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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사도행전 19:1-19:21, 요절 19:21)
비전의 사람, 사도 바울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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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꿈과 비전이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20대 학생시절에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들면서 자신이 가졌던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며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다 보면 ‘나도 한 때 꿈이 있었지’ 하며 추억 속에 잠깁니다. 그리고 꿈과 비전이 있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울은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비전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를 초월하여 청년다운 기상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꿈이 있으면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과 역경이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비전이 충만한 visionary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비전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여 사도 바울이 가졌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바울의 에베소 개척 역사(19:1-20) 1절을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다가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요, 아시아 지방의 관문이었습니다. 이곳은 항구도시로 우상과 음란의 도시였습니다(행19:24). 이곳은 일찍이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시에 개척을 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그토록 개척하고자 했던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을 만나보았습니다(2).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심각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질문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성령을 받기는 고사하고 성령이 있음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했습니다(3).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성경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찬송도 잘 불렀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중생하지 않은 신자, 미완성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of Christ,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상과 삶이 아니라 about Christ,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교훈적이고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철학을 가르치고 윤리를 가르치고 도덕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윤리선생이나 도덕 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지금 천국이 왔다,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중생을 하기 위해서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율법으로 가능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죄로 깨닫도록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율법을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2000년 전 죽으신 예수님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많은 성경 공부를 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은혜의 복음인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했습니다. 그랬더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영접하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가 사하여집니다. 객관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이 주관적인 신앙, 체험적 신앙으로 바뀌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심각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자아상이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변화됩니다. 연약하던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불순종하고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하고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이 감사와 찬미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던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삶의 가치관과 역사관, 그리고 소망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합니다. 뜨겁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여기에서 강론이란 ‘spoke boldly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공개 강의를 하였음을 말합니다. ‘권면하다’는 말은 ‘arguing persuasively’로 설득시키려 다투며 증거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의 해박한 성경지식을 동원하여 열강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역사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리석과 같이 딱딱하여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도를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들과 싸우지 않고 회당중심의 역사에서 두란노 서원의 대 전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9b,10a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여기에서 ‘떠나’ ‘따로 세우다’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전하면 항상 두 종류의 무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고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말씀을 듣고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중심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순종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을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몸과 마음이 지치기만 했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소원 있는 제자 몇 사람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중심한 역사에서 말씀을 사랑하는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한 제자양성의 대전환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말씀을 등한시하고 반발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마치 젖은 장작을 부시 돌로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시 돌로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이 가능합니까? 불을 대기만 하면 꺼지기 때문에 손가락이 아프고 잘못하면 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힘을 소모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불이 붙은 장작 즉 현재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합니다.
두란노 서원은 본래 헬라 철학자들이 모여서 수사학과 철학 등을 가르친 곳입니다. 바울은 이 서원을 다른 사람들이 낮잠 자는 시에스터(11시-4시)시간에 세를 내어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제자들과 함께 이 년 동안 날마다 강론했습니다. 여기서 강론이란 영어로 discussion입니다. 이는 묻고 답하는 식의 공부로 우리의 일대일 성경공부와 group bible study와 같습니다. 바울은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국경일이든 명절이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말씀을 가지고 소원 있는 형제자매님들과 일대일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매일 온힘을 다하여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삼 년 동안 눈물과 겸손과 인내로 각 사람을 가르치고 훈계했습니다(행20:31). 그는 지식전달이 아닌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교육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한 제자 양성 역사는 눈에 띄게 어떤 변화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3년 동안 제자양성의 역사를 계속했습니다. 이 역사는 작은 것 같았지만 이것이 불씨가 되어 에베소가 개척되었고, 이곳을 통해서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등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개척 되었습니다(계1:11).
바울이 제자들을 따로 세워 집중적으로 제자양성을 한 역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택과 집중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란 연구소에서 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를 먼저 선택하여 그 선택된 프로젝트에 모든 예산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농경 시대와 달리 문어발 경영은 경쟁력이 없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경영을 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제자양성에 활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택과 집중의 원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만백성들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여 25년간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12명을 사도로 택하여 3년 반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세계 복음화의 주역들로 세우셨습니다.
