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로마서 10:12-15, 요절 10:14
복음 전도의 중요성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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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조지 윗필드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보통 일주일에 40시간 내지 60시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10시간을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할 때에 한사람과 말씀 공부하는 시간을 2시간으로 잡아본다면 하루에 다섯 명과 매일 말씀 공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대일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알지만 하루에 열 시간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평안하게 살다가 늙어 죽느니 차라리 복음을 전하다가 진이 다 빠져 죽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1770년 9월 29일에 전도 집회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던 중에 엑스터라는 작은 마을에 당도했습니다. 그가 그곳을 지나려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냥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들판에 임시 강대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임시 강대상으로 걸어갈 때 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설교하는 것보다 침대에 가셔서 쉬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는 그만큼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단에서 눈을 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실증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는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이 황량한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말하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인치게 하옵시고, 그 다음에 죽어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는 기도를 마친 후에 혼신을 다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전한 말씀 중에 가장 감동적인 설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이 주일인데,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주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 나라로 가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그는 정말 멋지고 감동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간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죠지 윗트휠드가 왜 이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닳아 없어지는 쇠망치처럼 살기를 원했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을 믿는 것이 복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1-13).
11절을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2,13).”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자들을 부요케 하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리는 복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서운 진노의 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이나 유대인이나, 인종, 신분, 빈부귀천, 민족을 막론하고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1절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허물’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란 무게가 모자란 상태를 말합니다. 허물이 적극적이고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행위라면 죄는 소극적인 죄, 더러운 것들이 생겨 짓는 죄를 말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생명에서의 분리를 뜻합니다.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던 그 때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이 세상의 풍속을 좇았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이란 하나님이 없는 사고방식, 하나님이 없는 풍조와 정신구조, 그리고 삶의 스타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사는 사람들을 한마디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17:27). 하나님이 없는 삶은 거룩함과 의와 사랑이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을 자랑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순간의 쾌락과 돈의 노예가 됩니다.
2절을 보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세상 공중의 권세 잡은 자’란 마귀를 뜻합니다. 마귀는 빛나는 최고의 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의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체계를 훼손시키고 하나님의 세계를 파멸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아담을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그 일 이래 이런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우리를 미혹합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미혹합니다. 쾌락과 안일로 미혹합니다. 쉽게 살도록 미혹합니다. 우리는 과거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사단을 위해 봉사를 했습니다(골1:13, 딤후2:26). 그 뿐만 아니라 육체의 욕심을 따랐습니다. ‘육체’란 부패한 본성, 잘못된 性向을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갈5:19-21).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역사관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성향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다니! 사람들은 불치의 병을 앓다가 치료받아 낫기만 해도 얼마나 기뻐합니까? 그런데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 나아가 하늘에 앉힘을 받았습니다(6,7). 로마서 8장 30절에서는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재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과거형, ‘영화롭게 하셨다(glorified)’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래의 사건인 영화도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를 영원까지 구원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이 얼마나 부요합니까? 바울이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였던 원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런 놀라운 복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복은 우주공간을 다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심판에서 구원, 사망에서 생명, 저주에서 축복,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을 안다면 사랑하는 부모, 친척,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복을 알고 전도를 열심히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둘째,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14,15).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말씀은 도치법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볼 때 전파하는 사람, 외치는 사람이 없이는 믿는 자들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듯이, 복음이 아무리 복된 말씀이라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구원역사,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생명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왜 한국 교회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까? 왜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까? 우리의 입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말씀을 전해 보세요.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직장 동료를 교회로 초청해 보세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선후배들에게, 부모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초청해 보세요. 우리 교회 부흥합니다. 캠퍼스에 십자가의 계절이 옵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듣는가 안듣는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초청한 분이 교회에 왔다가 그냥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場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마귀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예배 시간만 되면 눈이 감깁니다. 이것은 피곤해서 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 이야기를 하면 절대로 졸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만 되면 졸립니다. 이것은 마귀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혼미케 하기 때문입니다(고후4:4). 그러니 설교 시간에 졸지 마세요. 조는 것은 혼미케 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8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할 때 무엇을 했습니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위협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행4:20).
