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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1-11(요절 42:1)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급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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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의 견해가 있는가 하면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후에 간구한 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본시의 제목에 고라의 자손들이 수집한 시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란의 자손이 성전에서 봉사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쓴 시로 보기도 합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인으로 회막에서 성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대상9:17). 그들은 찬양대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절기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여호와께 찬양했습니다. 그들 중 한 시인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유리방황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악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윗의 시로 보기도 합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인 압살롬의 배반으로 맨발로 예루살렘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0-37절을 보면 다윗이 피난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일행과 함께 감람산 길로 올라갑니다. 그 때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윗과 아히도벨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입니다. 그는 아히도벨이 배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반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배반일 것입니다. 그는 너무 비통하여 시편 41편 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시를 보면 그는 좌절과 상실된 마음으로 낙심과 낙망 중에 있습니다. 이런 중에 다윗은 하나님이 그리워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의 감격을 잊을 수 없어 합니다. 그는 예배를 사모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본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열망과 그가 찾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다윗의 아름다운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였습니다(1,2).
다윗은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을 때에 그의 영혼은 마치 시냇물을 찾기에 급급한 사슴과 같았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급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면서 사슴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사슴하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시작하는 노천명의 시가 떠오릅니다. 사슴은 목이 길어 멋이 있고 날렵합니다. 사슴은 순전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그리고 사슴은 피가 더운 동물이어서 갈증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번 목이 마르면 금방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입니다. 그리고 물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고, 물을 만나면 염치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니까 자의식이 전혀 없는 짐승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갈급한 소리는 사슴이 목말라 헐떡거릴 때의 소리로 보았습니다. 다윗은 타는 목마름을 견딜 수 없어 어떤 비명 소리를 지르며 물이 있는 시내를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갈급함의 대명사가 사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영혼은 비를 기다리는 마른 땅과 같았습니다. 시편 143편 6절을 보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른 땅이 얼마나 비를 기다립니까? 비가 오지 않으면 여기저기 갈라져서 모든 농작물이 말라 타죽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의 영혼은 갈급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또한 그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시편 119편 131절을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다고 했습니다(시119:148). 사람이 배가 고프면 일찍 깹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영혼이 배가 고파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간절히 사모하고 뵙기를 원했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다윗이 만나기를 원하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가 찾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대화를 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사정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편이 되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예배자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시편 47편 11절을 보면 주는 그를 예배하고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예배 시간에 행해지는 모든 부분이 예배의 모습입니다. 기도, 성경봉독, 찬양, 고백, 침묵, 잠잠히 있는 것, 말씀을 듣는 것, 필기하는 것, 헌금, 세례, 성찬식,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까지도 모두 예배에 포함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배를 마치고 나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목적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 마음을 쏟아 부어서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예배는 위선적인 예배입니다. 찬양을 하더라도 온 마음, 온 몸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의식을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헌금을 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우리의 전체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드린다는 영어로 offer로, 헌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영혼, 마음, 생각, 우리의 힘 모두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찬양을 하라고 했습니다(시113:3).
예배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토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을 보면 봉사하는 자를 찾으시지 않고 오직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섬김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교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만일 섬김 받기를 원한다면 고급 레스토랑으로 가세요. 그러면 멋지게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는 섬김을 받는 곳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배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의 심령에서 영생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갈망하는 만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사모하는 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했습니다(3-8)
다윗은 깊은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이 상한 이유는 첫째는 원수들로부터의 조롱 때문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은 네가 찾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다 보니 눈물이 입에도 들어가고 콧구멍 안으로도 들어갔습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밥 먹듯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원수들이 “도대체 네가 찾는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조롱하고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찾고 진실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사모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아들로부터 쫓김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8절을 보면 시므이라는 사람은 쫓겨 가는 다윗을 향해 따라오면서 계속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람들은 이런 다윗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 세상은 이 모양 이꼴이냐, 그리고 네가 찾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네 꼴이 그게 뭐냐”고 조롱했습니다.
그가 상해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성도의 교제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여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생각하고 마음이 상하도다.” 전에는 성도들과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에는 powerful한 메시지와 은혜로운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성도들과 웃고 울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격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자고 해도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이자고 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하자고 해도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전도하자, 말씀을 공부하자, 심방가자 하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자기 볼일 보러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흥의 감격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세상의 낙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오직 돈을 최고로 생각하고, 미를 최고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이로 인해 상실감에 빠져있습니다.