루마니아의 선교역사를 보면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제자 양성의 역사입니다. 김다윗 선교사는 루마니아의 단(Dan) 목자를 중심하여 8명의 목자들과 함께 매일 새벽 6시에 모여 기도하고 기도 후에는 함께 영어 성경 공부를 하고 모닝커피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기를 5년간 했습니다. 이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매일 했습니다. 이들의 내면이 뜨거워지자 이를 견딜 수 없어 친구들과 후배들을 초청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김다윗 선교사가 처음부터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배당을 짓고 몇 백 명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뭣이 되는 듯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인해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리들을 중심한 역사에서 단(Dan) 목자를 중심한 선택과 집중의 제자양성의 원리를 도입하여 역사를 섬겨 작년에 CMI 유럽 수양회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택과 집중의 제자양성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불씨가 타오르는 분들에게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복음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고 그런 제자들로 자라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가정과 직장, 그리고 캠퍼스,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복음으로 불태우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두란노 제자양성 역사로 인하여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10b절을 보십시오.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희한한 능력을 행하셔서 바울의 앞치마나 손수건을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나가고 악귀도 물러갔습니다. 이를 본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이 이를 행하다가 마귀에게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 예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마술책을 가지고 와서 모두 불태웠습니다. 불태운 책의 값을 계산하니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 15억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저자는 이 역사에 다음과 같이 주를 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
에베소 지방은 지금까지 마술과 마귀가 지배했습니다. 마술이 사람들의 영혼과 사상과 생각을 지배했습니다. 마술은 하나의 그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파되었을 때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여 이를 모두 파했습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어떤 세력도 파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빌2:16).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롬1:16). 따라서 말씀은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능력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추상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선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말씀이 내 심령에 부딪치게 되면 거듭나게 됩니다.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힘이 아닌 것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power game이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누가 power game에서 졌대, power game에서 이겼대!” 힘이 없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역학의 원리, 힘의 원리입니다. 힘의 원리에서는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하면 힘 있는 자는 살고 힘 있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 앞에 마귀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의 힘 앞에 사단 권세가 존재할 수 없어요. 우리는 때로 성난 노도같이 밀려오는 대적들 앞에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말씀이 내 안에 뜨겁고 강렬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하십시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대적들이 거꾸러집니다. 마귀가 물러가고 병마가 물러갑니다.
오늘날에는 물질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쾌락주의가 거대한 문화를 형성하여 믿는 자들을 유혹합니다. 쾌락이 가정을 파괴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말씀은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서 이런 사상과 세력을 파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힘이 있어서 자의식으로 병들었던 형제를 변화시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힘이 있어서 반항적인 형제를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치료하는 광선이 되어서 병들고 어그러지고 패이고 굽어지고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하여주십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어 운명주의와 증오심으로 병들었던 사람을 변화시켜 위대한 선교사가 되게 하십니다. 말씀은 힘이 있어서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다 같이 예수님 권세, 내 권세 찬송하겠습니다. 말씀은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말씀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웁니다. ♫예수님 권세 내 권세♫
둘째, 바울의 환상(21). 21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개척한 곳들을 심방하고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는 이방인 성도들이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모금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여기서 바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바울의 비전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소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는 동안 수 없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금 5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두란노 서원 제자양성의 원리와 실제”등을 집필하며 개척은 디모데 같은 젊은 제자를 파송하고 조용히 여생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으로 불탔습니다. 바울은 본래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태양보다 더 강렬한 광채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행9:3,4) 그리고 그에게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3:37) 당시의 땅 끝은 로마였습니다. 그는 죄인의 괴수를 부르셔서 비전과 미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이 넘쳤습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과 미션이 항상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백성이었던 바울이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던 것은 그가 에베소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면 비전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환상에 불타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3: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을 보면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특징은 꿈과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과 비전이 없어 삶의 의욕이 없고 이기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꿈도 비전도 없이 살 우리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값진 삶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미국은 오늘날 로마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소련이 붕괴된 이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세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오늘날 만국 공통어입니다. 미국은 세계최고의 학문과 수많은 대학과 엘리트를 갖고 있습니다. 캠퍼스가 민족의 심장부라면 미국의 캠퍼스는 세계의 심장부입니다. 미국은 세계 200개국 인종이 모여 있는 인종전시장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와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본래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온 청교도들의 신앙에 기초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사상에 근거해 언덕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배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을 복음화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없습니다.
