시기 시작한 그 삼년 동안을 늘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들은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하고 체험한, 예수님의 공생애에 삼년을 함께 한 사람, 예수님과의 뜨거운 인격적인 만남,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람들 앞에 딱 11번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또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도 그것 가지고는 안되고, 예수님께서 지명하고 뽑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12 사도를 택하시고 세우셨습니다. 사도의 자격은 시험을 봐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명하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 명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두 사람,유스도와 맛디아, 모두 사도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뽑아 세워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그 때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12 사도의 그릇이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120명이 모여서 10일간 합심 기도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유다 문제를 성경 말씀으로 해결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로 성령의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했을 때 사도행전 2장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임했습니다. 정말 하나의 기도 제목을 놓고 한 마음, 한 뜻, 진심으로, 집중하여 ,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 부흥과 성장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