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전도서 5:1-7
예배자의 영성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라(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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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교회는 예배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예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죽은 예배도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예배란 무엇이며 또 죽은 예배란 무엇인가, 그 차이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항복(surrender)이란 단어는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패배를 원치 않습니다. 요즘 경영철학서를 보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승리하라고 가르칩니다. 승리가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항복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복보다는 승리하고 성공하고 극복하고 정복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란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되 95%가 아니라 100% 드리는 삶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다”고 했습니다. 제사의 본뜻은 드린다, 하나님께 바친다, 예물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영어로 offer, 헌신이요, 히브리어로 계속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리고 또 드리고 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의 제물은 깨끗해야 합니다. 흠이 없고 점이 없어야 합니다. 더럽거나 병들어서도 안 되고 다리가 부러지고 외눈박이면 안 되는 흠이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물은 죽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산 것이어야 합니다. 금방 죽은 것도 안 됩니다. 썩은 것, 부패한 것도 안 됩니다. 반드시 산 것, 생명을 드려야 합니다. 이는 제사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리려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순결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순결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드려야 됩니다. 거기에는 내 뜻과 의지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한번 드리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드렸다가 다시 가져가는 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입니다.
어떤 형제는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하고 헌신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가기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시지 않으신다고 섭섭하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내가 이만큼 주님께 투자를 했는데 투자한 만큼 out put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투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투자나 선물이 아니라 제사, 헌신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몸이란 영어로 bodies, 복수입니다. 몸은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일체의 지체, 눈, 코, 귀 팔다리, 더 나아가 우리의 인격, 지식, 감정, 의지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몸은 구체적인 생활이요, 실제적인 삶의 전부입니다. 욥은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고 했습니다. 내 눈과 언약을 맺었다, 나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바라보지 않겠다, 나는 항상 앞을 곧바로 처다 보겠다, 나는 곁눈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게 바로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본질상 우리 눈은 악한 것을 바라보고자 하고, 그것을 즐깁니다. 본질상 혀는 야비한 것을 말하고, 악한 말을 뿜어냅니다(엡5:4,약3:5). 칭찬과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험담을 합니다. 그래서 황금입이라는 유명한 웅변가인 요한 크리스스톰은 “눈이 악한 것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눈이 한 제사가 될 것이다. 손으로 죄를 행하지 않게 하고 구제를 하는 데 쓰도록 하라. 그러면 손이 한 제사가 될 것이다. 입은 저주보다는 축복하는 데 쓰고,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쓰고, 세상의 말을 듣는 것을 멈추고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러면 그게 제사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됨을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삶의 현장 곳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셋째로 은혜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죄 없는 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의 죄 때문에 희생제물이 되어 죽어 갈 때 조용히 죽어 가겠습니까? 고통스러워 소리를 지르며 죽어갈 것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어가며 고통 하는 짐승을 보면서 나의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추하고,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 대신 죽어 가는 짐승을 보면서 내 죄가 속해졌다, 나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믿게 됩니다.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넷째로 개인의 삶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직업을 소명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교회에 파송된 성직자요, 평신도는 사회에 파송된 성직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사회에 파송된 성직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빛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세상에 부패를 방지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업을 주신 것은 사회 각처에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우월성을 증명해 보여 주기 위한 기회로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얻는 순간 모두 헛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허황된 개꿈을 꾸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꿈이 많고 말이 많으면 헛되니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습니다. 믿음은 말보다 각자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러분은 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십니까? 주일이니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졸더라도 예배당에 와서 조는 것이 그래도 나은 것이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배라는 형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기 위해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배드리기 위해 올 때마다 말씀을 듣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네 발을 삼가라’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말씀에 대한 응답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 이것은 그냥 귀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뜻합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고 순종하면 삶의 변화가 있어납니다. 이 변화는 혁명적인 변화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삼상15:22).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을 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고 줏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앞세워서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좀 멍한 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종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번거로운 종교 행사보다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께 엎디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 자체보다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자 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나름대로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을 구원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순종을 배우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처음도 순종, 과정도 순종, 마지막도 순종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제사 지내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예배만 보면 끝난 줄로 압니다. 그래서 주일날 새벽에 예배를 보고 들로 산으로 놀러 갑니다. 그들은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을 원하십니다. 따라서 의식적인 예배에서 말씀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덤덤하든지, 반발하든지, 아니면 찔림이 있던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옆 사람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아픔을 느낍니까? 덤덤하십니까? 아니면 반발심이 생깁니까? 찔림이 있습니까? 찔림이 있는 사람은 양심이 살아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고 순종한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일생동안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행2:23).”, “너희가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고 선포했을 때에 무리들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가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동안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에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가, 나의 정욕이, 나의 교만이, 나의 거짓과 술수가, 나의 불신과 원망과 불순종, 나의 욕망을 회개했습니다. 그리했을 죄 사함을 받고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이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드려야 합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칼뱅은 20대에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집필했습니다. 방대한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 이것은 칼뱅이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된 삶의 목표요 삶의 표현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비굴한 삶을 삽니다. 사람이나 체면이나 의식 앞에서 예배를 보기 때문에 경외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늦게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중에 하품을 하거나 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체육복 차림으로, 졸린 눈으로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중에 옆 사람과 잡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거짓과 위선과 불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거짓과 위선과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면 예배에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핸드폰을 켜고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나 백악관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하고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앞에서 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예배를 드리는데 함부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참된 찬양과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살아있는 예배가 되고, 심령이 뜨거워지고 새로워지게 됩니다. 예배는 두려운 일이며 엄숙하고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피조물과 하늘에 계신 초월자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릴 때에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십시오.