과거 한국백성들이 술과 도박으로 병들고 곳곳에 이와 벼룩이 돌아다닐 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미국 선교사들이 1885년에 인천에 상륙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한국백성들이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미국에 진 사랑의 빚, 복음의 빚, 은혜의 빚을 갚을 때입니다. 빚은 갚아야 합니다. 이게 노블리즈 오블리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가장 못쓸 사람은 은혜를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어머니를 청부살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육신을 따라 삽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당을 짓습니다. 이제 사랑의 빚, 은혜의 빚을 갚는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되기들 기도합니다. 빚진 마음으로 미국을 위해 기도합시다. 120년 전, 미국이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미국의 성도들이 기도하고 헌금을 하였겠습니까? 사랑의 빚, 복음의 빚, 은혜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우리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영적으로 잠든 미국 지성계를 깨워 새로운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잠든 영혼을 깨우기 위해 미국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둘째로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요 자비량 선교사에 불과합니다. 이런 그가 감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에베소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로마에서도 역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뜨거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비전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비전의 사람, 사도 바울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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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꿈과 비전이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20대 학생시절에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들면서 자신이 가졌던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며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다 보면 ‘나도 한 때 꿈이 있었지’ 하며 추억 속에 잠깁니다. 그리고 꿈과 비전이 있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울은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비전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를 초월하여 청년다운 기상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꿈이 있으면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과 역경이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비전이 충만한 visionary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비전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여 사도 바울이 가졌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바울의 에베소 개척 역사(19:1-20) 1절을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다가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요, 아시아 지방의 관문이었습니다. 이곳은 항구도시로 우상과 음란의 도시였습니다(행19:24). 이곳은 일찍이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시에 개척을 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그토록 개척하고자 했던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을 만나보았습니다(2).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심각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질문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성령을 받기는 고사하고 성령이 있음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했습니다(3).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성경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찬송도 잘 불렀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중생하지 않은 신자, 미완성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of Christ,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상과 삶이 아니라 about Christ,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교훈적이고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철학을 가르치고 윤리를 가르치고 도덕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윤리선생이나 도덕 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지금 천국이 왔다,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중생을 하기 위해서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율법으로 가능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죄로 깨닫도록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율법을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2000년 전 죽으신 예수님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많은 성경 공부를 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은혜의 복음인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했습니다. 그랬더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영접하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가 사하여집니다. 객관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이 주관적인 신앙, 체험적 신앙으로 바뀌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심각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자아상이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변화됩니다. 연약하던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불순종하고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하고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이 감사와 찬미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던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삶의 가치관과 역사관, 그리고 소망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합니다. 뜨겁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여기에서 강론이란 ‘spoke boldly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공개 강의를 하였음을 말합니다. ‘권면하다’는 말은 ‘arguing persuasively’로 설득시키려 다투며 증거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의 해박한 성경지식을 동원하여 열강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역사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리석과 같이 딱딱하여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도를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들과 싸우지 않고 회당중심의 역사에서 두란노 서원의 대 전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9b,10a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여기에서 ‘떠나’ ‘따로 세우다’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전하면 항상 두 종류의 무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고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말씀을 듣고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중심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순종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을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몸과 마음이 지치기만 했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소원 있는 제자 몇 사람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중심한 역사에서 말씀을 사랑하는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한 제자양성의 대전환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말씀을 등한시하고 반발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마치 젖은 장작을 부시 돌로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시 돌로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이 가능합니까? 불을 대기만 하면 꺼지기 때문에 손가락이 아프고 잘못하면 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힘을 소모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불이 붙은 장작 즉 현재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합니다.
두란노 서원은 본래 헬라 철학자들이 모여서 수사학과 철학 등을 가르친 곳입니다. 바울은 이 서원을 다른 사람들이 낮잠 자는 시에스터(11시-4시)시간에 세를 내어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제자들과 함께 이 년 동안 날마다 강론했습니다. 여기서 강론이란 영어로 discussion입니다. 이는 묻고 답하는 식의 공부로 우리의 일대일 성경공부와 group bible study와 같습니다. 바울은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국경일이든 명절이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말씀을 가지고 소원 있는 형제자매님들과 일대일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매일 온힘을 다하여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삼 년 동안 눈물과 겸손과 인내로 각 사람을 가르치고 훈계했습니다(행20:31). 그는 지식전달이 아닌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교육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한 제자 양성 역사는 눈에 띄게 어떤 변화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3년 동안 제자양성의 역사를 계속했습니다. 이 역사는 작은 것 같았지만 이것이 불씨가 되어 에베소가 개척되었고, 이곳을 통해서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등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개척 되었습니다(계1:11).
바울이 제자들을 따로 세워 집중적으로 제자양성을 한 역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택과 집중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란 연구소에서 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를 먼저 선택하여 그 선택된 프로젝트에 모든 예산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농경 시대와 달리 문어발 경영은 경쟁력이 없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경영을 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제자양성에 활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택과 집중의 원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만백성들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여 25년간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12명을 사도로 택하여 3년 반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세계 복음화의 주역들로 세우셨습니다.