그를 상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는 내면에 찾아오는 불안이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고 찬송을 하지 못하자 신앙이 침체되었습니다. 그 심령에 낙망과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의기소침해졌습니다. 피해의식에 빠졌습니다. 장래가 불안했습니다. 다윗은 그런 중에 하나님은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슬픔이 변하여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낙망과 낙심 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미살산은 이름 없는 작은 산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단 땅과 헬르몬 산과 이름 없는 미살산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의 대상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배의 대상뿐 아니라 장소와 자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에게 참된 예배의 대상과 장소와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으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다윗은 폭포소리를 들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응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폭포가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심같이 느꼈습니다. 폭포가 떨어지면 파도가 일고 그 물결이 그를 포근하게 감싸는 것 같으며 자기를 그 물속에 잠기게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윗은 한순간 영적인 고통과 슬픔과 낙심과 절망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햇살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다가 깊은 상실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고 앞이 캄캄하여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영화를 봅니까? 집에 가서 침대를 안식처로 삼습니까? 아니면 컴퓨터 게임을 합니까? 먹는 것이 남는다고 먹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싸 앉으실 것입니다. 폭포수와 같은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아멘. 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님의 자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바랐습니다(9-11)
아직도 그의 신앙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9,10). 다윗은 그런 중에 믿음을 잃기 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네 얼굴을 도우시는 네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윗이 절망의 나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전장에서 쌓아올린 무용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도 건지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지팡이가 자신과 함께함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소망의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다’는 영어로 hope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에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세상이 작아 보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찬송이 흘러넘쳤습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습니다. 앙망하다는 영어로 hope입니다. 우러러보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희망의 존재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방향이 없습니다. 방향이 없으면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희망합니까? ‘새 힘’은 깨끗한 힘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새 힘이 없습니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죄로 오염된 힘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도전할 수 없습니다. 앞을 향하여 달려갈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할 때에 새 힘을 덧입게 되고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도전하게 되고,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낙담이 변하여 찬양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가깝듯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할 때에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겁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미국을 바라보면 망합니다. 돈을 바라보면 돌아버립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만큼 실망합니다. 미를 바라보는 만큼 추해집니다. 오직 여호와를 바라는 것만이 복된 길입니다.
지금 한국 가정은 위기입니다. 이혼율이 감소된다는 통계가 있지만 가정은 아직도 캄캄합니다.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됩니다. 교회는 성장을 멈췄습니다. 캠퍼스는 진리와 낭만을 떠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야성을 잃었습니다. 산야를 포효하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고양이들만 우글댑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바라보아 신앙적인 힘을 덧입을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덧입을 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힘차게 오르듯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달음질해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요동치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절망치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늘 평안한 것만은 아닙니다. 괴롭고 슬픈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이 때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간절히 찾고 예배를 사모하며 말씀을 사모할 때에 새 힘을 얻어 슬픔을 이기고,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벅찬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고 예배를 사모하여 새 힘을 덧입어 여름학기를 믿음으로 승리하고 여름수양회와 영어캠프를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급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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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의 견해가 있는가 하면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후에 간구한 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본시의 제목에 고라의 자손들이 수집한 시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란의 자손이 성전에서 봉사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쓴 시로 보기도 합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인으로 회막에서 성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대상9:17). 그들은 찬양대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절기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여호와께 찬양했습니다. 그들 중 한 시인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유리방황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악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윗의 시로 보기도 합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인 압살롬의 배반으로 맨발로 예루살렘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0-37절을 보면 다윗이 피난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일행과 함께 감람산 길로 올라갑니다. 그 때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윗과 아히도벨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입니다. 그는 아히도벨이 배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반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배반일 것입니다. 그는 너무 비통하여 시편 41편 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시를 보면 그는 좌절과 상실된 마음으로 낙심과 낙망 중에 있습니다. 이런 중에 다윗은 하나님이 그리워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의 감격을 잊을 수 없어 합니다. 그는 예배를 사모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본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열망과 그가 찾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다윗의 아름다운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였습니다(1,2).
다윗은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을 때에 그의 영혼은 마치 시냇물을 찾기에 급급한 사슴과 같았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급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면서 사슴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사슴하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시작하는 노천명의 시가 떠오릅니다. 사슴은 목이 길어 멋이 있고 날렵합니다. 사슴은 순전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그리고 사슴은 피가 더운 동물이어서 갈증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번 목이 마르면 금방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입니다. 그리고 물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고, 물을 만나면 염치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니까 자의식이 전혀 없는 짐승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갈급한 소리는 사슴이 목말라 헐떡거릴 때의 소리로 보았습니다. 다윗은 타는 목마름을 견딜 수 없어 어떤 비명 소리를 지르며 물이 있는 시내를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갈급함의 대명사가 사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영혼은 비를 기다리는 마른 땅과 같았습니다. 시편 143편 6절을 보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른 땅이 얼마나 비를 기다립니까? 비가 오지 않으면 여기저기 갈라져서 모든 농작물이 말라 타죽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의 영혼은 갈급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또한 그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시편 119편 131절을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다고 했습니다(시119:148). 사람이 배가 고프면 일찍 깹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영혼이 배가 고파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간절히 사모하고 뵙기를 원했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다윗이 만나기를 원하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가 찾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대화를 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사정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편이 되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예배자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시편 47편 11절을 보면 주는 그를 예배하고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예배 시간에 행해지는 모든 부분이 예배의 모습입니다. 기도, 성경봉독, 찬양, 고백, 침묵, 잠잠히 있는 것, 말씀을 듣는 것, 필기하는 것, 헌금, 세례, 성찬식,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까지도 모두 예배에 포함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배를 마치고 나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목적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 마음을 쏟아 부어서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예배는 위선적인 예배입니다. 찬양을 하더라도 온 마음, 온 몸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의식을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헌금을 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우리의 전체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드린다는 영어로 offer로, 헌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영혼, 마음, 생각, 우리의 힘 모두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찬양을 하라고 했습니다(시113:3).
