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을 품으라(성탄메시지)

조회 수 3675 추천 수 0 2012.07.11 05:56:31
2006년 성탄메시지(빌립보서 2:5-11, 요절 2:5)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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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성경을 보면 곳곳에 성탄 메시지가 나옵니다. 첫 성탄 메시지는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한 유혹자 사단인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장차 오실 성탄의 예고라고 한다면 신약성경의 주제는 구약에 예고된 성탄이 이루어졌음과 동시에 장차 재림 하실 예수님의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신약성경의 27권 중에 14권을 쓴 사도 바울이 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품는다’는 단어는 헬라어 프렌(φρἠν)로, 횡경막, 마음, 생각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프로네오(φρονἐω), 깊이 생각하다는 뜻으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예수님을 배우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마음을 꼭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위인전을 읽고 성현들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 닮고자 합니다. 그런데 인격이란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격과 사상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기까지 반복하여 습관화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생각하고 배우고 닮아 가면 우리 내면에 아름다운 예수님의 인격이 형성됩니다. 인격이 형성되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6a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래 근본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은 예수님의 근본에 대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신 분입니다. 정사는 통치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치하는 통치자이십니다(빌2:10,11). 예수님은 자연을 지배하시고, 죽음을 지배하시고, 영적인 세계까지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사오니”로 시작합니다. ‘전능’이란 하나님의 자유를 뜻합니다. 초월적 능력을 일컬음입니다. 사람은 마음과 뜻이 있어도 실제로 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마음에는 원인데 육신이 약한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과 의지가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1:3).

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6b절 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전능하신 예수님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께서 낮은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지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요13:14). 예수님은 몸으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사마리아 여인과 세리 마태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천방지축의 베드로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쉽게 분을 내는 요한과 야고보를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이 천박한 가룟 유다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도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우고 닮았을 때에 그는 해가 갈수록 겸손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 1장 15절을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성자’라고 하는데 그는 ‘죄인의 괴수’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제일 먼저 씌어졌고 그 다음이 에베소서, 그 다음이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자기의 죄를 깨닫고 더욱더 겸손해졌을 알 수 있습니다. 곡식은 알곡이 될수록 머리가 숙여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교만한 사람은 요란합니다. 신앙이 미성숙하면 할수록 교만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16:18). 한 사람이 루터에게 구원의 첫 단계는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은 겸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것도 겸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무엇입니까? 물으니 그는 ‘그것도 겸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신앙의 요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배워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벧전5:5).

둘째,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우리가 온유하면 흔히 연약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오스(πρᾷὀς)입니다. 이 뜻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을 말합니다. 한 철학자는 온유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를 낼 줄을 안다. 그러나 정당한 대상을 향하여, 정당한 정도로, 정당할 때에, 정당한 목적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낼 줄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자이다.” 성경은 온유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고열이 나서 의사선생이 처방하여 준 약을 먹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을 때를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열을 다스리는 것이 온유입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열이 납니다. 물불가지지 않고 씩씩거립니다. 열을 끄는 것이 온유입니다. 또 사나운 짐승이 잘 훈련되면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훈련된 인격이 온유입니다.

온유의 반대는 노하고 분내고 열을 잘 냅니다. 모든 죄는 분내고 열 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잠언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잠16:32). 또 잠언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잠25:28). 인간은 선천적으로 분을 잘 내고 화를 잘 내고 신경질을 잘 내고 분노를 폭발합니다.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유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온유한 사람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싶으면 격해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온유하신 하나님을 배웠을 때 억울한 환경에서도 격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37편은 다윗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오해와 중상을 받을 때 지은 시입니다. 그는 역경 중에 있었지만 분을 그치고 노를 버렸습니다(8).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분을 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것은 의분이 아니라 분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분이라고 포장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들을 바로 잡아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잡다’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탈골된 뼈를 제 자리에 갖다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물이 찢어졌을 때에 그 그물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잡다’는 회복이요 용서와 치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해서 철저한 반면에 남의 죄에 대하여 용서와 치유로 접근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아름답고 건강하게 세워져 나갑니다. 가정과 사회가 평안하게 됩니다. 반면에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 모인 곳에는 공동체가 질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나듯이 늘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유해질 수 있습니까?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울 때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헬라어로 마데테(μάθετε)인데 이는 ‘제자’라는 마데테스(μαθητής)의 그 어원이 ‘μαθ’ 로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과 늘 함께하며 스승을 가장 가까이에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합니다. 그러다보면 목소리나 글씨나 걸음 거리까지도 똑같게 됩니다. 우리가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워서 분노하고 노하기를 잘 하기보다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순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불순종심과 반발심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하던 짓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8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 땅에 죄와 불순종이 들어왔고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하심으로 생명의 역사, 순종의 역사, 구원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롬5:12-21).

우리는 아담과 같이 좋지 못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고, 그리스도와 같이 생명의 역사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one man vis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나 한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말입니다. 나 한 사람이 주님께 불순종하느냐 순종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물론이고 캠퍼스가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인류역사가 달라집니다. 모든 역사는 나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역사는 from us가 아니라, from me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나 한 사람의 순종은 무너진 창조질서의 회복의 출발점이요 완성이 됩니다.

넷째,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8b).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영광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상에 고난 없는 영광은 결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이 예수님을 배운 폴리갑은 로마 황제의 극한 고문과 회유 가운데서도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로마 황제는 그에게 주님을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자신의 80평생 예수님께서 한 번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느냐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고난을 배워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와 순종과 고난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탄을 맞아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와 순종과 고난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와 순종과 고난을 배워서 예수님의 형상이 조각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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