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요한계시록(말씀, 2:1-7, 요절, 2:5)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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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심리학에 학습전이(transfer of learning)의 이론이 있는데 그 중에 기억과 망각의 이론이 있습니다. 기억이란 학습 경험의 사실 및 내용을 저장하여 간직하였다가 재생하여 인지해내는 과정을 말하고, 망각이란 일단 기억한 정보가 시간의 경과 또는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약화되고 소멸되어 재생되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순간에 부딪치게 되지만 이런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첫 사랑은 시간이 지나가도 우리 속에 오래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왜냐하면 첫 사랑은 순수하고,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손에는 땀이 나면서 떨리는 등 교감신경의 활성화가 극대화되는 등 아주 강렬하게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대뇌 중에 감정과 관련된 영역이 있는데 이를 변연계라고 합니다. 이중에서 Amygdala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 영역이 강렬하게 활성화될 때에 오래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이란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현상이 부드러집니다. 따라서 늘 기억하고 사용해야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다루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해 신랑이 식어지면 교회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한 가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시고 승천 직전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첫 사랑이 회복되어 주님을 사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주님은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1).
1절을 보면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른 손으로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셨습니다. 여기에서 일곱별은 사역자들을 말하고 일곱 촛대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셨고, 교회를 친히 살피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사람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에베소 교회는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더불어 3대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로 무역, 교통의 요지로서 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렸습니다. 이곳에는 풍요의 여신이라는 아데미(로마어로는 다이아나) 여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길이가 약 132m, 폭이 약 66m, 높이 약 18m인 그리스의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나 되는 거대한 신전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신전은 도피처의 권리를 인정하여 어떤 범죄자라도 성전 300m 이내에 들어오면 살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연히 에베소는 온갖 범죄자의 소굴이요, 죄인들의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가 선교전략상 중요한 곳임을 알고 제3차 전도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을 에베소 개척을 위해 보냈습니다. 그는 처음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두란노 서원에서 12명을 뽑아 집중적으로 제자를 양육하였습니다. 그의 밀레도 고별사를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눈물과 겸손으로 교회를 섬겼다고 회고하였습니다(행20:17-31). 이로 인해 에베소에 놀라운 복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술하는 사람들이 책을 다 가져다가 불살라 없앴는데, 그 액수가 자그마치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행19:19). 바울은 이곳에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로마 선교 비전을 보았습니다(행19:20,21). 이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뛰어난 말씀의 종들을 통해 양육되었습니다. 디모데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아볼로, 두기고 등이 이곳 교회를 섬겼습니다(딤전1:3, 행18:18,19,24, 딤후4:12). 말년에 사도 요한이 이 교회를 섬겼고, 오네시모를 배출한 교회이기도 하였습니다(딤후1:16).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역사와 전통이 빛났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교회의 약점은 복음의 능력보다 역사와 전통을 앞세우기 쉽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몇 십 년 된 교회, 이런 선배들을 배출한 교회, 로마를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한 교회” 또 교회가 역사가 있고 큰 교회일수록 조직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교회가 조직으로 움직이게 되면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유기적인 공동체보다는 조직적인 모임이 되기 쉽습니다. 조직의 생명은 조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데 있습니다.
교회가 조직으로 움직이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이기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중심, 조직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가 주님을 자랑하기보다는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의 업적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주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사용하시고 오른 손으로 보호하시는 주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교회를 순회하시면서 연약한 교회는 힘을 주시고, 잠든 교회는 깨우시고, 사랑이 식은 교회에는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십니다.
둘째, 주님은 그들의 수고를 칭찬하셨습니다(2,3).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행위는 영어로 ‘hard work’,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수고했습니다. 그들은 적당하게 섬긴 것이 아니라 진이 빠지도록 섬겼습니다. 또 주님은 그들의 인내도 잘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인내하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온 마음으로 전도하였고, 부지런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 인근 지방인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교회가 개척되었고 또 로마를 개척하는데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어려운 일과 난관에 부딪쳐도 그 역경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졌습니다. 사회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성도들끼리 적당히 사랑하지 않고, 성도들의 마음에 사랑이 각인되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신중하게 생각하며 인내하여 거짓사도들을 분별했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라며 눌러 앉아 대접받으며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신분을 알 수 있지만 전에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를 의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인내로 거짓 사도들과 거짓된 교훈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단을 미워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은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가 없으며 또 회개하면 용납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짓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에베소 성도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요즘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고, 교회를 여가선용이나 부담 없는 교제의 장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니골라당입니다. 믿는 자는 믿는 자로서의 삶이 있고,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음란한 삶을 산 사람들은 음란을 청산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을 회개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은 그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은 성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부담 없이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나의 생각과 생활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아멘.
셋째, 주님은 첫 사랑을 잊어버린 것을 책망하셨습니다(4).
