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

조회 수 2685 추천 수 0 2012.07.11 02:26:21
요한복음 13:1-38(13:34)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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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능력으로 나타나고, 소망은 기쁨으로 표현되며, 사랑은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믿음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사랑이 없는 소망의 기쁨은 사람들을 허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고전13:13).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 됨이 있고, 하나 됨에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소망이 아무리 있다 할지라도 행복이 없다면 이는 물 없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새 계명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승천 직전에 주신 세상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 주신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두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라고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조금 후면 체포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절박하고도 중대한 사건을 앞에 놓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순간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은 30에 팔아먹는 비극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순간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본문을 통해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서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2)

1절을 보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실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내일이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던 제자들과 헤어져야 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b).

자, 여러분이 조금 후에 죽는다고 가정할 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하겠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극도로 자기중심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죽음은 그만두고 감기에 걸려 열만 나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감기는 그만 두고 배만 조금 고파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이란 12제자들을 말하는데, 그들 중에는 조금 후면 자기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길 배반자 유다도 포함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배반할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배반은 그만두고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비방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반자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당신을 부인할 자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서 변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치 않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당장 보답이 있고, 사랑할 가치가 있고, 유익이 될 때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정승집의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익이 없을지라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진실 된 사랑입니다. 예수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히13:8).

2절을 보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귀는 유다 마음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습니다. 왜 마귀는 유독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을까요? 요한복음 12장을 볼 때 그는 물질적이고 인간적이었습니다. 유다가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은 자유다”라고 하여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 사람이 육적인 생각을 하면 육적인 사람이 되어 사망에 이르고, 영적인 생각을 하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매사 긍정적이고 감사가 넘치는 생각을 하면 감사와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매사 부정적이고 불평을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생각을 하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생각은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행동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생각은 지성의 역할을 합니다. 지성은 자신의 정체성(self identity), 자신의 위치, 자신의 분수를 알도록 합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자기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믿음의 분량을 갖고 있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는가, 내가 지금 서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앉아야 할 자리인가, 일어서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누워야 할 자리인가, 지금 섬기고 동역하여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지도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 위치에 있는가, 개척자의 위치에 있는가”를 분별하고 그 위치에서 자기 분수에 맞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성경에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행동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생각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마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우리는 마음을 지키고 자기의 약점을 알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너희가 행하려 본을 보였노라(3-17)

3절을 읽겠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뜻과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가심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로부터 존경과 찬양과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유의 주가 되심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 앞에 허리를 굽히시고 앉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거룩한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과 발가락 사이사이를 씻어 주셨습니다. 마른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어야 할 주님께서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니! 찬송가 278장 2절을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거룩한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드시 외출을 하면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은 자기 발을 자기가 스스로 씻지 않았습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 주고, 제자는 스승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종이 없으면 서로 서로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발을, 남편은 아내의 발을, 친구는 친구끼리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서로 발을 씻어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서로 높아지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으러 들어가기 전에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했지만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서로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엎드려 발을 씻어 주게 되면 낮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자기 발을 먼저 씻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야고보는 베드로가, 요한은 안드레에게, 안드레는 요한에게 서로 네가 먼저 내 발을 씻어 주면 내가 네 발을 씻어 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것까지 잊어 버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당장 발을 씻어 주라고 책망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그들의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발부터 씻어 주셨을까요? 크리쏘스톰은 유다의 발을 먼저 씻어 주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할 때에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받아 가면서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시작도 못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심으로 사랑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6,8a)” 그가 가만히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 완강히 거절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존재로 대우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8b). ‘상관이 없다’는 말은 분깃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상관없다고 말씀하시자 깜짝 놀라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9).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목욕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롬6:5). ‘발을 씻는다’는 것은 날마다 회개하는 삶, 즉 성화에 이르는 삶을 말합니다. 목욕한 사람도 땅을 밟고 살기 때문에 발에 먼지가 묻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세상의 영향을 받기 쉬운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따라서 매일 나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죄 씻음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더러운 발을 주님께 내어놓고자 할 때 부끄럽습니다. 특히 신앙연륜이 더해감에 따라 체면이 발동하여 예수님께 발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체면과 염치를 접어두고 세상으로부터 먼지 묻은 더러운 발, 정욕과 이기심과 탐욕과 시기심과 미움, 그리고 안일과 의존심, 허무와 절망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면 언제든지 사랑으로 영접하여 주시고 정결케 하여 주십니다(요일1:8,9).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요,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마땅히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여기에서 본이란 예(example)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를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겸손히 섬기시는 예를 남기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는 후에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본을 보이는 삶은 중요합니다. 교육은 천 마디 보다 단 한 번의 본을 보이는 것이 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발을 씻어 주는 실제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약점과 허물을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눈에 드러나게 약점이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천방지축의 사나이요, 나서기를 좋아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야심이 많았습니다. 빌립은 너무 계산적인 사람이요, 안드레는 좀 답답합니다. 도마는 회의적이어서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분위기가 어두웠습니다. 열열당원 시몬은 항상 핏대를 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는 영웅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장점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열정과 요한과 야고보의 진심, 빌립의 합리성과 안드레의 믿음 등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장점입니다. 그런데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장점보다는 약점이 더 잘 드러납니다. 이 때 약점을 끄집어내면 공동체는 금이 가고 깨어지게 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약점을 품어 주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드류 모렌은 “겸손은 은혜가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토양이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관심을 가져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그들은 수직적인 사랑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평적인 사랑, 동역자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제자들의 무관심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무관심은 관계성을 소원케 하고 오해와 불신을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에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17).

셋째, 서로 사랑하라(18-35)

18-33절을 보면 가룟 유다는 끝내 회개치 않고 예수님의 사랑의 빵조각을 받아들고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마음에 넣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귀가 뿌린 씨가 자라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룟 유다 때문에 공동체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습니다. 이제 유다가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계명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에서 3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표준입니다. 옛 계명인 구약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입니다. 구약의 계명의 표준은 내 자신이 됩니다. 이웃은 내 몸은 아닙니다. 내 몸같이 사랑하도록 했습니다. 사랑의 기준이 나입니다. 나란 존재는 상대적입니다. 내 컨디션이 좋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상대적인 사랑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이요, 감정에 기초한 사랑이 아닌 진리에 기초한 사랑이요, 값싼 동정이 아닌 십자가에 모든 죄를 용서하신 구속의 은혜에 기초한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배반자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의로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실패가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사랑의 방법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왜 눈이 옆에 있습니까? 옆을 보라고 옆에 눈이 있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다 보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경쟁의 대상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들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겨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제자들은 이 계명을 깊이 깨닫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4:7).”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b).”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엡3:18,19). 그들은 새 계명에 순종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 사랑이 후에 로마가 정복되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할 마음이 생기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에는 능력이 수반됩니다. 따라서 사랑을 하게 되면 이미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능력 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예수 공동체를 이루어 가정과 사회와 캠퍼스를 새롭게 합시다. 복음성가를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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