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신년 2강 마태복음 6:19-34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모두에게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이를 기초로 매슬로우는 다섯 단계의 욕구이론을 전개했습니다. 우리는 넓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자가용을 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런 욕구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삶의 원리로 그런 욕구를 추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원리가 없는 욕구는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열차가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욕구가 없으면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즉 욕구는 삶을 역동성 있게 하지만 원리에 의해 제어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삶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과 접촉하며 살되 세상을 뛰어 넘어선 삶을 살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을 다스리고 재물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의 재물과 의식주에 대한 바른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년을 맞아 바른 물질관과 삶의 목적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1.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성경은 물질경시주의와 배금사상을 동시에 배격합니다. 그래서 “물질은 죄악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어 성경에 ‘쌓아 두다(θησαυρίζω)’와 ‘보물(θησαυρούς)’은 그 어근이 같습니다. 이를 볼 때 보물과 쌓아 두는 것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쌓는다’는 뜻은 어떤 활동이나 일을 위하여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아무 목적 없이 쌓아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소유하되 소유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 그리고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유에 대한 욕망은 있지만 삶의 원리를 잘 몰라 못쓰게 된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각종 투기를 통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돈 되는 것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해 오늘을 위해 곡식을 쌓아 두었습니다. 그는 소출이 풍성해지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7-19)
그는 그 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그는 일생 동안 자기가 번 돈을 가지고 한 번도 선한 일에 써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아마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여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쌓아 두고자 하는 욕망은 있었지만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삶의 원리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어리석은 부자라고 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인간의 욕구를 삶의 원리로 제어하여 내일을 위해, 영원을 위해, 창조적인 역사, 역동적인 역사, 하나님 나라와 복음 역사와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원리에 기초하여 사는 사람들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됩니다(딤전 6:17-19).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십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인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태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그런데 ‘보물’이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 보물은 비단이었습니다. 비단은 좀이 잘 실습니다. 그리고 보물은 화폐를 말합니다. 당시 화폐가 동이었기 때문에 록이 잘 슬었습니다. 그리고 보물은 항상 도둑이 눈독을 들이고 있어 언제 어느 때 약탈당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보물은 내가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물이 돈이 보물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와 지식과 학문과 재능과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땅에는 좀과 동록과 도둑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썩고 쇠하고 부패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곳곳에 애써 쌓아 놓은 보물을 약탈해가는 약탈자들이 있습니다. 불이나 질병, 교통사고, 전쟁과 수재와 지진과 화산폭발은 하루아침에 우리의 보물을 앗아갑니다. 요즘 잘 나가던 관료들이 법정에 혹은 국화에 불려나와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줄줄이 교도소로 가고 있습니다.
도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죽음으로 내몰아 일생 동안 모았던 모든 보물을 한낱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죽음 앞에는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약탈자들은 전혀 예기치 않게 우리 곁을 찾아옵니다. 이처럼 세상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마 6:21).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知人知面不知心).”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Appearances are deceptive로,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속내를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물질을 어디에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물과 마음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세상에 물질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이고,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물질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이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물질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때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물질을 팍팍 씁니다. 자기를 위하여 쓰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먼 안목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하늘에 쌓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안전한 금고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다가 집을 짓는 것입니다.
둘째, 눈은 몸의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눈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합니다. 눈이 좋으면 모든 것이 밝고 맑게 보입니다. 그러나 눈이 침침하면 모든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귀보다 눈을 통해 95%의 정보를 얻습니다. 그래서 전화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면서 전화합니다. 소리는 모노와 스트레오 밖에 없지만 보는 것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도 있지만 마음의 눈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너희로 흐ㅏ로 알개 구하노라.”(엡 1:18-19)
마음의 눈이 맑으면 영적인 상태가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귀하고 가치가 있는가를 알기 때문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둡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맑지 못한 사람은 땅의 것을 귀하게 여겨 땅의 것을 추구합니다. 이처럼 마음 눈의 상태에 따라 인생 전체가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세상을 보느냐, 아니면 육적으로 세상을 보는냐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육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탐욕과 이기심과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눈을 밝게 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이 보물을 땅에 쌓느냐, 하늘에 쌓느냐는 어떤 것을 주인으로 섬기느냐로 귀착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말씀하셨습니다(신 6:5).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이냐, 아니면 재물이냐의 선택입니다. 재물은 원어에 보면 ‘맘모나스(μαμμωνâ)’로 이는 신성화된 허욕, 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돈신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우상은 돈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 양심을 팔고, 정조를 팔고, 신앙을 팝니다. 돈 벌기에 바빠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돈 버는 일에 몰두하다가 신앙까지 저버립니다. 이들은 맘몬교에 속한 돈신을 따르는 돈 신자들입니다.