이처럼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책망 받을 문제가 있었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 보면 책망 받을 것이 전혀 없는 모범적인 교회요 신실한 성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예수님의 첫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은 은혜, 그 눈물, 그 어디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며 소감을 발표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내가 어떻게 되던, 무엇이 되던 상관하지 않으며,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이 부유했고, 한없이 행복했던 과거가 있습니다.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첫째요 전체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양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먹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를 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내 인생을 기꺼이 드리고자 결단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처음 사랑을 잊지 않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처음 사랑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순수한 헌신과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아름다운 처음 사랑의 고백을 잊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서 2:16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다림과 설레임, 울렁거림, 존경과 사랑을 생각하면 부부의 사랑이 다시 새로워지고 깊어집니다. 반면에 첫 사랑이 식으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냉랭해집니다. 말이 거칠어집니다. 무관심하게 됩니다. 부부싸움이 잦아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과의 첫 사랑을 잊어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이 뜨거움이 없고, 감격이 없고, 설레임이 없고, 하는 일없이 마음이 피곤합니다.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지고 따분해집니다. 헌신이 부담스러워집니다. 기쁨과 사랑의 샘이 말라서 가물어 메마른 땅과 같이 됩니다. 말씀을 읽어도 감격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습니다. 찬송이 심령에서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넷째, 주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5).
첫째는 생각하여야 합니다(remember).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은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하다는 영어로 remember,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 회상은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처음 그리스도에게로 나왔을 때에 비해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지금 나는 어디 서 있는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비해, 그 감격과 신선함에 비해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 내가 첫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가 믿음이 약해진 것이 결혼하고 나서인가, 아니면 취직을 하고 나서인가, 아니면 승진하고 나서인가, 아기 낳고 후부터인가, 돈을 벌고 난 후부터인가, 첫 사랑을 잃어버린 계기가 무엇이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생각 좀 해 보라, 회상해 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첫 사랑을 잃어버리는 계기를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입니다. 사람이 역경 중에 타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역경중일 때에는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부존자원이 전무한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발전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점점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성도들은 전도와 헌신의 단어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우리라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때, 무슨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할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잘 섬기도록 합시다.
둘째는 회개하여야 합니다(repent). 이제 기억했으면 그 문제를 찾아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부정과거로, 계속적인 동작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동작을 말합니다.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단번에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생각해 보겠습니다가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회개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회개는 단번에, 즉시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차차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정리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첫 사랑이 식었으면 이를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셋째는 회복하여야 합니다(rekindle, restore). 생각하고 회개하였으면 처음에 시작했던 그 자리,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서야 합니다. 여기에서 볼 때 생각이 지적이라면, 회개는 정적이고, 그 자리로 돌아서는, 회복되는 것은 의지적인 삶의 결단입니다. 이처럼 첫사랑의 회복은 지정의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첫사랑을 잊어버려서 심정이 사라지고 냉랭해지고 습관과 타성에 박힌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그 원인을 찾아서 회개하고 원위치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 일은 너무나도 시급한 일입니다.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인내로 교회를 섬긴다 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그 뜨거웠던 첫사랑을 잊어버릴 가장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첫사랑이 회복되지 않을 때 주님의 경고가 무엇입니까?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보면 if not, remove라고 했습니다. if not, remove, 축복을 거두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시면 남는 것은 저주와 심판뿐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 빈털터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시는 순간 멸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3단계, 생각하고(remember), 회개하고(repent), 회복해야 합니다(rekindle, restore ). 다시 말해 3R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토록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반 사람들은 돈이 그 사람의 행동을 움직이는 동기가 됩니다. 월급을 많이 주고 수당을 많이 주면 열심히 일합니다. 반면에 월급을 조금 주면 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질, 권력, 명예, 지식이 그 삶의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랑이 그 삶의 동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의 동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이었습니까? 사례비이었습니까? 명예와 권력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 5:14a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강권하다’란 둘러싸고 밀어낸다, 붙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과 양떼들을 섬기지 않으면 못견디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둘러싸고 밀어내어 적당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에, 그의 심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솟구쳐 오르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심령에서 한없는 은혜와 감사가 솟아오르기 때문에 죄의 홍수에 떠밀려가는 불신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본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졌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 때의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5:14b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하여,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저주와 심판을 받으심으로 나의 죄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셨습니다(갈3:13).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이런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은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자매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형제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져서 높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사고하고,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말씀을 듣고 이기는 자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이 비단 에베소 교회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 비쳐진 우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같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기적이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 외면적인 데 치우치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원하시는 주님 앞에서, 심장 수술을 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외식을 버리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이 사라지면 교회의 촛대가 옮겨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느냐 않느냐는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기억하고 주님의 첫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첫 사랑의 감격과 뜨거움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5장을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아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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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심리학에 학습전이(transfer of learning)의 이론이 있는데 그 중에 기억과 망각의 이론이 있습니다. 기억이란 학습 경험의 사실 및 내용을 저장하여 간직하였다가 재생하여 인지해내는 과정을 말하고, 망각이란 일단 기억한 정보가 시간의 경과 또는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약화되고 소멸되어 재생되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순간에 부딪치게 되지만 이런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첫 사랑은 시간이 지나가도 우리 속에 오래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왜냐하면 첫 사랑은 순수하고,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손에는 땀이 나면서 떨리는 등 교감신경의 활성화가 극대화되는 등 아주 강렬하게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대뇌 중에 감정과 관련된 영역이 있는데 이를 변연계라고 합니다. 이중에서 Amygdala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 영역이 강렬하게 활성화될 때에 오래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이란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현상이 부드러집니다. 따라서 늘 기억하고 사용해야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다루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해 신랑이 식어지면 교회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한 가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시고 승천 직전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첫 사랑이 회복되어 주님을 사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주님은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1).
