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최대 관심이 무엇일까요?

조회 수 2794 추천 수 0 2012.07.11 02:22:18
2006년 봄 학기 메시지(누가복음 19:1-10, 요절 19:10)

예수님의 최대 관심이 무엇일까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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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헬라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최대 관심은 지혜이었습니다. 로마의 시저의 관심은 권력이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의 관심은 장수였습니다. 미국의 록펠러의 최대 관심은 부였습니다. 빌 게이츠의 관심은 비즈니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최대 관심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5:4절을 보면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이 나옵니다. ‘찾는다’는 단어가 중복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최대 관심, 예수님의 집념은 그 잃은 것을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바로 잃은 양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아침에도 찾았습니다. 점심에도 찾았습니다. 저녁에도 찾았습니다. 밤에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서 찾고, 우리 밖에서도 찾았습니다. 골목에서도 찾았고, 거리에서도 찾았고, 들에서도 찾았습니다. 동네에서도 찾았고 시장에서도 찾았습니다. 직장에서도 찾았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찾았고, 내일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로 찾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잃은 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정관사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찾으셨습니다. 이를 요한복음 10:3절을 보면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현대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인간 상실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숫자로 대하고 숫자로 처리합니다. 주민등록 번호로 모든 것을 처리합니다. 인간이 계량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러분을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삭개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세리쟁이, 이리, 난쟁이, 거머리 같은 자식!’ 등이라고 불렀지, 자기 이름인 삭개오라고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려두시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십니다. 아무 양이나 찾아 잃어버린 양을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고 찾으십니다.

사람들은 귀중한 것을 잃어 버렸을 때 찾고 찾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를 잃었을 때에 찾고 또 찾습니다. 경찰에도 신고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너무나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을 잃었을 때에는 별로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려진 영혼을 찾고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삭개오를 찾고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사람들을 찾으시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보좌와 특권을 버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요 은혜입니까?

사도 바울은 잃어버린 자에게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는 잃은 자를 찾고자 타문화권인 로마와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디엘 무디 목사는 잃어버린 한 사람에게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난 후에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어느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루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 때 그는 ‘내가 오늘 복음을 전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미루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있어야 합니까? 많이 알아야 합니까?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만 안다면, 예수님의 소원을 알면 됩니다. 이럴 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된 상태를 말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소유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해 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보다 더 추하여 짐승에게도 없는 호모 섹스를 자행자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랑보다는 원색적인 사랑을 갈구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지음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20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자로 지음 받았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신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손을 들고 항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항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런 삶의 결과는 행복이 없습니다. 환난과 곤고만 있을 뿐입니다.

