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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1-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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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받은 신령한 체험과 환상의 계시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육체의 가시가 나옵니다. 이 가시가 뭣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시처럼 찌르는 육체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병은 고질적인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나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응답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쓴 잔을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 큰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능히 그 고난의 잔을 견딜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간구 또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며 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후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주님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할 그 때가 곧 강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었고,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환상을 본 사도 바울(1-6)
1절을 보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나 환상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환상이나 계시에 대해 가르친 적 또한 없었습니다. 특히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득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환상을 자랑하였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를 전하였습니다. 또 14년 전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이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은 낙원이었습니다. 이 낙원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으로, 하나님이 계신 영광스러운 곳이었습니다(계21:2).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몸이 승천하여 간 것인 지, 아니면 영혼만 올라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신다며 두 번이나 언급하였습니다.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 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그는 듣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그만 두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성경 말씀보다 그의 말을 더 중히 여길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개인이 체험한 계시나 환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환상과 계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개인적인 계시나 환상을 지나치게 앞세우고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게 됩니다. 대개 이단들이나 사이비들의 특징은 모두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를 강조합니다. ‘나는 입신을 했다!’ ‘나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직통 계시를 받는다!’ 그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자신의 말을 절대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말씀 중심보다 사람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보다 이런 사람들을 더 찾게 됩니다.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말을 절대시합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가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찾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초보자 또는 수준 미달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환상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이 진실한지 어떤 근거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비적인 것들을 찾고 싶어 합니다. 뭔가 느끼고자 하고, 뭔가 보고자 원하고, 뭔가 뜨거운 체험을 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오감이 자극되는 감정의 충만함이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체험을 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환상이나 일시적 감정,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광을 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신명기 13장 1-3절을 보면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이적과 기사를 보여준다 해도, 또는 그 예언이 맞는 것 같아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골로새 교회의 여러 사람들은 환상을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하나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을 교만하게 하고 분열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깔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2:19b)”고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자라도록 하심으로 자랍니다. 따라서 신비적인 체험을 찾기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를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자로 된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다.
둘째, 몸에 가시가 있는 사도 바울(7-10)
사도 바울은 환상과 계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계시를 받았습니다(7a).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빛난 영광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마게도냐 성에서 와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a messenger of Satan)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가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시는 끊임없이 그를 찌르고 괴롭혔습니다. 가시가 찌를 때마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그래도 그는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도 ‘No’ 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사도 바울은 그래도 그 고통이 너무 괴로워 세 번째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사단의 가시를 제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온전하다는 영어로 perfect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온전해집니다. 사람은 가시와 같은 고통과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약해집니다. 이때에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쇠가 달구어졌을 때에 대장장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쇠가 달구어지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에 흙이 곱고 부드러워야 좋은 완전한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흙이 굳어 있고 딱딱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작품은 전적으로 재료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간성이 강하고 내면이 딱딱하고 교만할 때에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온유해졌을 때에 그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혈기와 감정으로 똘똘 뭉쳐져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40년간의 광야 훈련과 연단을 받아 온유해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는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그 능력을 행하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그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을 버리시고 겸손한 다윗에게 능력을 나타내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그렇다고 가시 자체가 좋다거나 선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이 가시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하여 더 타락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어린 딸을 잃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가시었습니다. 그 가시는 그를 몹시 힘들게 합니다. 그 가시는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아 딸이 죽었다며 쓴 뿌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떤 이에게는 이 가시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기회가 됩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Uncle Tom's Cabin의 저자인 Stowe가 그러합니다. 그녀에게는 귀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딸이 어릴 때에 그만 죽었습니다. 이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딸 생각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딸로 인해 슬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슬픔을 당한 여인이 또 있을까? 그 때 노예들의 형편을 보았습니다. 흑인의 어머니들은 아들딸들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가는 생이별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영원한 이별을 하였지만 노예들의 어머니는 살아서 이렇게 이별을 하다니 그 흑인들의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아플까? 하는 심정을 소설에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그 책의 출간으로 노예 제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져 노예가 해방되는 자유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할 수만 있으면 가시가 없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먹구름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청명한 날씨가 계속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구름을 통해 태양의 찬란한 빛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12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음성을 세 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족한 은혜를 주심을 깨닫고 낙망과 슬픔과 고독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2년의 옥중생활 속에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만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밀튼은 독실한 청교도입니다. 그는 실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족한 은혜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실낙원을 쓸 수 있었습니다.
