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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부활절 메시지(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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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and Holy Easter!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주되신 것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차별화된 것이나 세계화한 것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세계화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그리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던 유대인들이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다른 점 또한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불교는 부활이 없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윤회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부활절을 교회의 가장 큰 명절로 지켰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큰 축일로 지키게 된 것은 AD 4세기 후반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부활절을 기념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절기가 다 중요하지만 부활절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활이 교회의 생명과 소망이기 때문이요,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2007년 부활절은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00년 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활의 성령께서 불과 바람같이 임하셔서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60 성상을 넘긴 분단의 비극,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의 슬픔을 안고 있는 민족의 아픔을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통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부활절은 어느 부활절보다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통해 부활 신앙으로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경대로 죽으신 예수님(3)
지나간 세기 동안 인류가 저질러놓은 죄악의 결과로 인해 지구촌이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가치관과 물신주의, 그리고 과학만능주의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아무 죄 없는 어린이를 유괴하여 죽이는 참혹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의 죄악과 죽음을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독생성자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아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인이라는 단어요 죄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회개 메시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의 메시지 대신 쓰는 용어가 무엇인지 아세요? 치유와 회복이란 단어입니다. “우리는 과거 모두가 상처가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치료 받아 풍성한 삶을 삽시다” 하면 아멘! 합니다. 치유 목회, 치유 세미나, 치유 부흥회 하면 구름 떼같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회개 없이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 속에는 ‘나’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16:9).
사람들은 죄의 개념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좀 양심적으로 살면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이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 주님의 사랑을 불신하는 것, 주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것,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신다는 주님의 은혜를 불신하는 것 등, 주님을 불신하는 것은 모두 것이 죄가 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회개 없는 치유와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1907년의 평양 부흥 운동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평안남도 남자성도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2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열흘이 지나 13일이 되었는데도 은혜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놋쇠로 지붕을 씌워놓은 것같이 기도가 막히고 사단이 온 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던 길선주 장로님과 선교사님들은 ‘사경회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14일 정오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헌트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이길함 집사님이 통성기도를 인도했습니다. 이때 길성주 장로님이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나는 ‘걱정마오, 내 그렇게 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나는 미망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훼방했으며, 100달러를 내일 아침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장로님의 회개와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이 임하심이 느껴졌습니다. 죄에 대한 통회가 청중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주일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에 약 12명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울며 서 있었습니다.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온 한 집사가 있었는데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매우 불안해 보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는 자선기금 얼마를 사취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곧 평정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는 더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더니 드디어는 제 7계명을 범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간음죄를 범한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그 한국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듯 했습니다. 이들 고백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죄가 고백되지 않고 숨겨져 있는 한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나, 회개를 통해 그 죄가 드러나는 순간 그분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2개월 남짓한 동안에 2000명 이상이 회심했습니다. 1907년 중엽까지 평양 지역과 관련하여서 3만 명이 회심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악순환만이 계속됩니다. 죄는 육신을 더럽고 추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정신세계와 우리 사회를 황폐케 합니다. 죄는 사치, 탐욕, 쾌락, 허무, 은폐, 혼돈, 사기, 독선, 퇴폐, 각기 갈등의 사회병리를 낳습니다. 죄는 결국 죽음이 문화를 가져다줍니다. 죄의 결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a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일생 수고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으로 모두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3b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져야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동시에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나음을 입어 건강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란 우리의 본성이나 기질이나 성향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아담 안의 생명은 자기중심적 삶입니다. for God이 아닌 for me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이 생명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죄는 매질이 있어야 그 능력을 나타나는데 그 매질은 바로 산 것을 통해 행사합니다. 이처럼 아담 안에 있는 생명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셨습니다. 그 때 아담 생명, 옛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죽음은 대단한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죽으면 인간관계도 끝나고 법적인 관계도 중단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남편을 향해 사랑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빚쟁이도 죽은 사람에 대해 빚을 갚으라고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법관도 죽은 사람에게 형을 선고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모든 것에 자유합니다. 죽음은 죄가 역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모든 책임과 지배와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내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죄는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일 동안 땅속에 묻혔다는 것은 죄에 대해 완전한 죽음을 말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죽은 사람을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의 통치를 받지 않고 은혜의 통치를 받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악의 달콤한 삶을 즐겼습니다. 과거 우리는 세상의 육체적인 일들을 보았을 때 그것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나의 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의 쾌락, 탐욕, 정욕 등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나를 지배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죄악의 본성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 겸손, 온유, 신실함, 아름다움, 소망이 자라게 됩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형상과 인격이 내 안에 조각됩니다. 