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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절(말씀, 2:1-13, 요절 : 2:4)
오순절의 의미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
다음 주는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성령 강림절(The Whitsunday)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이 신약 교회 위에 처음이자 영원히 임재 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행1:4,5, 2:1-4). 이 날을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구약의 七七節 절기였던 이날에 성령이 강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이는 초실절 다음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며, 7주간의 곡물 추수 기간이 끝난 다음날인 구약의 칠칠절 또는 맥추절에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레23:15-17).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약의 곡식 추수가 상징했던 회개한 영혼의 추수 곧 회개한 성도의 천국 구원과 구원받은 영혼의 풍요한 생활 및 영혼의 평안을 실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날을 Whitsunday라고 하는데, 이는 화이White sunday, 즉 하얀 일요일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성령 강림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순결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는 데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어느 공장에 가더라도 공장 안에는 여러 기계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그런 기계들도 동력이 없으면 아무리 첨단을 걷는 기계라 할지라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우리 교회의 앰프, 스피커, 마이크나 키보드도 또한 전원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 교회도 각기 마을이 있고 각 부서가 있습니다. 각 마을과 각 부서가 잘 조직되고 잘 정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교회에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오순절을 앞두고 성령 강림이 어떻게 임하였는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인과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6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6:7에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부활하시고 40일 동안에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과 동시에 약속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약속과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14을 보면 그들은 한 장소에 모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한 목표를 가지고 같은 꿈을 꾸며, 공통의 비전을 갖고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2:47). 그들은 사명을 버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일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을 통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찬양하며 회개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통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그리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행2:1). 이와 같이 준비가 있은 후에 성령께서 약속하신 대로 임했습니다. 이는 언제나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지금도 참된 믿음이 있고 순복하는 믿음이 있고 통회하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과 교회에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급한 바람 소리가 들렸고, 또 하나는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 시대에 한번 밖에 없었습니다.
첫째,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누가 저자는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3에서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 첫째로 성령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바람은 히브리말로 “루아크”, 그리고 헬라어로는 푸뉴마(πνευμα)입니다. 이는 영이란 뜻과 동일하며 생명과 동일합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그의 이상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어떤 골짜기에 가니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 마른 뼈를 향하여 이렇게 예언하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하라.” 여기에서 생기라는 말씀이 숨결, 혹은 바람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이와 같이 예언할 때에 사방에서 생기가 그 마른 뼈 속에 불어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부활하여 일어서게 되었는데 그들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은 생명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중생이 있고 성령이 임한 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람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바람의 종류는 회리바람과 산들바람이 있습니다. 유혹의 바람도 있고, 신바람과 치맛바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열풍, 이 또한 바람의 일종입니다. 바람은 그 누구도, 어떤 첨단 과학도 바람의 방향과 진로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람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람은 강한 힘이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곳에는 흔적이 있습니다. 나무 잎이 흔들리고 바다 물결아 요동칩니다. 사막에서의 바람은 금새 산을 만들기도 하고 금새 허물어버리기도 합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의 내륙을 강타하는 토네이도(tornado)는 100년이 넘은 나무들과 집들을 쓸어버립니다. 이처럼 바람은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 또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바람은 보통의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바람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이 바람은 급한 바람이었습니다. 이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불더니 집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보통의 바람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바람은 급하고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움직이지 않고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각각 개인에게 인격적으로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임하자 이기적이었던 제자들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심각하고 어둡고 부정적이었던 제자들이 환하고 긍정적이고 힘찬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연약하던 제자들이 강한 사람으로, 불순종하고 교만하던 제자들이 겸손하고 순종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제자들이 감사와 찬미와 기쁨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무기력한 제자들이 하늘을 오르는 독수리처럼 힘찬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삶의 가치관과 역사관, 그리고 소망이 달라졌고 삶의 스케일이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둘째, 성령은 불과 같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도 아니고 혀도 아니고 불의 혀 같은 것이 나타나 각 사람의 머리에 머물렀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임하였습니다. 불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불은 태우며 정결케 합니다. 성령은 뜨거운 열을 의미합니다. 불은 열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예레미야 20:9을 보면 “중심이 불붙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적인 수치와 조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전파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상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불이 타올라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뜨거운 마음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뜨거운 마음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b)”고 했습니다. 