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제7강

조회 수 2931 추천 수 0 2012.07.11 02:18:14
사도행전 제 7 강(말씀, 2:37-41, 요절, 2:38)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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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시지를 들은 백성들의 마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37)?

2. 그들이 어떻게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까(38,39)? 회개와 세례, 그리고 성령으 선물에 대해 말해 보시오.

3. 그날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얼마나 되었습니까(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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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일생동안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행2:23).”, “너희가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시오. 그들이 “너희가 예수를 못 박았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예수를 못 박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시 여우같은 늙은 제사장인 가야바입니다. 가야바가 원흉입니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은 로마 군병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준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나아가 좀 더 넓게는 예수님이 재판 받을 때에,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그 밑에서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원흉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순례자들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무리들이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 베드로에게 어떤 반응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아마 세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덤덤한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저가 말하는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반발하는 무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생트집 잡지 말라, 우리가 언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는 말이냐?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 왜 당신은 우리를 정죄하느냐? 왜 우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비판하느냐?” 반면에 오늘 말씀처럼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37)”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였을 때에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가, 나의 정욕이, 나의 교만이, 나의 거짓과 술수가, 나의 불신과 원망과 불순종, 나의 욕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가리워졌던 것들이 밝은 빛 앞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자매들이 화장을 하고 오셨습니다. 화장이란 게 무엇입니까? 자신의 모습을 좀 예쁘게 하기 위하여, 혹은 좀 젊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름살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화운데이션을 발라보지만 캄캄한 저녁에는 몰라도 밝은 대낮에는 주름살이 다 드러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거룩한 척, 스스로 의인인 척, 스스로 깨끗한 척, 스스로 경건한 척, 스스로 진실한 것처럼 위장을 하고 가면을 쓰고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 마음에 찔리게 됩니다. 찔림이 있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찔린다는 것은 병자가 몸에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몸에 통증을 느끼면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있는 데 그 병은 간경화입니다. 간경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경화입니다. 하나님은 심경화에 걸린 사람의 마음도 찌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나의 거짓과 불신, 탐심이 가득한 사람인가, 고상한 척 하지만 얼마나 더럽고 추한가를 드러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좋은 소리 듣는 것으로 자족하던 사람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애통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뻣뻣하고 굳어졌던 목이 숙여집니다. 불신과 거짓과 탐욕으로 남을 찌르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찔려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 기도할 때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찔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8:1-12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들은 성벽을 재건한 후, water gate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서서 6시간 동안 에스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6시간 동안 앉아서 들은 것이 아니라 서서 들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한 시간만 말씀을 들어도 다리를 꼽니다. 그런데 그들은 장장 서서 6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듣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모두 동원하여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6절을 보면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때,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얼마나 복종하기를 원했는지, 한 말씀이 주어질 때마다 ‘아멘, 아멘’ 화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의 영혼을 굴복시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의 권위가 존중되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뿐만 아니라 7,8절을 보면 말씀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엉엉 울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바라볼 때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접촉되었을 때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며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의 포로가 된 것을 깨닫고 울었습니다. 성벽을 건축하고자 했지만 이방인들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음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에 부딪쳤을 때에 애통하는 눈물이 실로 Water Gate,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 눈물, 그들의 참회의 눈물, 우리 또한 말씀을 듣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죄로 인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민족의 죄로 인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곳에 생명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찌 할꼬? What shall we do?” 베드로에게 치유의 길을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속에는 베드로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씀을 듣는 자들의 바른 응답입니다.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덤덤하든지, 반발하든지, 아니면 어찌할꼬? 가슴을 치던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옆 사람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아픔을 느낍니까? 심경화에 걸려 덤덤하십니까? 아니면 반발심이 생깁니까? 찔림이 있는 사람은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3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로 ‘다르다’란 ‘메타’와 ‘생각’이라는 ‘노에오’의 합성어로, ‘생각을 다르게 하라, 생각을 고쳐라’ 란 뜻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는 것, 방향을 바꾸는 것, 결정된 마음과 뜻을 돌이켜 U-turn하는 것, change the way,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하여 살던 삶에서 방향을 바꿔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다고 하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후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했으면 삶이 변화되어야 하고, 윤리적인 삶,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콧물과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소감을 발표해도 그것으로 끝나면 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 연민에 불과합니다. 