셋째, 서원을 즉시 갚아야 합니다.
4-6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서원이란 내가 말씀을 듣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삶의 방향을 잡았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예배자의 삶입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하나님께 서원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사람이 절박할 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만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행자지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19, 20절을 보면 한나는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자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확신하고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쉽지 않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은 어떤 아들입니까? 인간적인 많은 수모와 갈등을 겪었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이런 아이를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고 뒤돌아서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갚았을 때 사무엘은 다윗 왕국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았을 때에 마음이 높아지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축복의 때에 축복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2:1-11).
넷째,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계시록 4:9-11을 보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9)” 했습니다. 이 때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합당하오니’가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란 영어로 Worship인데, 이 단어는 Worth - ship을 줄인 것으로 최고의 존엄성과 가치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가치와 그의 훌륭함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게도 예배를 드려서는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예배의 장을 떠나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동참하여 들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 표현은 바로 예배로 나타납니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대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살아있는 예배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예배자의 영성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라(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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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교회는 예배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예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죽은 예배도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예배란 무엇이며 또 죽은 예배란 무엇인가, 그 차이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항복(surrender)이란 단어는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패배를 원치 않습니다. 요즘 경영철학서를 보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승리하라고 가르칩니다. 승리가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항복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복보다는 승리하고 성공하고 극복하고 정복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란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되 95%가 아니라 100% 드리는 삶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다”고 했습니다. 제사의 본뜻은 드린다, 하나님께 바친다, 예물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영어로 offer, 헌신이요, 히브리어로 계속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리고 또 드리고 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의 제물은 깨끗해야 합니다. 흠이 없고 점이 없어야 합니다. 더럽거나 병들어서도 안 되고 다리가 부러지고 외눈박이면 안 되는 흠이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물은 죽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산 것이어야 합니다. 금방 죽은 것도 안 됩니다. 썩은 것, 부패한 것도 안 됩니다. 반드시 산 것, 생명을 드려야 합니다. 이는 제사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리려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순결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순결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드려야 됩니다. 거기에는 내 뜻과 의지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한번 드리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드렸다가 다시 가져가는 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입니다.