시편 저자는 시편 39:3,4에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져서 묵상할 때 화가 발하여(fire burned)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뜨거운 마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입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입으로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유혹하고, 사람을 비방하고, 사람을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아첨하고, 불신을 심고, 세상과 사람들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입으로 부정적인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입으로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사야가 자신의 이런 죄를 회개했을 때에 스랍 하나가 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지고 와서 입에 대며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악과 죄를 태우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모세가 시내산가 가시덤불 불 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한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길과 방향을 제시하여 줍니다. 찬송가 173장을 부르겠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이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 줍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바람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의 불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빛이 임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 성령이 충만하여졌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졌다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하나님이 충만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졌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입니다. 진리로 충만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충만이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릇에 물이 가득하면 그 그릇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빈 그릇이 소리가 많이 납니다. 빈 수레가 소리가 많이 납니다. 제자들도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기 전에는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뒤에는 그런 말들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뒤에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를 시끄럽게 합니다. 의심을 심고 불신을 심고 당을 지어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회는 늘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잡음이 나지 않습니다. 기도와 찬양과 성경 공부를 하는 소리 이외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그릇에 어떤 것이 충만하게 되면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물리학적으로 불가입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동일한 공간에,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두 물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충만하면 세상의 잡념이나 여러 가지 불결한 생각들과 교만한 생각, 허영심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영인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허영심이 들어가고 교만이 들어가고 정욕이 들어가고 각종 불결한 생각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진리의 영이 충만하면 불의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충만하면 미움과 시기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충만하면 절망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비전이 충만하면 낙망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가 충만하게 되면 넘쳐서 흐르게 됩니다. 컵에 물이 충만하면 물이 넘칩니다. 댐에 물이 충만하면 넘칩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흘렀습니다. 이 충만함이 우선 입으로 넘쳐흘렀습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로 흘러넘치니 입으로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이 달라집니다.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니 자연히 사랑의 손이 넘쳐서 지갑을 열어 서로 돕고 돕는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자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자 찬양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휫휠드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나로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요한 웨슬리는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청년들이여 네 영혼이 하나님의 불길로 항상 불타게 하여라.”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캠퍼스를 사랑하여서 이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면, 이 캠퍼스를 구원하지 않으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불길이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 캠퍼스를 위해,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할 때에 지식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캠퍼스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이 그 심령에 타올라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사랑이 나의 마음에 타오를 때 캠퍼스가 변화됩니다. 민족이 변화되고 세계 캠퍼스가 변화됩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은 외국어, 언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기도 방언입니다. 반면에 오순절의 방언은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방언은 각기 자기 나라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방언인 반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서로 대화가 통할 수 있는, 귀가 열릴 수 있는 그런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방언은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 방언은 믿는 사람들게 필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듣는 방언은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필수인 듣는 방언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은사 중의 하나인 기도의 방언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상입니다. 성령님은 지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방언할 수 있는 그런 역사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인류는 바벨탑 사건 이후 서로 각기 언어가 달라져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서로 싸웁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대화가 서로 통하지 않을 때 이혼이라는 비극이 생겨납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통하지 않을 때 전쟁의 비극이 나타나게 됩니다. 동족끼리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동족상쟁의 비극이 발생하게 됩니다. 서로 통하지 않을 때문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메대인, 엘람인,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각 나라 사람들이 모였는데, 전부 자기 말로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로마 말로, 헬라 사람들에게는 헬라말로 언어가 통했습니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사 전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대화가 통하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적대감이 해소되고, 적대감이 해소되면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말하고 듣는 기적, 이것이 대화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요?” 그들은 입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니고, 귀가 방언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령해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서 통역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방언을 하도록 하신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바로 방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고 상대방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이후부터 제자들은 자기 문제를 갖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기심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야심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망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불신과 교만과 편견과 고집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전하기 위하여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내 영혼이 하나님의 불길로 항상 불타게 하여 주서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캠퍼스를 사랑하여서 이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면, 이 캠퍼스를 구원하지 않으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옵소서! 아멘.
