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조회 수 2675 추천 수 0 2012.07.11 02:23:24
고린도전서 2장 (고전 2:1-5, 요절 2:2)

십자가의 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의 시대는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각기 철학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 패턴이 다르고 윤리의식이 각기 다릅니다. 또한 이 시대는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또한 물질주의와 육신주의가 성행하여 도덕과 윤리의식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지난 주 한 학생이 ‘교수님, 혼전 성행위가 죄가 됩니까?’ 물을 정도입니다. 오늘날 정신적인 힘과 도덕적인 힘을 저울에 달아보아도 무게가 나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쾌락에 몰두하고,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도덕과 영성이 해이해지고, 교회에 세속주의가 들어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세상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천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다 보니 복음을 전할 자신이 없어지게 되고, 복음을 전할 자신이 없어지니 복음을 전하지 않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니 기독교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2005년 통계를 보면 천주교 인구는 10년 전보다 무려 70%가 증가한 570만 명이고, 기독교 신자는 1000만 성도에서 860만 대로 떨어졌습니다. 불교도 증가했는데 유독 기독교 인구만 줄어들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기독교 인구가 줄어드니 이 시대는 점점 세속주의로 오염되어 사회는 점점 그릇된 문화로 사회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화는 200년이 지나야 형성된다고 합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가 120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문화가 막 정착될 단계입니다. 이런 시점에 그릇된 문화가 문화화 되어 문화가 형성된다면 참으로 심각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고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문화와 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십자가가 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거대한 로마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릇된 세속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과 로마 문화 앞에 위축되지 않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를 변증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요 키 워드입니다. 4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복음서의 2/3가 그리스도의 마지막 생애, 곧 십자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곧 복음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십자가는 지혜요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20을 보면 당시 고린도에는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미사여구와 그럴듯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고린도는 헬라의 사교장이라고 할 만큼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야말로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 십자가란 진리는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은 단순한 것을 거들떠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한 곳에는 심오한 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을 보더라도 단순한 어법보다는 같은 말이라도 어렵게 쓰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내가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해서 득도를 해야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시시하기 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는 깊이가 없고 심오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그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밝은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해가 밝지 못하고 어둡다고 하게 되면 누구의 문제입니까? 해가 문제입니까? 어둡다고 느끼는 사람이 문제입니까?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부패한 사람은 십자가의 깊은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심령이 맑고 밝은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도록 합니다. 십자가는 완악한 사람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합니다. 완악한 사람을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큰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어떤 철학이 완악한 사람을 회개시켜 거룩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누가, 어떤 철학이 탕자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는 젊었을 때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탕아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누가 노예 선장인 죤 뉴톤을 변화시켰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더러운 마음을 깨끗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심령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병든 마음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가 죄악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異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메시야가 오면 큰 이적을 베풀어 원수를 몰아내고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신21:23).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저주받은 자로서 거리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상식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반발하고 비웃고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예외는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면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쉽게 십자가를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말씀은 별로 저항 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해도 그런 사랑을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만 행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또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제 10 계명인 탐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킬 수 없음에 절망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탐심하지 말아야지” 하면 이미 탐심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했기 때문에 그의 의지로는 행할 수 없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고 울부짖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떠나서는 절대로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지킬 수 없다면 그런 말씀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를 지킬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하고 어리석고 부담스럽고 거리끼는 것이 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지혜요 능력이 됩니다. 아멘.