회개에는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애통이 뒤따르지만 슬픔 자체가 회개가 아닙니다. 사고와 행동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눈물이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용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어 밤거리를 헤매던 사람이 회개하였으면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기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회개했으면 실제적으로 주는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거짓과 술수로 정죄를 일삼던 사람이 회개를 했으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고, 회개에 따른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름 먹은 강아지처럼 뺀질뺀질거리는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영혼 구원, 영적 각성 운동의 시발점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를 깨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기의 삶의 스타일을 바꿔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생명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가슴을 치며 불신과 위선과 거짓과 안일과 탐욕과 정욕과 음란과 우상 숭배와 허영의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나의 의지보다는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5)” 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회개의 사인은 건강과 환경, 또는 여러 사건 등을 통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위기는 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예수를 믿는다는 공적인 고백입니다. 이는 결혼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결혼식은 공적인 부부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미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새로운 공동체,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불교나 유교의 제자에서 예수 제자가 되는 것,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교도가 유대교로 전환할 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루마니아수양회 후에 도미니크 자매가 세례를 받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세례 받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가족과 마을이 정교회에 나가는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큰 결단입니다.가족 친지들로부터 배척당할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또한 세례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어로 baptize, 물에 잠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나의 죄에 대한 죽으심임을 믿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믿는 것, 예수님과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고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승천과 예수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곧 나의 승천과 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례입니다.
셋째, 죄사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수 믿어 공부 잘하고, 인생 문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은 세상 복을 구하는 성황당이나 삼신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고자 함입니다. 마태복음 26:27,28절을 보겠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게 하고자 함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어떻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까?
첫째로 피는 죄의 사슬을 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13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의 권세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아홉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장자의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가축까지 모든 장자를 치셨습니다. 죽음의 재앙이 모든 장자를 칠 때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집만이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부나 권세나 사회적인 지위나 학력이나 아름다운 미모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만이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이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과 죽음의 재앙에서 건져 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골1:13).
둘째로 피는 언약을 인칩니다. 출애굽기 24:6-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후 그들 마음속에 박혀 있는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을 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 율법을 주시고 이를 준행토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언약을 견고케 하기 위해 피로 인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돌에 새긴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습니다. 이 언약이 파기되자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마련하셨습니다. 구약은 행위로 말미암은 행위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또 구약은 짐승의 피로 인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언약이요, 돌에 새기지 아니하고 마음판에 새겨진 언약입니다(렘31:31-34). 사람과 맺은 언약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한 언약도 하루 만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즈음 남녀 간의 사랑, 정치인들의 언약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하나 밖에 없는 아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도장을 치셨기 때문에 확실한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셋째로 피는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레위기 17:11절을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9:22절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으로, 이는 장차 올 구속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a)” 예수님은 단번에(once and for all)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1-15).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죄를 범할 때마다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덧입으면 됩니다.
넷째,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한 자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회개할 때에는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가 회개한 후에 처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고후 7:10, 딤후2:25). 여기에서 ‘성령의 선물’은 성령에 의해 회개한 자가 생활의 성화를 위하여 더 받게 되는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은 자는 이제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과거에는 자기 능력이나 자기 힘이나 자기 꾀로 자기 지략과 술수, 율법이나 자기 지식으로 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삽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하여 여러 말로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40)”고 했습니다. ‘구원’은 종말론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을 말합니다.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악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구원과 같습니다. 이로 인해 무려 3,000명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사야서 53:5,6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여 줍니다. 십자가는 어둡고 운명적인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여 줍니다. 십자가는 연약한 자를 위로하여 줍니다. 십자가는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십자가는 추한 죄인들을 순결케 합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 그리고 승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죄를 사하여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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