가치관과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10년이 되든, 20년이 되든, 30년이 되든 자라서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죽은 내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과거에 대해 쉽게 잊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죽을 지경이어서 기억하고 쉽지 않은 일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어, 그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운운하며 당시를 좋게 회고합니다. 이처럼 잊었다 싶었던 과거가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없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위기의 순간의 때,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노출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생각은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바로 그 생각들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던 것이 감정으로 변화되어, 때로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을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운명을 좌우합니다. 호랑이 새끼를 태어나자마자 곧 떼어서 우유를 먹여 키우면 그 호랑이 새끼는 순하게 잘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동족인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그 순간에 사나운 호랑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도 좋은 습관을 길들이다가도 어느 날 순간적으로 본성이 드러나 표독스럽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과거로 복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의식 가운데 돌아가면 control할 수 있는데, 무의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control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십자가에 죽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둘째,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4)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에 대해 죽었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는 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입니다. 로마서 6장 8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장차 이루어질 미래적인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적인 말씀이 아니라 “현재 그와 함께 살고 있음을 믿는다”입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있는 새 사람입니다. 이게 소명이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를 미래를 사는 것처럼 현재 누려야 됩니다. 이 땅에서 장차 이루어질 것들을 입맛을 다시며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이 땅에서 구원의 충만함과 풍성함과 풍요로움을 누려야 됩니다. 거지처럼 살지 말고 왕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 소명과 구원은 엄숙하고 아름답습니다. 로마서 6장 11b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죄에 대해 죽은 사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겨야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는 동안 현대인들은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나 역사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직 “now and here”,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순간 행복하고”, “이 순간 내가 존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예배도 미래의 어떤 기대나 과거의 역사 같은 것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지금 현재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과거 주님의 부활 등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혼자 느끼고 즐기깁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세계에 갇히게 되는 자폐증 환자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런 껍질 속에 갇혀있는, 자폐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을 꺼내어 자신의 실존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해 줍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으면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서만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단순히 믿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 묵상이나 수도를 통해 어느 날 갑자기 부활을 믿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처절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은 가장 허무하고 슬픈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구원도 미완성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로 확증하셨습니다. “주”란 하나님으로 통치자를 말합니다. 과거에는 죄와 죽음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또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사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죽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승천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경험하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묻히실 때 나도 묻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하고, 하늘의 우편에 계실 때 나도 우편에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우편에 앉힌 바 되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 아니라 이미 가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 함께 재림합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예수 생명은 우리 몸과 만나게 됩니다. 이 생명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원히 거할 생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주요, 생명의 주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슬픔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joyful하고 powerful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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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and Holy Easter!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주되신 것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차별화된 것이나 세계화한 것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세계화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그리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던 유대인들이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다른 점 또한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불교는 부활이 없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윤회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부활절을 교회의 가장 큰 명절로 지켰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큰 축일로 지키게 된 것은 AD 4세기 후반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부활절을 기념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절기가 다 중요하지만 부활절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활이 교회의 생명과 소망이기 때문이요,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2007년 부활절은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00년 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활의 성령께서 불과 바람같이 임하셔서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60 성상을 넘긴 분단의 비극,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의 슬픔을 안고 있는 민족의 아픔을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통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부활절은 어느 부활절보다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통해 부활 신앙으로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경대로 죽으신 예수님(3)
지나간 세기 동안 인류가 저질러놓은 죄악의 결과로 인해 지구촌이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가치관과 물신주의, 그리고 과학만능주의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아무 죄 없는 어린이를 유괴하여 죽이는 참혹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의 죄악과 죽음을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독생성자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아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인이라는 단어요 죄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회개 메시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의 메시지 대신 쓰는 용어가 무엇인지 아세요? 치유와 회복이란 단어입니다. “우리는 과거 모두가 상처가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치료 받아 풍성한 삶을 삽시다” 하면 아멘! 합니다. 치유 목회, 치유 세미나, 치유 부흥회 하면 구름 떼같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회개 없이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 속에는 ‘나’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16:9).