우리가 헌금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문제, 곧 돈신, 맘몬신을 부스고 깨뜨리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헌물을 드리는 것은 돈신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삶의 표현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드리지 않을 때 생명을 드릴 수 없고, 시간을 드릴 수 없고, 전공을 드릴 수 없고, 자신의 삶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쌓아 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원리로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하나님께 부유한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찰스 F 피니가 자신의 소유한 전 재산 약 9조원을 기부했습니다. 그는 1982년부터 익명으로 기부했습니다. 그 중에 27억 달러(3조2000억 원)는 5개 대륙, 1000여개 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도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작년에 700만 달러(약 83억 원)를 모교 코넬대에 기부함으로 마지막 재산까지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는 거액을 기부했지만 그의 삶은 소박하여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임대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행할 때 버스를 타고, 비닐 가방에는 항상 책 한 권이 들려있습니다. 뉴욕에 살 때는 맨해튼 변두리의 허름한 식당에서 햄버거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최소한의 생활비 외의 돈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주 인색했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부유했습니다.
2. 염려하지 말라(마 6:25-30)
일찍이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란 주제로 조각하였습니다. 만일 사람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생각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염려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생각은 건설이요 염려는 파괴입니다. 생각은 희망으로 이끌지만 염려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하시자, 제자들의 마음에 ‘굶어 죽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괜찮지만 장래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무엇이 중한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목숨과 몸은 존재요 의복과 음식은 소유의 문제입니다. 소유보다 존재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목숨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솔로몬의 부귀영화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삽니다. 이는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각종 곤충과 벌레들을 도처에 예비하여 놓으시고 섬세하게 돌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는 열심히 일만 하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는 하늘을 날아야 하기 때문에 배나 날개에 기름이 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축적된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는 하루는 그만 두고 한 끼만 굶어도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축적된 에너지가 많기 때문에 40일간 굶어도 죽지 않습니다. 걱정을 한다면 사람보다 새들이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새가 굶어 죽었다는 말 들어본 적도 없고, 또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열심히 날아다니기만 하면 결코 굶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새보다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목숨을 위해 염려한다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입니다. 새처럼 열심히 일하면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목숨)를 한 자 늘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염려하면 오히려 위장병, 불면증, 편두통, 신경쇠약, 심장병 등에 걸려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염려’는 만병의 근원이요 ‘믿음’은 만병통치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의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의복이 날개다’란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차가 날개라 하여 무슨 차를 탈 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은 보다 깊은 차원에서 고찰해 보라는 뜻입니다. 백합화는 돌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백합화는 들에서 아무렇게나 자랍니다.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 우아함, 색깔 등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입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염려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염려합니다. 현재 잘 먹고 잘 입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염려합니다. 이처럼 염려는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염려는 사람을 초조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흥분하게 합니다. 이렇게 염려하는 근본 원인은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마 6:30)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길 때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을 신뢰하는 어린이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볼보심이라.”(벧전 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염려 대신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염려보다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사람들은 주로 하는 일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자고 하는 일인데 일단 먹고 보자입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고 입는 걱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이 없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입고, 좀 더 좋은 집에서 잘 살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구하다 보면 일생 동안 먹고 마시는 데 얽매여 하나님과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회복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먼저’라는 말씀은 순서라는 뜻을 넘어서서 절대적인 가치와 우선권을 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구하라’는 말은 열렬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열정의 통로를 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되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할 때에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많은 사람들이 염려의 공장을 차려 놓고 예측도 못할 염려를 만들어 염려합니다. 그리고 염려에 압도당해 고통하고 신음합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고, 우리는 오늘에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삶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접촉하며 살되 세상을 뛰어 넘어서서 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년을 맞아 바른 물질관과 바른 삶의 목적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