어떤 형제는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하고 헌신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가기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시지 않으신다고 섭섭하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내가 이만큼 주님께 투자를 했는데 투자한 만큼 out put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투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투자나 선물이 아니라 제사, 헌신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몸이란 영어로 bodies, 복수입니다. 몸은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일체의 지체, 눈, 코, 귀 팔다리, 더 나아가 우리의 인격, 지식, 감정, 의지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몸은 구체적인 생활이요, 실제적인 삶의 전부입니다. 욥은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고 했습니다. 내 눈과 언약을 맺었다, 나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바라보지 않겠다, 나는 항상 앞을 곧바로 처다 보겠다, 나는 곁눈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게 바로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본질상 우리 눈은 악한 것을 바라보고자 하고, 그것을 즐깁니다. 본질상 혀는 야비한 것을 말하고, 악한 말을 뿜어냅니다(엡5:4,약3:5). 칭찬과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험담을 합니다. 그래서 황금입이라는 유명한 웅변가인 요한 크리스스톰은 “눈이 악한 것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눈이 한 제사가 될 것이다. 손으로 죄를 행하지 않게 하고 구제를 하는 데 쓰도록 하라. 그러면 손이 한 제사가 될 것이다. 입은 저주보다는 축복하는 데 쓰고,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쓰고, 세상의 말을 듣는 것을 멈추고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러면 그게 제사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됨을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삶의 현장 곳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셋째로 은혜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죄 없는 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의 죄 때문에 희생제물이 되어 죽어 갈 때 조용히 죽어 가겠습니까? 고통스러워 소리를 지르며 죽어갈 것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어가며 고통 하는 짐승을 보면서 나의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추하고,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 대신 죽어 가는 짐승을 보면서 내 죄가 속해졌다, 나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믿게 됩니다.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넷째로 개인의 삶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직업을 소명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교회에 파송된 성직자요, 평신도는 사회에 파송된 성직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사회에 파송된 성직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빛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세상에 부패를 방지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업을 주신 것은 사회 각처에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우월성을 증명해 보여 주기 위한 기회로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얻는 순간 모두 헛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허황된 개꿈을 꾸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꿈이 많고 말이 많으면 헛되니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습니다. 믿음은 말보다 각자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러분은 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십니까? 주일이니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졸더라도 예배당에 와서 조는 것이 그래도 나은 것이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배라는 형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기 위해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배드리기 위해 올 때마다 말씀을 듣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네 발을 삼가라’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말씀에 대한 응답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 이것은 그냥 귀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뜻합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고 순종하면 삶의 변화가 있어납니다. 이 변화는 혁명적인 변화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삼상15:22).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을 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고 줏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앞세워서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좀 멍한 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종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번거로운 종교 행사보다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께 엎디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 자체보다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자 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나름대로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을 구원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순종을 배우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처음도 순종, 과정도 순종, 마지막도 순종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제사 지내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예배만 보면 끝난 줄로 압니다. 그래서 주일날 새벽에 예배를 보고 들로 산으로 놀러 갑니다. 그들은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을 원하십니다. 따라서 의식적인 예배에서 말씀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덤덤하든지, 반발하든지, 아니면 찔림이 있던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옆 사람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아픔을 느낍니까? 덤덤하십니까? 아니면 반발심이 생깁니까? 찔림이 있습니까? 찔림이 있는 사람은 양심이 살아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고 순종한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일생동안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행2:23).”, “너희가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고 선포했을 때에 무리들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가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동안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에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가, 나의 정욕이, 나의 교만이, 나의 거짓과 술수가, 나의 불신과 원망과 불순종, 나의 욕망을 회개했습니다. 그리했을 죄 사함을 받고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이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드려야 합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칼뱅은 20대에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집필했습니다. 방대한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 이것은 칼뱅이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된 삶의 목표요 삶의 표현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비굴한 삶을 삽니다. 사람이나 체면이나 의식 앞에서 예배를 보기 때문에 경외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늦게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중에 하품을 하거나 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체육복 차림으로, 졸린 눈으로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중에 옆 사람과 잡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거짓과 위선과 불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거짓과 위선과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면 예배에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핸드폰을 켜고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나 백악관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하고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앞에서 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예배를 드리는데 함부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참된 찬양과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살아있는 예배가 되고, 심령이 뜨거워지고 새로워지게 됩니다. 예배는 두려운 일이며 엄숙하고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피조물과 하늘에 계신 초월자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릴 때에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십시오.
셋째, 서원을 즉시 갚아야 합니다.
4-6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서원이란 내가 말씀을 듣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삶의 방향을 잡았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예배자의 삶입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하나님께 서원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사람이 절박할 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만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행자지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19, 20절을 보면 한나는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자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확신하고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쉽지 않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은 어떤 아들입니까? 인간적인 많은 수모와 갈등을 겪었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이런 아이를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고 뒤돌아서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갚았을 때 사무엘은 다윗 왕국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았을 때에 마음이 높아지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축복의 때에 축복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2:1-11).
넷째,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계시록 4:9-11을 보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9)” 했습니다. 이 때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합당하오니’가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란 영어로 Worship인데, 이 단어는 Worth - ship을 줄인 것으로 최고의 존엄성과 가치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가치와 그의 훌륭함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게도 예배를 드려서는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예배의 장을 떠나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동참하여 들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 표현은 바로 예배로 나타납니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대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살아있는 예배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