둘째, 십자가는 형벌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3:23).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롬5:17).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합니다(고전15:21).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요3:6).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罪性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죄성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입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자기가 만물의 척도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죄성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自己愛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아담의 죄성으로 태어난 인간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습니다(엡2:1,3).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따릅니다(히9:27). 아담의 죄성으로 죽은 사람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되고,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담의 죄성이 이 땅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이생에 내세에 영원히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100년이지만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아담의 죄성으로 태어난 인간은 이글이글 타는 뜨거운 불과 유황으로 못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막9:48).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상으로 인한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 3:21을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진노에서 사랑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자기 기준에서 하나님 기준,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의 전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아무 차별 없이 나타납니다. 의롭다는 동사는 현재 분사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효력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따라서 이제 나의 생명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예수님 생명입니다. 아담의 죄성이 영원한 것처럼 예수 생명 또한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은 하늘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이 생명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습니다. 이 이 생명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 함께 재림합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예수 생명, 새 생명은 우리 몸과 만나게 됩니다. 이 생명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원히 거할 생명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에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사단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20을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멸망이 약속된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가는 정거장일 뿐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이제 우리의 국적과 신분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우주적인 변화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종교가 한번 믿음으로 영원한 형벌에서 단번에 구원하여 그 구원이 영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값없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셋째, 십자가는 우리를 충만케 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여기에도 십자가를 빼놓고는 성령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내 안에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완전한 구원을 받았지만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몸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매일 매일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이 밖에서 오는 것이라면 죄의 세력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있고, 정욕이 있고, 시기, 질투, 미움, 각종 욕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어떤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교만이 있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정욕이 있기 때문에 정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죄의 발원지는 육신입니다. 이 발원지를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 절대로 고치거나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본성대로 살면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죽이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담의 성질, 자기중심입니다. 우리는 거짓 중심에 속아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주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우리에게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베소서 5:18을 보겠습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내가 스스로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누가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체가 됩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지배입니다. 성령께서 지배하기를 원하고 계신데 문제는 내가 지배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비워야 합니다. 지난 주 어떤 그릇에 어떤 것이 충만하게 되면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물리학적으로 불가입성의 원리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공간에,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두 물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세상의 잡념이나 여러 가지 불결한 생각들과 교만한 생각, 허영심들이 채워져 있으면 성령님께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우리 속에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미움과 시기심과 탐욕이 충만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까? 비우기 위해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곧 비우는 삶입니다. 회개할 때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이 영이 충만하여집니다. 충만하여져서 넘쳐서 흘러넘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그 충만함이 입으로 넘쳐흐르게 됩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입으로부터 시와 찬미와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고 주님을 전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눈이 달라집니다. 귀가 달라집니다. 항상 감사하게 되고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보는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안테나를 접고 하나님께로 안테나를 고정합니다. 손이 달라집니다. 발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삶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고 애통할 때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회개는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있을 때 회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라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 충만했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닌 계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날마다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함이 있습니다.

넷째, 십자가는 미련한 사람들을 지혜롭게 합니다.

세상은 똑똑한 인재를 뽑아서 일을 합니다. 또한 세상은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셔서 복음 역사에 귀히 쓰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위대한 사람을 부르셔서 위대한 인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무디, 윌리엄 케리 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무디가 영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크게 감동을 주어 많은 회개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지혜를 미련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6-28)”

십자가의 도만이 한 생명을 살리고, 십자가의 도만이 가정과 사회와 캠퍼스, 그리고 이 시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영접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5 예배자의 영성 관리자 2012-07-11 2728
34 히스기야의 영성 관리자 2012-07-11 2860
33 요시야의 영성 관리자 2012-07-11 3301
32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관리자 2012-07-11 3707
31 넘어질까 조심하라 관리자 2012-07-11 3844
30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 관리자 2012-07-11 3059
» 십자가의 도 관리자 2012-07-11 2675
28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관리자 2012-07-11 3010
27 근신하라 깨어라 관리자 2012-07-11 4548
26 가정의 기본 원칙 관리자 2012-07-11 2478
25 예수님의 최대 관심이 무엇일까요? 관리자 2012-07-11 2794
24 2006년 부활메시지 관리자 2012-07-11 2531
23 가상칠언 관리자 2012-07-11 2767
22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관리자 2012-07-11 3600
21 비전의 사람, 사도 바울 관리자 2012-07-11 2709
20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관리자 2012-07-11 3731
19 사도행전제15강(말씀과 기도에 전무한 사도들) 관리자 2012-07-11 3189
18 사도행전제14강(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관리자 2012-07-11 2904
17 사도행전제13강(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관리자 2012-07-11 3108
16 사도행전제12강(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관리자 2012-07-11 3195

일용할 양식

예배 안내

  • 주일 오전 예배 - 오전 11:00
  • 주일 오후 예배 - 오후 3:30
  • 어린이 예배 - 오전 11:00

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우남식 목사님의 저서


    전도서에서 만난 복음
    (퍼플,2023)

      요한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퍼플,2022)

        요한계시록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1)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 010-8215-7966
                                      안은경
                                    • 우리은행
                                      1006-601-218050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