사람들은 죄의 개념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좀 양심적으로 살면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이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 주님의 사랑을 불신하는 것, 주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것,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신다는 주님의 은혜를 불신하는 것 등, 주님을 불신하는 것은 모두 것이 죄가 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회개 없는 치유와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1907년의 평양 부흥 운동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평안남도 남자성도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2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열흘이 지나 13일이 되었는데도 은혜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놋쇠로 지붕을 씌워놓은 것같이 기도가 막히고 사단이 온 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던 길선주 장로님과 선교사님들은 ‘사경회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14일 정오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헌트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이길함 집사님이 통성기도를 인도했습니다. 이때 길성주 장로님이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나는 ‘걱정마오, 내 그렇게 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나는 미망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훼방했으며, 100달러를 내일 아침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장로님의 회개와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이 임하심이 느껴졌습니다. 죄에 대한 통회가 청중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주일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에 약 12명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울며 서 있었습니다.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온 한 집사가 있었는데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매우 불안해 보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는 자선기금 얼마를 사취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곧 평정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는 더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더니 드디어는 제 7계명을 범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간음죄를 범한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그 한국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듯 했습니다. 이들 고백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죄가 고백되지 않고 숨겨져 있는 한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나, 회개를 통해 그 죄가 드러나는 순간 그분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2개월 남짓한 동안에 2000명 이상이 회심했습니다. 1907년 중엽까지 평양 지역과 관련하여서 3만 명이 회심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악순환만이 계속됩니다. 죄는 육신을 더럽고 추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정신세계와 우리 사회를 황폐케 합니다. 죄는 사치, 탐욕, 쾌락, 허무, 은폐, 혼돈, 사기, 독선, 퇴폐, 각기 갈등의 사회병리를 낳습니다. 죄는 결국 죽음이 문화를 가져다줍니다. 죄의 결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a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일생 수고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으로 모두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3b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져야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동시에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나음을 입어 건강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란 우리의 본성이나 기질이나 성향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아담 안의 생명은 자기중심적 삶입니다. for God이 아닌 for me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이 생명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죄는 매질이 있어야 그 능력을 나타나는데 그 매질은 바로 산 것을 통해 행사합니다. 이처럼 아담 안에 있는 생명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셨습니다. 그 때 아담 생명, 옛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죽음은 대단한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죽으면 인간관계도 끝나고 법적인 관계도 중단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남편을 향해 사랑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빚쟁이도 죽은 사람에 대해 빚을 갚으라고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법관도 죽은 사람에게 형을 선고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모든 것에 자유합니다. 죽음은 죄가 역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모든 책임과 지배와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내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죄는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일 동안 땅속에 묻혔다는 것은 죄에 대해 완전한 죽음을 말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죽은 사람을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의 통치를 받지 않고 은혜의 통치를 받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악의 달콤한 삶을 즐겼습니다. 과거 우리는 세상의 육체적인 일들을 보았을 때 그것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나의 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의 쾌락, 탐욕, 정욕 등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나를 지배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죄악의 본성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 겸손, 온유, 신실함, 아름다움, 소망이 자라게 됩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형상과 인격이 내 안에 조각됩니다. 가치관과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10년이 되든, 20년이 되든, 30년이 되든 자라서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죽은 내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과거에 대해 쉽게 잊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죽을 지경이어서 기억하고 쉽지 않은 일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어, 그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운운하며 당시를 좋게 회고합니다. 이처럼 잊었다 싶었던 과거가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없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위기의 순간의 때,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노출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생각은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바로 그 생각들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던 것이 감정으로 변화되어, 때로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을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운명을 좌우합니다. 호랑이 새끼를 태어나자마자 곧 떼어서 우유를 먹여 키우면 그 호랑이 새끼는 순하게 잘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동족인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그 순간에 사나운 호랑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도 좋은 습관을 길들이다가도 어느 날 순간적으로 본성이 드러나 표독스럽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과거로 복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의식 가운데 돌아가면 control할 수 있는데, 무의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control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십자가에 죽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둘째,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4)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에 대해 죽었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는 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입니다. 로마서 6장 8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장차 이루어질 미래적인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적인 말씀이 아니라 “현재 그와 함께 살고 있음을 믿는다”입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있는 새 사람입니다. 이게 소명이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를 미래를 사는 것처럼 현재 누려야 됩니다. 이 땅에서 장차 이루어질 것들을 입맛을 다시며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이 땅에서 구원의 충만함과 풍성함과 풍요로움을 누려야 됩니다. 거지처럼 살지 말고 왕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 소명과 구원은 엄숙하고 아름답습니다. 로마서 6장 11b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죄에 대해 죽은 사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겨야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는 동안 현대인들은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나 역사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직 “now and here”,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순간 행복하고”, “이 순간 내가 존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예배도 미래의 어떤 기대나 과거의 역사 같은 것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지금 현재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과거 주님의 부활 등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혼자 느끼고 즐기깁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세계에 갇히게 되는 자폐증 환자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런 껍질 속에 갇혀있는, 자폐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을 꺼내어 자신의 실존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해 줍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으면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서만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단순히 믿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 묵상이나 수도를 통해 어느 날 갑자기 부활을 믿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처절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은 가장 허무하고 슬픈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구원도 미완성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로 확증하셨습니다. “주”란 하나님으로 통치자를 말합니다. 과거에는 죄와 죽음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또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사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죽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승천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경험하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묻히실 때 나도 묻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하고, 하늘의 우편에 계실 때 나도 우편에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우편에 앉힌 바 되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 아니라 이미 가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 함께 재림합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예수 생명은 우리 몸과 만나게 됩니다. 이 생명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원히 거할 생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주요, 생명의 주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슬픔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joyful하고 powerful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