악성 베토벤은 귀가 먹어 아무 것도 듣지 못했을 때에 유명한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좋은 환경에서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조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램브란트는 첫째 부인 사스키아를 잃었고, 보모로 들어온 헨드릭게마저 잃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아들인 티투스마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사스키아와 헨드릭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모두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가산까지 다 잃었습니다. 이런 불행들은 램브란트에게 견디기 힘든 큰 가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약한 데서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강했던 시절은 환난과 핍박 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바티칸 성당이 지어졌을 때보다 고난을 피해 카타콤에 숨어 지낼 때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에 이미 그 힘은 상실되었습니다. 한 교황이 ‘교회에 이제 금과 은이 없는 가난한 시대는 지났다’고 하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실패와 궁핍 속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주는 진주패라는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 만들어집니다.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 때 조개는 즙을 짜서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 1년, 2년, 4년, 5년이 지나면 마지막에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의 가시를 통해 진주와 같은 보배로운 믿음과 인격이 형성됩니다. 약하고 고독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약할 때에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십니다(사35:3).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하십니다(사40:29).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의 가시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것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인간 조건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질병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들로 인한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체류 문제가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슬퍼하고 낙망하고 낙심하고 염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맡기십시오. 왜냐하면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강한 척 하지 마세요. 강하다는 위선을 깨십시오.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진실하게 아뢰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의 손을 내미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한 데서 강해집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을 붙드시고 부족하면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넘어진 사람은 일으켜 세우시고, 약한 자는 건강하게 치유하여 주시고, 힘이 필요한 자에게는 힘이 되어 주시고,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해 주시고, 보호가 필요한 자에게는 보호해 주시고, 소망이 필요한 자에게는 소망을 주십니다.
찬송가 434장 2절을 부르겠습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극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한 데서 강해집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는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시고, 극히 고단할지라도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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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받은 신령한 체험과 환상의 계시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육체의 가시가 나옵니다. 이 가시가 뭣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시처럼 찌르는 육체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병은 고질적인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나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응답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쓴 잔을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 큰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능히 그 고난의 잔을 견딜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간구 또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며 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후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주님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할 그 때가 곧 강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었고,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환상을 본 사도 바울(1-6)
1절을 보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나 환상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환상이나 계시에 대해 가르친 적 또한 없었습니다. 특히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득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환상을 자랑하였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를 전하였습니다. 또 14년 전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이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은 낙원이었습니다. 이 낙원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으로, 하나님이 계신 영광스러운 곳이었습니다(계21:2).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몸이 승천하여 간 것인 지, 아니면 영혼만 올라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신다며 두 번이나 언급하였습니다.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 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그는 듣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그만 두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성경 말씀보다 그의 말을 더 중히 여길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개인이 체험한 계시나 환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환상과 계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개인적인 계시나 환상을 지나치게 앞세우고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게 됩니다. 대개 이단들이나 사이비들의 특징은 모두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를 강조합니다. ‘나는 입신을 했다!’ ‘나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직통 계시를 받는다!’ 그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자신의 말을 절대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말씀 중심보다 사람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보다 이런 사람들을 더 찾게 됩니다.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말을 절대시합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가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찾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초보자 또는 수준 미달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환상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이 진실한지 어떤 근거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비적인 것들을 찾고 싶어 합니다. 뭔가 느끼고자 하고, 뭔가 보고자 원하고, 뭔가 뜨거운 체험을 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오감이 자극되는 감정의 충만함이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체험을 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환상이나 일시적 감정,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광을 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신명기 13장 1-3절을 보면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이적과 기사를 보여준다 해도, 또는 그 예언이 맞는 것 같아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골로새 교회의 여러 사람들은 환상을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하나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을 교만하게 하고 분열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깔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2:19b)”고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자라도록 하심으로 자랍니다. 따라서 신비적인 체험을 찾기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를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자로 된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다.