예배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토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을 보면 봉사하는 자를 찾으시지 않고 오직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섬김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교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만일 섬김 받기를 원한다면 고급 레스토랑으로 가세요. 그러면 멋지게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는 섬김을 받는 곳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배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의 심령에서 영생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갈망하는 만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사모하는 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했습니다(3-8)
다윗은 깊은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이 상한 이유는 첫째는 원수들로부터의 조롱 때문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은 네가 찾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다 보니 눈물이 입에도 들어가고 콧구멍 안으로도 들어갔습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밥 먹듯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원수들이 “도대체 네가 찾는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조롱하고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찾고 진실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사모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아들로부터 쫓김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8절을 보면 시므이라는 사람은 쫓겨 가는 다윗을 향해 따라오면서 계속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람들은 이런 다윗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 세상은 이 모양 이꼴이냐, 그리고 네가 찾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네 꼴이 그게 뭐냐”고 조롱했습니다.
그가 상해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성도의 교제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여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생각하고 마음이 상하도다.” 전에는 성도들과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에는 powerful한 메시지와 은혜로운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성도들과 웃고 울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격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자고 해도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이자고 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하자고 해도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전도하자, 말씀을 공부하자, 심방가자 하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자기 볼일 보러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흥의 감격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세상의 낙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오직 돈을 최고로 생각하고, 미를 최고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이로 인해 상실감에 빠져있습니다.
그를 상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는 내면에 찾아오는 불안이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고 찬송을 하지 못하자 신앙이 침체되었습니다. 그 심령에 낙망과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의기소침해졌습니다. 피해의식에 빠졌습니다. 장래가 불안했습니다. 다윗은 그런 중에 하나님은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슬픔이 변하여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낙망과 낙심 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미살산은 이름 없는 작은 산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단 땅과 헬르몬 산과 이름 없는 미살산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의 대상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배의 대상뿐 아니라 장소와 자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에게 참된 예배의 대상과 장소와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으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다윗은 폭포소리를 들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응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폭포가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심같이 느꼈습니다. 폭포가 떨어지면 파도가 일고 그 물결이 그를 포근하게 감싸는 것 같으며 자기를 그 물속에 잠기게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윗은 한순간 영적인 고통과 슬픔과 낙심과 절망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햇살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다가 깊은 상실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고 앞이 캄캄하여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영화를 봅니까? 집에 가서 침대를 안식처로 삼습니까? 아니면 컴퓨터 게임을 합니까? 먹는 것이 남는다고 먹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싸 앉으실 것입니다. 폭포수와 같은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아멘. 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님의 자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바랐습니다(9-11)
아직도 그의 신앙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9,10). 다윗은 그런 중에 믿음을 잃기 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네 얼굴을 도우시는 네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윗이 절망의 나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전장에서 쌓아올린 무용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도 건지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지팡이가 자신과 함께함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소망의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다’는 영어로 hope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에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세상이 작아 보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찬송이 흘러넘쳤습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습니다. 앙망하다는 영어로 hope입니다. 우러러보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희망의 존재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방향이 없습니다. 방향이 없으면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희망합니까? ‘새 힘’은 깨끗한 힘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새 힘이 없습니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죄로 오염된 힘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도전할 수 없습니다. 앞을 향하여 달려갈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할 때에 새 힘을 덧입게 되고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도전하게 되고,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낙담이 변하여 찬양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가깝듯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할 때에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겁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미국을 바라보면 망합니다. 돈을 바라보면 돌아버립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만큼 실망합니다. 미를 바라보는 만큼 추해집니다. 오직 여호와를 바라는 것만이 복된 길입니다.
지금 한국 가정은 위기입니다. 이혼율이 감소된다는 통계가 있지만 가정은 아직도 캄캄합니다.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됩니다. 교회는 성장을 멈췄습니다. 캠퍼스는 진리와 낭만을 떠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야성을 잃었습니다. 산야를 포효하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고양이들만 우글댑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바라보아 신앙적인 힘을 덧입을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덧입을 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힘차게 오르듯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달음질해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요동치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절망치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늘 평안한 것만은 아닙니다. 괴롭고 슬픈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이 때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간절히 찾고 예배를 사모하며 말씀을 사모할 때에 새 힘을 얻어 슬픔을 이기고,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벅찬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고 예배를 사모하여 새 힘을 덧입어 여름학기를 믿음으로 승리하고 여름수양회와 영어캠프를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