오순절의 의미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
다음 주는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성령 강림절(The Whitsunday)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이 신약 교회 위에 처음이자 영원히 임재 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행1:4,5, 2:1-4). 이 날을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구약의 七七節 절기였던 이날에 성령이 강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이는 초실절 다음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며, 7주간의 곡물 추수 기간이 끝난 다음날인 구약의 칠칠절 또는 맥추절에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레23:15-17).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약의 곡식 추수가 상징했던 회개한 영혼의 추수 곧 회개한 성도의 천국 구원과 구원받은 영혼의 풍요한 생활 및 영혼의 평안을 실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날을 Whitsunday라고 하는데, 이는 화이White sunday, 즉 하얀 일요일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성령 강림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순결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는 데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어느 공장에 가더라도 공장 안에는 여러 기계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그런 기계들도 동력이 없으면 아무리 첨단을 걷는 기계라 할지라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우리 교회의 앰프, 스피커, 마이크나 키보드도 또한 전원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 교회도 각기 마을이 있고 각 부서가 있습니다. 각 마을과 각 부서가 잘 조직되고 잘 정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교회에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오순절을 앞두고 성령 강림이 어떻게 임하였는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인과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6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6:7에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부활하시고 40일 동안에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과 동시에 약속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약속과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14을 보면 그들은 한 장소에 모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한 목표를 가지고 같은 꿈을 꾸며, 공통의 비전을 갖고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2:47). 그들은 사명을 버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일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을 통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찬양하며 회개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통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그리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행2:1). 이와 같이 준비가 있은 후에 성령께서 약속하신 대로 임했습니다. 이는 언제나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지금도 참된 믿음이 있고 순복하는 믿음이 있고 통회하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과 교회에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급한 바람 소리가 들렸고, 또 하나는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 시대에 한번 밖에 없었습니다.
첫째,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누가 저자는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3에서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 첫째로 성령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바람은 히브리말로 “루아크”, 그리고 헬라어로는 푸뉴마(πνευμα)입니다. 이는 영이란 뜻과 동일하며 생명과 동일합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그의 이상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어떤 골짜기에 가니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 마른 뼈를 향하여 이렇게 예언하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하라.” 여기에서 생기라는 말씀이 숨결, 혹은 바람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이와 같이 예언할 때에 사방에서 생기가 그 마른 뼈 속에 불어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부활하여 일어서게 되었는데 그들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은 생명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중생이 있고 성령이 임한 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람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바람의 종류는 회리바람과 산들바람이 있습니다. 유혹의 바람도 있고, 신바람과 치맛바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열풍, 이 또한 바람의 일종입니다. 바람은 그 누구도, 어떤 첨단 과학도 바람의 방향과 진로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람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람은 강한 힘이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곳에는 흔적이 있습니다. 나무 잎이 흔들리고 바다 물결아 요동칩니다. 사막에서의 바람은 금새 산을 만들기도 하고 금새 허물어버리기도 합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의 내륙을 강타하는 토네이도(tornado)는 100년이 넘은 나무들과 집들을 쓸어버립니다. 이처럼 바람은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 또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바람은 보통의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바람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이 바람은 급한 바람이었습니다. 이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불더니 집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보통의 바람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바람은 급하고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움직이지 않고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각각 개인에게 인격적으로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임하자 이기적이었던 제자들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심각하고 어둡고 부정적이었던 제자들이 환하고 긍정적이고 힘찬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연약하던 제자들이 강한 사람으로, 불순종하고 교만하던 제자들이 겸손하고 순종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제자들이 감사와 찬미와 기쁨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무기력한 제자들이 하늘을 오르는 독수리처럼 힘찬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삶의 가치관과 역사관, 그리고 소망이 달라졌고 삶의 스케일이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둘째, 성령은 불과 같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도 아니고 혀도 아니고 불의 혀 같은 것이 나타나 각 사람의 머리에 머물렀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임하였습니다. 불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불은 태우며 정결케 합니다. 성령은 뜨거운 열을 의미합니다. 불은 열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예레미야 20:9을 보면 “중심이 불붙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적인 수치와 조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전파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상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불이 타올라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뜨거운 마음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뜨거운 마음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b)”고 했습니다. 