루마니아의 선교역사를 보면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제자 양성의 역사입니다. 김다윗 선교사는 루마니아의 단(Dan) 목자를 중심하여 8명의 목자들과 함께 매일 새벽 6시에 모여 기도하고 기도 후에는 함께 영어 성경 공부를 하고 모닝커피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기를 5년간 했습니다. 이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매일 했습니다. 이들의 내면이 뜨거워지자 이를 견딜 수 없어 친구들과 후배들을 초청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김다윗 선교사가 처음부터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배당을 짓고 몇 백 명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뭣이 되는 듯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인해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리들을 중심한 역사에서 단(Dan) 목자를 중심한 선택과 집중의 제자양성의 원리를 도입하여 역사를 섬겨 작년에 CMI 유럽 수양회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택과 집중의 제자양성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불씨가 타오르는 분들에게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복음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고 그런 제자들로 자라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가정과 직장, 그리고 캠퍼스,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복음으로 불태우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두란노 제자양성 역사로 인하여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10b절을 보십시오.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희한한 능력을 행하셔서 바울의 앞치마나 손수건을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나가고 악귀도 물러갔습니다. 이를 본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이 이를 행하다가 마귀에게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 예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마술책을 가지고 와서 모두 불태웠습니다. 불태운 책의 값을 계산하니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 15억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저자는 이 역사에 다음과 같이 주를 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
에베소 지방은 지금까지 마술과 마귀가 지배했습니다. 마술이 사람들의 영혼과 사상과 생각을 지배했습니다. 마술은 하나의 그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파되었을 때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여 이를 모두 파했습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어떤 세력도 파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빌2:16).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롬1:16). 따라서 말씀은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능력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추상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선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말씀이 내 심령에 부딪치게 되면 거듭나게 됩니다.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힘이 아닌 것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power game이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누가 power game에서 졌대, power game에서 이겼대!” 힘이 없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역학의 원리, 힘의 원리입니다. 힘의 원리에서는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하면 힘 있는 자는 살고 힘 있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 앞에 마귀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의 힘 앞에 사단 권세가 존재할 수 없어요. 우리는 때로 성난 노도같이 밀려오는 대적들 앞에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말씀이 내 안에 뜨겁고 강렬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하십시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대적들이 거꾸러집니다. 마귀가 물러가고 병마가 물러갑니다.
오늘날에는 물질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쾌락주의가 거대한 문화를 형성하여 믿는 자들을 유혹합니다. 쾌락이 가정을 파괴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말씀은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서 이런 사상과 세력을 파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힘이 있어서 자의식으로 병들었던 형제를 변화시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힘이 있어서 반항적인 형제를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치료하는 광선이 되어서 병들고 어그러지고 패이고 굽어지고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하여주십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어 운명주의와 증오심으로 병들었던 사람을 변화시켜 위대한 선교사가 되게 하십니다. 말씀은 힘이 있어서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다 같이 예수님 권세, 내 권세 찬송하겠습니다. 말씀은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말씀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웁니다. ♫예수님 권세 내 권세♫
둘째, 바울의 환상(21). 21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개척한 곳들을 심방하고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는 이방인 성도들이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모금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여기서 바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바울의 비전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소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는 동안 수 없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금 5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두란노 서원 제자양성의 원리와 실제”등을 집필하며 개척은 디모데 같은 젊은 제자를 파송하고 조용히 여생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으로 불탔습니다. 바울은 본래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태양보다 더 강렬한 광채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행9:3,4) 그리고 그에게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3:37) 당시의 땅 끝은 로마였습니다. 그는 죄인의 괴수를 부르셔서 비전과 미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이 넘쳤습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과 미션이 항상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백성이었던 바울이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던 것은 그가 에베소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면 비전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환상에 불타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3: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을 보면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특징은 꿈과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과 비전이 없어 삶의 의욕이 없고 이기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꿈도 비전도 없이 살 우리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값진 삶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미국은 오늘날 로마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소련이 붕괴된 이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세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오늘날 만국 공통어입니다. 미국은 세계최고의 학문과 수많은 대학과 엘리트를 갖고 있습니다. 캠퍼스가 민족의 심장부라면 미국의 캠퍼스는 세계의 심장부입니다. 미국은 세계 200개국 인종이 모여 있는 인종전시장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와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본래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온 청교도들의 신앙에 기초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사상에 근거해 언덕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배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을 복음화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없습니다.
과거 한국백성들이 술과 도박으로 병들고 곳곳에 이와 벼룩이 돌아다닐 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미국 선교사들이 1885년에 인천에 상륙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한국백성들이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미국에 진 사랑의 빚, 복음의 빚, 은혜의 빚을 갚을 때입니다. 빚은 갚아야 합니다. 이게 노블리즈 오블리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가장 못쓸 사람은 은혜를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어머니를 청부살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육신을 따라 삽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당을 짓습니다. 이제 사랑의 빚, 은혜의 빚을 갚는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되기들 기도합니다. 빚진 마음으로 미국을 위해 기도합시다. 120년 전, 미국이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미국의 성도들이 기도하고 헌금을 하였겠습니까? 사랑의 빚, 복음의 빚, 은혜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우리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영적으로 잠든 미국 지성계를 깨워 새로운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잠든 영혼을 깨우기 위해 미국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둘째로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요 자비량 선교사에 불과합니다. 이런 그가 감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에베소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로마에서도 역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뜨거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비전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