1절을 보면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른 손으로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셨습니다. 여기에서 일곱별은 사역자들을 말하고 일곱 촛대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셨고, 교회를 친히 살피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사람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에베소 교회는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더불어 3대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로 무역, 교통의 요지로서 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렸습니다. 이곳에는 풍요의 여신이라는 아데미(로마어로는 다이아나) 여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길이가 약 132m, 폭이 약 66m, 높이 약 18m인 그리스의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나 되는 거대한 신전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신전은 도피처의 권리를 인정하여 어떤 범죄자라도 성전 300m 이내에 들어오면 살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연히 에베소는 온갖 범죄자의 소굴이요, 죄인들의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가 선교전략상 중요한 곳임을 알고 제3차 전도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을 에베소 개척을 위해 보냈습니다. 그는 처음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두란노 서원에서 12명을 뽑아 집중적으로 제자를 양육하였습니다. 그의 밀레도 고별사를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눈물과 겸손으로 교회를 섬겼다고 회고하였습니다(행20:17-31). 이로 인해 에베소에 놀라운 복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술하는 사람들이 책을 다 가져다가 불살라 없앴는데, 그 액수가 자그마치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행19:19). 바울은 이곳에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로마 선교 비전을 보았습니다(행19:20,21). 이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뛰어난 말씀의 종들을 통해 양육되었습니다. 디모데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아볼로, 두기고 등이 이곳 교회를 섬겼습니다(딤전1:3, 행18:18,19,24, 딤후4:12). 말년에 사도 요한이 이 교회를 섬겼고, 오네시모를 배출한 교회이기도 하였습니다(딤후1:16).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역사와 전통이 빛났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교회의 약점은 복음의 능력보다 역사와 전통을 앞세우기 쉽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몇 십 년 된 교회, 이런 선배들을 배출한 교회, 로마를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한 교회” 또 교회가 역사가 있고 큰 교회일수록 조직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교회가 조직으로 움직이게 되면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유기적인 공동체보다는 조직적인 모임이 되기 쉽습니다. 조직의 생명은 조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데 있습니다.
교회가 조직으로 움직이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이기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중심, 조직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가 주님을 자랑하기보다는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의 업적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주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사용하시고 오른 손으로 보호하시는 주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교회를 순회하시면서 연약한 교회는 힘을 주시고, 잠든 교회는 깨우시고, 사랑이 식은 교회에는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십니다.
둘째, 주님은 그들의 수고를 칭찬하셨습니다(2,3).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행위는 영어로 ‘hard work’,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수고했습니다. 그들은 적당하게 섬긴 것이 아니라 진이 빠지도록 섬겼습니다. 또 주님은 그들의 인내도 잘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인내하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온 마음으로 전도하였고, 부지런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 인근 지방인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교회가 개척되었고 또 로마를 개척하는데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어려운 일과 난관에 부딪쳐도 그 역경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졌습니다. 사회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성도들끼리 적당히 사랑하지 않고, 성도들의 마음에 사랑이 각인되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신중하게 생각하며 인내하여 거짓사도들을 분별했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라며 눌러 앉아 대접받으며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신분을 알 수 있지만 전에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를 의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인내로 거짓 사도들과 거짓된 교훈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단을 미워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은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가 없으며 또 회개하면 용납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짓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에베소 성도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요즘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고, 교회를 여가선용이나 부담 없는 교제의 장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니골라당입니다. 믿는 자는 믿는 자로서의 삶이 있고,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음란한 삶을 산 사람들은 음란을 청산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을 회개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은 그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은 성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부담 없이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나의 생각과 생활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아멘.
셋째, 주님은 첫 사랑을 잊어버린 것을 책망하셨습니다(4).