셋째는 사명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사는 일차원적인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공부하고, 먹고살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그런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1:28절을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말씀은 결혼하고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축복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많이 양육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적 자녀를 많이 낳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요15:8,11).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총칼로 남의 땅을 침략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개간하고 개척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학문과 예술, 문학, 사회 전반에 걸쳐 문화명령을 잘 수행하여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키고 건전한 문화와 문명의 꽃을 피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여 사명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결혼하고 아기 낳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아름답고 고귀하고 거룩한 문화보다 저속한 문화를 양성해내고 있습니다. 문학이나 영화를 보면 동성애와 불륜을 미화합니다. 이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서 이 역사를 이루시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바로 잃은 영혼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삭개오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에 도착하셨습니다. 이곳은 종려나무와 장미로 뒤덮여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삭개오를 만나셨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 삭개오란 뜻은 순결하고 정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와 정반대로 악명 높은 세리長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1급지 세관인 여리고 세관의 長이 되었습니다. 세리는 죄인과 창기와 더불어 3대 죄인 중의 하나로 취급 받았습니다. 이는 세금을 악착같이 긁어모아 일부는 나라에 바치고, 일부는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매국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에 대해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산에는 이리가 있고, 마을에는 세리가 있다.’ 보통 세리도 이러한 데, 세리장인 삭개오는 어떠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존경 받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왜 지탄의 대상인 세리가 되었을까요? 왜 그는 자기 이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그가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부자요, 키가 작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에게는 가난에 대한 운명주의와 키 작은 열등감이 있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는 가난하여 제 때에 등록금을 내지 못해, 중 고교 시절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교무실로 끌려가 책망을 수 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융자 추천서를 받는 일을 밥 먹듯 해야 했습니다. 이런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쓰자’란 슬로건을 가지고 개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 직업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키가 작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시를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시험을 잘 보아도 면접을 보면 키가 작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떨어져야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가난과 키가 작은 것에 대해 한이 맺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이 있게 마련입니다. 삭개오에게는 가난과 키 작은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각기 열등감이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 꼽쓸머리인 사람은 꼽쓸 머리에 대한 열등감, 직모인 경유에는 직모에 대한 열등감, 킨 큰 사람인 경우에는 키 큰 열등감, 키 작은 사람은 키 작은 열등감이 있습니다. 대학에 대한 열등감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세리가 되려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대학 시절에 세리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세관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리가 된 후에도 다른 사람보다 악착같이 세금을 징수하여 세수 실적 우수 공무원으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세리들 보다 승진을 거듭해 세리의 정상인 여리고의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독한 세리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볼 때 삭개오는 어떤 점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요, 무엇을 한다고 하면하고야 마는 의지의 유대인, 삭개오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그가 원하던 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숲이 우거진 저택에서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과 함께 최신형 아우디를 굴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3a절를 보겠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보고자 하되’ 란 헬라어로 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자요, 정상에 오른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당시 전도자에 불과한 예수님을 알고자 했을까요? 우리는 그의 외적인 인간 조건만을 본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 조건에 비해 그의 내면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행복의 여신이 그를 맞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세가 그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돈과 권세를 얻었지만 사람들로부터 돈 밖에 모르는 세리,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지탄을 받아야 했습니다. 누구도 자기를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열고 대화할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그는 고독했습니다. 그는 허무했습니다.

이 때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세리 출신인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영접해 주시고, 어떤 몹쓸 죄인도 사랑으로 품고 섬겨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삭개오는 인자하신 예수님의 눈빛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만사 제쳐 놓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거리로 달려 나갔습니다. 3b절을 보겠습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는 사람이 많고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발꿈치를 들어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쭉 빼고 쳐다보았지만 장신의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 때 뽕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는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만큼 영적으로 갈급했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멀리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그 인자하신 모습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냥 지나치실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매달려 있는 뽕나무 아래 오시자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삭개오를 올려다보셨습니다. 순간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눈과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동시에 무리들의 시선도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졸지에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무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멸시와 정죄의 눈으로 그를 쏘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은혜와 긍휼의 눈으로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습니다. 삭개오의 고독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내면을 아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더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와 함께 유하시며 먹고 마시기 위하여 집에 유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삭개오는 비천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에게 찾아오시고, 그의 집에 유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친구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와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청에 감동되어 급히 내려오다가 바지가 찢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6). 그는 아무도 와 주지 않는 자기 집에 기꺼이 머물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때 그 마음에 모든 상처와 고통은 사라지고 잔잔한 평화와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도 이해할 수 없고 예수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변화된 삭개오를 보고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편견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8절을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그는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그가 자기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반을 주고, 토색한 사람들에게 사 배나 갚고 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은 그에게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돈이 그의 인생의 전부요,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위해 자기 양심을 버리고, 동족을 버리고, 친구도 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난 그에게 돈은 더 이상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이 전부요,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회개를 기뻐 받으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오늘’이란 구원의 현재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죄의식과 두려움과 고통이 사라지고 죄 사함의 은혜와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삶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삭개오 한 사람이 변화되자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된 삭개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잃은 자’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한 자를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집이요, 어머니의 품입니다. 그 품을 떠날 때에 잃은 자가 됩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자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서 무한한 행복과 자유를 맛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순종과 교만과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고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deformed 된 인간이 reformed 되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자가 희생적인 자로, 거짓된 자가 진실된 자로, 추한 자가 거룩한 자로, 육신적인 자가 거룩한 자로, 땅에 붙은 육신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가진 자로 변화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잃었던 실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 잃었던 사명을 회복했습니다. 만남! 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스승과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좋은 선배를 만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구주이신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만남이 있을 때에 잃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과 사명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내가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십니다. 이번 봄 수양회에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형상과 사명을 회복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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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