둘째, 몸에 가시가 있는 사도 바울(7-10)
사도 바울은 환상과 계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계시를 받았습니다(7a).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빛난 영광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마게도냐 성에서 와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a messenger of Satan)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가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시는 끊임없이 그를 찌르고 괴롭혔습니다. 가시가 찌를 때마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그래도 그는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도 ‘No’ 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사도 바울은 그래도 그 고통이 너무 괴로워 세 번째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사단의 가시를 제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온전하다는 영어로 perfect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온전해집니다. 사람은 가시와 같은 고통과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약해집니다. 이때에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쇠가 달구어졌을 때에 대장장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쇠가 달구어지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에 흙이 곱고 부드러워야 좋은 완전한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흙이 굳어 있고 딱딱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작품은 전적으로 재료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간성이 강하고 내면이 딱딱하고 교만할 때에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온유해졌을 때에 그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혈기와 감정으로 똘똘 뭉쳐져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40년간의 광야 훈련과 연단을 받아 온유해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는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그 능력을 행하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그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을 버리시고 겸손한 다윗에게 능력을 나타내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그렇다고 가시 자체가 좋다거나 선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이 가시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하여 더 타락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어린 딸을 잃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가시었습니다. 그 가시는 그를 몹시 힘들게 합니다. 그 가시는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아 딸이 죽었다며 쓴 뿌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떤 이에게는 이 가시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기회가 됩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Uncle Tom's Cabin의 저자인 Stowe가 그러합니다. 그녀에게는 귀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딸이 어릴 때에 그만 죽었습니다. 이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딸 생각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딸로 인해 슬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슬픔을 당한 여인이 또 있을까? 그 때 노예들의 형편을 보았습니다. 흑인의 어머니들은 아들딸들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가는 생이별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영원한 이별을 하였지만 노예들의 어머니는 살아서 이렇게 이별을 하다니 그 흑인들의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아플까? 하는 심정을 소설에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그 책의 출간으로 노예 제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져 노예가 해방되는 자유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할 수만 있으면 가시가 없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먹구름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청명한 날씨가 계속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구름을 통해 태양의 찬란한 빛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12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음성을 세 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족한 은혜를 주심을 깨닫고 낙망과 슬픔과 고독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2년의 옥중생활 속에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만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밀튼은 독실한 청교도입니다. 그는 실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족한 은혜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실낙원을 쓸 수 있었습니다.
악성 베토벤은 귀가 먹어 아무 것도 듣지 못했을 때에 유명한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좋은 환경에서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조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램브란트는 첫째 부인 사스키아를 잃었고, 보모로 들어온 헨드릭게마저 잃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아들인 티투스마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사스키아와 헨드릭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모두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가산까지 다 잃었습니다. 이런 불행들은 램브란트에게 견디기 힘든 큰 가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약한 데서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강했던 시절은 환난과 핍박 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바티칸 성당이 지어졌을 때보다 고난을 피해 카타콤에 숨어 지낼 때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에 이미 그 힘은 상실되었습니다. 한 교황이 ‘교회에 이제 금과 은이 없는 가난한 시대는 지났다’고 하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실패와 궁핍 속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주는 진주패라는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 만들어집니다.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 때 조개는 즙을 짜서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 1년, 2년, 4년, 5년이 지나면 마지막에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의 가시를 통해 진주와 같은 보배로운 믿음과 인격이 형성됩니다. 약하고 고독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약할 때에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십니다(사35:3).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하십니다(사40:29).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의 가시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것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인간 조건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질병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들로 인한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체류 문제가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슬퍼하고 낙망하고 낙심하고 염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맡기십시오. 왜냐하면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강한 척 하지 마세요. 강하다는 위선을 깨십시오.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진실하게 아뢰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의 손을 내미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한 데서 강해집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을 붙드시고 부족하면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넘어진 사람은 일으켜 세우시고, 약한 자는 건강하게 치유하여 주시고, 힘이 필요한 자에게는 힘이 되어 주시고,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해 주시고, 보호가 필요한 자에게는 보호해 주시고, 소망이 필요한 자에게는 소망을 주십니다.
찬송가 434장 2절을 부르겠습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극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한 데서 강해집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는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시고, 극히 고단할지라도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