성경을 다시 보세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2장 5-7절을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에 항상 옥토에만 뿌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 사람이 옥토인지 박토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에스겔 33: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회피하면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도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만큼 전도인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따라서 전해도 그만 안전해도 그만이다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먼저 알고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복음을 전파합니까? 15a절을 보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복음을 전파하려면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그들이 누구입니까?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해외에 나가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전해 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계승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엡2:20).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주님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으라(마28:19).” 그러므로 나는 직장으로, 학교로, 가정으로 가야 합니다. 생활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나는 전도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전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특별히 몇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정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캠퍼스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장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선교사입니다. 우리가 이 직임을 잘 감당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입니다. 일어나서 찬양하겠습니다. ♬가라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을 전하겠어요♬
15b절은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입니다. 비록 발에서 지독한 발 냄새가 날지라도 그 발은 참으로 아름다운 발입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복음 전도의 중요성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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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조지 윗필드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보통 일주일에 40시간 내지 60시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10시간을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할 때에 한사람과 말씀 공부하는 시간을 2시간으로 잡아본다면 하루에 다섯 명과 매일 말씀 공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대일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알지만 하루에 열 시간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평안하게 살다가 늙어 죽느니 차라리 복음을 전하다가 진이 다 빠져 죽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1770년 9월 29일에 전도 집회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던 중에 엑스터라는 작은 마을에 당도했습니다. 그가 그곳을 지나려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냥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들판에 임시 강대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임시 강대상으로 걸어갈 때 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설교하는 것보다 침대에 가셔서 쉬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는 그만큼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단에서 눈을 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실증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는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이 황량한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말하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인치게 하옵시고, 그 다음에 죽어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는 기도를 마친 후에 혼신을 다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전한 말씀 중에 가장 감동적인 설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이 주일인데,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주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 나라로 가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그는 정말 멋지고 감동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간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죠지 윗트휠드가 왜 이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닳아 없어지는 쇠망치처럼 살기를 원했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을 믿는 것이 복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1-13).
11절을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2,13).”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자들을 부요케 하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리는 복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서운 진노의 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이나 유대인이나, 인종, 신분, 빈부귀천, 민족을 막론하고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1절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허물’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란 무게가 모자란 상태를 말합니다. 허물이 적극적이고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행위라면 죄는 소극적인 죄, 더러운 것들이 생겨 짓는 죄를 말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생명에서의 분리를 뜻합니다.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던 그 때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이 세상의 풍속을 좇았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이란 하나님이 없는 사고방식, 하나님이 없는 풍조와 정신구조, 그리고 삶의 스타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사는 사람들을 한마디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17:27). 하나님이 없는 삶은 거룩함과 의와 사랑이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을 자랑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순간의 쾌락과 돈의 노예가 됩니다.
2절을 보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세상 공중의 권세 잡은 자’란 마귀를 뜻합니다. 마귀는 빛나는 최고의 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의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체계를 훼손시키고 하나님의 세계를 파멸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아담을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그 일 이래 이런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우리를 미혹합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미혹합니다. 쾌락과 안일로 미혹합니다. 쉽게 살도록 미혹합니다. 우리는 과거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사단을 위해 봉사를 했습니다(골1:13, 딤후2:26). 그 뿐만 아니라 육체의 욕심을 따랐습니다. ‘육체’란 부패한 본성, 잘못된 性向을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갈5:19-21).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역사관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성향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다니! 사람들은 불치의 병을 앓다가 치료받아 낫기만 해도 얼마나 기뻐합니까? 그런데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 나아가 하늘에 앉힘을 받았습니다(6,7). 로마서 8장 30절에서는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재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과거형, ‘영화롭게 하셨다(glorified)’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래의 사건인 영화도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를 영원까지 구원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이 얼마나 부요합니까? 바울이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였던 원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런 놀라운 복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복은 우주공간을 다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심판에서 구원, 사망에서 생명, 저주에서 축복,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을 안다면 사랑하는 부모, 친척,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복을 알고 전도를 열심히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둘째,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14,15).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말씀은 도치법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볼 때 전파하는 사람, 외치는 사람이 없이는 믿는 자들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듯이, 복음이 아무리 복된 말씀이라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구원역사,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생명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왜 한국 교회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까? 왜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까? 우리의 입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말씀을 전해 보세요.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직장 동료를 교회로 초청해 보세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선후배들에게, 부모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초청해 보세요. 우리 교회 부흥합니다. 캠퍼스에 십자가의 계절이 옵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듣는가 안듣는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초청한 분이 교회에 왔다가 그냥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場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마귀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예배 시간만 되면 눈이 감깁니다. 이것은 피곤해서 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 이야기를 하면 절대로 졸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만 되면 졸립니다. 이것은 마귀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혼미케 하기 때문입니다(고후4:4). 그러니 설교 시간에 졸지 마세요. 조는 것은 혼미케 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8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할 때 무엇을 했습니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위협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행4:20).
성경을 다시 보세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2장 5-7절을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에 항상 옥토에만 뿌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 사람이 옥토인지 박토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에스겔 33: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회피하면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도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만큼 전도인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따라서 전해도 그만 안전해도 그만이다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먼저 알고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복음을 전파합니까? 15a절을 보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복음을 전파하려면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그들이 누구입니까?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해외에 나가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전해 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계승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엡2:20).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주님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으라(마28:19).” 그러므로 나는 직장으로, 학교로, 가정으로 가야 합니다. 생활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나는 전도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전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특별히 몇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정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캠퍼스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장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선교사입니다. 우리가 이 직임을 잘 감당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입니다. 일어나서 찬양하겠습니다. ♬가라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을 전하겠어요♬
15b절은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입니다. 비록 발에서 지독한 발 냄새가 날지라도 그 발은 참으로 아름다운 발입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