시편 저자는 시편 39:3,4에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져서 묵상할 때 화가 발하여(fire burned)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뜨거운 마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입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입으로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유혹하고, 사람을 비방하고, 사람을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아첨하고, 불신을 심고, 세상과 사람들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입으로 부정적인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입으로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사야가 자신의 이런 죄를 회개했을 때에 스랍 하나가 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지고 와서 입에 대며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악과 죄를 태우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모세가 시내산가 가시덤불 불 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한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길과 방향을 제시하여 줍니다. 찬송가 173장을 부르겠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이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 줍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바람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의 불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빛이 임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 성령이 충만하여졌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졌다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하나님이 충만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졌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입니다. 진리로 충만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충만이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릇에 물이 가득하면 그 그릇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빈 그릇이 소리가 많이 납니다. 빈 수레가 소리가 많이 납니다. 제자들도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기 전에는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뒤에는 그런 말들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뒤에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를 시끄럽게 합니다. 의심을 심고 불신을 심고 당을 지어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회는 늘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잡음이 나지 않습니다. 기도와 찬양과 성경 공부를 하는 소리 이외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그릇에 어떤 것이 충만하게 되면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물리학적으로 불가입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동일한 공간에,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두 물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충만하면 세상의 잡념이나 여러 가지 불결한 생각들과 교만한 생각, 허영심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영인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허영심이 들어가고 교만이 들어가고 정욕이 들어가고 각종 불결한 생각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진리의 영이 충만하면 불의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충만하면 미움과 시기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충만하면 절망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비전이 충만하면 낙망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가 충만하게 되면 넘쳐서 흐르게 됩니다. 컵에 물이 충만하면 물이 넘칩니다. 댐에 물이 충만하면 넘칩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흘렀습니다. 이 충만함이 우선 입으로 넘쳐흘렀습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로 흘러넘치니 입으로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이 달라집니다.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니 자연히 사랑의 손이 넘쳐서 지갑을 열어 서로 돕고 돕는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자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자 찬양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휫휠드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나로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요한 웨슬리는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청년들이여 네 영혼이 하나님의 불길로 항상 불타게 하여라.”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캠퍼스를 사랑하여서 이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면, 이 캠퍼스를 구원하지 않으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불길이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 캠퍼스를 위해,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할 때에 지식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캠퍼스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이 그 심령에 타올라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사랑이 나의 마음에 타오를 때 캠퍼스가 변화됩니다. 민족이 변화되고 세계 캠퍼스가 변화됩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은 외국어, 언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기도 방언입니다. 반면에 오순절의 방언은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방언은 각기 자기 나라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방언인 반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서로 대화가 통할 수 있는, 귀가 열릴 수 있는 그런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방언은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 방언은 믿는 사람들게 필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듣는 방언은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필수인 듣는 방언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은사 중의 하나인 기도의 방언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상입니다. 성령님은 지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방언할 수 있는 그런 역사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인류는 바벨탑 사건 이후 서로 각기 언어가 달라져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서로 싸웁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대화가 서로 통하지 않을 때 이혼이라는 비극이 생겨납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통하지 않을 때 전쟁의 비극이 나타나게 됩니다. 동족끼리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동족상쟁의 비극이 발생하게 됩니다. 서로 통하지 않을 때문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메대인, 엘람인,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각 나라 사람들이 모였는데, 전부 자기 말로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로마 말로, 헬라 사람들에게는 헬라말로 언어가 통했습니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사 전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대화가 통하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적대감이 해소되고, 적대감이 해소되면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말하고 듣는 기적, 이것이 대화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요?” 그들은 입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니고, 귀가 방언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령해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서 통역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방언을 하도록 하신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바로 방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고 상대방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이후부터 제자들은 자기 문제를 갖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기심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야심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망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불신과 교만과 편견과 고집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전하기 위하여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내 영혼이 하나님의 불길로 항상 불타게 하여 주서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캠퍼스를 사랑하여서 이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면, 이 캠퍼스를 구원하지 않으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