이처럼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책망 받을 문제가 있었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 보면 책망 받을 것이 전혀 없는 모범적인 교회요 신실한 성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예수님의 첫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은 은혜, 그 눈물, 그 어디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며 소감을 발표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내가 어떻게 되던, 무엇이 되던 상관하지 않으며,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이 부유했고, 한없이 행복했던 과거가 있습니다.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첫째요 전체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양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먹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를 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내 인생을 기꺼이 드리고자 결단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처음 사랑을 잊지 않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처음 사랑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순수한 헌신과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아름다운 처음 사랑의 고백을 잊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서 2:16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다림과 설레임, 울렁거림, 존경과 사랑을 생각하면 부부의 사랑이 다시 새로워지고 깊어집니다. 반면에 첫 사랑이 식으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냉랭해집니다. 말이 거칠어집니다. 무관심하게 됩니다. 부부싸움이 잦아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과의 첫 사랑을 잊어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이 뜨거움이 없고, 감격이 없고, 설레임이 없고, 하는 일없이 마음이 피곤합니다.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지고 따분해집니다. 헌신이 부담스러워집니다. 기쁨과 사랑의 샘이 말라서 가물어 메마른 땅과 같이 됩니다. 말씀을 읽어도 감격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습니다. 찬송이 심령에서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넷째, 주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5).
첫째는 생각하여야 합니다(remember).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은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하다는 영어로 remember,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 회상은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처음 그리스도에게로 나왔을 때에 비해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지금 나는 어디 서 있는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비해, 그 감격과 신선함에 비해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 내가 첫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가 믿음이 약해진 것이 결혼하고 나서인가, 아니면 취직을 하고 나서인가, 아니면 승진하고 나서인가, 아기 낳고 후부터인가, 돈을 벌고 난 후부터인가, 첫 사랑을 잃어버린 계기가 무엇이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생각 좀 해 보라, 회상해 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첫 사랑을 잃어버리는 계기를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입니다. 사람이 역경 중에 타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역경중일 때에는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부존자원이 전무한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발전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점점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성도들은 전도와 헌신의 단어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우리라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때, 무슨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할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잘 섬기도록 합시다.
둘째는 회개하여야 합니다(repent). 이제 기억했으면 그 문제를 찾아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부정과거로, 계속적인 동작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동작을 말합니다.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단번에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생각해 보겠습니다가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회개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회개는 단번에, 즉시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차차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정리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첫 사랑이 식었으면 이를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셋째는 회복하여야 합니다(rekindle, restore). 생각하고 회개하였으면 처음에 시작했던 그 자리,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서야 합니다. 여기에서 볼 때 생각이 지적이라면, 회개는 정적이고, 그 자리로 돌아서는, 회복되는 것은 의지적인 삶의 결단입니다. 이처럼 첫사랑의 회복은 지정의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첫사랑을 잊어버려서 심정이 사라지고 냉랭해지고 습관과 타성에 박힌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그 원인을 찾아서 회개하고 원위치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 일은 너무나도 시급한 일입니다.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인내로 교회를 섬긴다 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그 뜨거웠던 첫사랑을 잊어버릴 가장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첫사랑이 회복되지 않을 때 주님의 경고가 무엇입니까?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보면 if not, remove라고 했습니다. if not, remove, 축복을 거두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시면 남는 것은 저주와 심판뿐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 빈털터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시는 순간 멸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3단계, 생각하고(remember), 회개하고(repent), 회복해야 합니다(rekindle, restore ). 다시 말해 3R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토록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반 사람들은 돈이 그 사람의 행동을 움직이는 동기가 됩니다. 월급을 많이 주고 수당을 많이 주면 열심히 일합니다. 반면에 월급을 조금 주면 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질, 권력, 명예, 지식이 그 삶의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랑이 그 삶의 동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의 동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이었습니까? 사례비이었습니까? 명예와 권력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 5:14a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강권하다’란 둘러싸고 밀어낸다, 붙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과 양떼들을 섬기지 않으면 못견디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둘러싸고 밀어내어 적당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에, 그의 심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솟구쳐 오르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심령에서 한없는 은혜와 감사가 솟아오르기 때문에 죄의 홍수에 떠밀려가는 불신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본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졌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 때의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5:14b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하여,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저주와 심판을 받으심으로 나의 죄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셨습니다(갈3:13).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이런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은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자매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형제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져서 높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사고하고,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말씀을 듣고 이기는 자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이 비단 에베소 교회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 비쳐진 우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같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기적이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 외면적인 데 치우치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원하시는 주님 앞에서, 심장 수술을 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외식을 버리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이 사라지면 교회의 촛대가 옮겨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느냐 않느냐는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기억하고 주님의 첫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첫 사랑의 감격과 뜨거움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5장을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