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이사야서 40:1-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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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70년간 포로 생활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움직일 힘조차 없는 그들에게 여호와를 앙망하여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쳐서 누워있을 때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능력이 없어 절망할 때에 여호와를 앙망하여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오르는 듯한 힘찬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힘이 나고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기보다 하나님을 앙망하여 위로 받고 새 힘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 백성을 위로하라(1-2).
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Comfort, comfort my people.” 이 말씀은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의 서곡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2절을 보면 그들은 복역하고 있었습니다. ‘복역’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의 대가로 중노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그들에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뜻을 두시고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하듯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저버리고 각종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갖가지 불의를 행하고 쾌락을 즐기었습니다. 그들은 위기의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가두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은 징계하셔서 바벨론에서 70년간 노예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복역이란 말을 영어로는 hard servic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이 70년이지 70년간 고국 땅을 뒤로 하고 먼 나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까? 우리의 선조들은 징병에 끌려가고 정신대에 끌려가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 때의 후유증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해야 했으니 그 고통과 서러움이 어떠했겠습니까? 시편 137편을 보면 바벨론 포로생활의 비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라(1-4).”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가 기뻐서 하는 것과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것은 본질상 다릅니다. 찬송을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서 부르면 열곡 아니라 20곡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대가로 모멸 속에 불러야 한다면 두곡은 그만 두고 한곡도 부르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의 찬양은 찬양이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바벨론 강변을 따라 흘러가듯 들리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눈물과 회한과 저주가 가득한 애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때가 이르자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쓸모없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쓸모없는 자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포로생활로 그 마음이 깨지고 상할 대로 상해 있는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갓난아기가 부모님의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다보면 위로 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녀가 커도 때로 부모님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 또한 남편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하고, 목사 또한 성도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몹쓸 죄 지은 죄수까지도 따뜻한 위로의 말고 듣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위로를 받으면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고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문제는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는 어느 정도 위로가 되지만 진정으로 위로가 될 수 없고,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는 한계적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금슬이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도 아내를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이나 금붙이로 만든 우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없고, 명예나 권세 또한 나를 위로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분은 오직 자비의 아버지시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우리를 향해,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찬송가 316장을 다 함께 부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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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70년간 포로 생활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움직일 힘조차 없는 그들에게 여호와를 앙망하여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쳐서 누워있을 때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능력이 없어 절망할 때에 여호와를 앙망하여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오르는 듯한 힘찬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힘이 나고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기보다 하나님을 앙망하여 위로 받고 새 힘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 백성을 위로하라(1-2).
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Comfort, comfort my people.” 이 말씀은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의 서곡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2절을 보면 그들은 복역하고 있었습니다. ‘복역’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의 대가로 중노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그들에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뜻을 두시고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하듯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저버리고 각종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갖가지 불의를 행하고 쾌락을 즐기었습니다. 그들은 위기의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가두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은 징계하셔서 바벨론에서 70년간 노예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복역이란 말을 영어로는 hard servic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이 70년이지 70년간 고국 땅을 뒤로 하고 먼 나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까? 우리의 선조들은 징병에 끌려가고 정신대에 끌려가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 때의 후유증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해야 했으니 그 고통과 서러움이 어떠했겠습니까? 시편 137편을 보면 바벨론 포로생활의 비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라(1-4).”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가 기뻐서 하는 것과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것은 본질상 다릅니다. 찬송을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서 부르면 열곡 아니라 20곡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대가로 모멸 속에 불러야 한다면 두곡은 그만 두고 한곡도 부르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의 찬양은 찬양이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바벨론 강변을 따라 흘러가듯 들리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눈물과 회한과 저주가 가득한 애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때가 이르자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쓸모없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쓸모없는 자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포로생활로 그 마음이 깨지고 상할 대로 상해 있는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갓난아기가 부모님의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다보면 위로 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녀가 커도 때로 부모님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 또한 남편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하고, 목사 또한 성도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몹쓸 죄 지은 죄수까지도 따뜻한 위로의 말고 듣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위로를 받으면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고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문제는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는 어느 정도 위로가 되지만 진정으로 위로가 될 수 없고,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는 한계적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금슬이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도 아내를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이나 금붙이로 만든 우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없고, 명예나 권세 또한 나를 위로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분은 오직 자비의 아버지시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우리를 향해,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찬송가 316장을 다 함께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