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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1-4, 요절 15:1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할 것이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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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회 또한 똑똑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사회에서도 똘똘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비실거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강한 군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 곳곳에 크리스천들에게 ‘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표적인 말씀을 든다면 여호수아서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했습니다(수1:6). 신약 성경을 보면 에베소서 6장 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Be strong)’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3절을 보면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는 모두가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강해지는 통로는 기도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말씀과 기도와 믿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총칼로 무장한 백만 대군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강해져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1).
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교회는 각계각층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세상에 교회만큼 이질적인 공동체는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모이는 대부분의 단체는 어떤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취미를 중심으로 모이는 동호회, 동향인끼리 모이는 향우회, 종씨끼리 모이는 종친회, 같은 학교 출신끼리 모이는 동창회, 그리고 전우들끼리 모이는 전우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 유별난 해병전우회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구성원들이 쉽게 어울릴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적인 성향으로는 함께 어울릴 수 없고, 태생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 있는데, 믿음과 거룩한 사명, 그리고 사랑의 끈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하세♬
문제는 사랑과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차가 천차만별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있는 반면에 믿음이 약한 자도 있습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랑이 좀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명이 투철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약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강한 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앞 뒤가 꽉 막혀 있지 않습니다. 생각이 깊고 넓으며 이해심 또한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쉽게 불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쉽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쉽게 분내지 않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까다롭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 얽매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행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잘 비판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킵니다. 자기는 못하면서도 남의 약점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유치합니다. 잘 토라지고, 잘 삐치고, 쉽게 분냅니다. 의지가 약하고, 감정처리가 미숙합니다. 생각이 얇습니다. 교회에 이런 연약한 사람들이 많게 되면 바람 잘 날 없이 늘 시끄럽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어느 정도 해주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담당하다’는 짊어지다,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이사야서 53장 6절을 보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당신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이로 인해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담당하다’를 짐을 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보면 조롱하고 비웃고 정죄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짐을 지다’는 남의 실수를 내 실수로 생각하여, 이해하고, 믿고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 고통을 함께 하고, 슬픔을 함께 하는 것이 것입니다.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고난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죄 짐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죄 짐까지 져 줄 수 있을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남을 돕고 섬기고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약자에 대한 배려요 섬김입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강자는 약자를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일수록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약자를 섬기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남도 사는 길입니다.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썬다싱이 고통을 함께 나눈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썬다싱이 친구와 함께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얼어서 쓰러진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에 썬다싱은 함께 가던 친구에게 얼어서 쓰러진 사람을 돕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도 힘든데 어떻게 그를 업고 갈 수 있느냐며 먼저 가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썬다싱은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얼마 동안 가니 혼자 살겠다고 간 그 친구가 눈 속에 파 묻혀 죽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얼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가다가 보니 땀이 나고 온기가 생겨 썬다싱도 살고, 졸도하여 쓰러진 사람도 살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혼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게 되고, 남을 살리고자 하면 나도 살고 남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짐을 서로 져 주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우찌므라 간조는 본래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교회주의자가 된 것은 미국 유학 중에 자기 아내가 사소한 실수로 출교를 당한 데 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이런 사소한 죄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면 무슨 교회가 필요한가 하고 무교회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죄 짐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죄 짐을 져 줄 때 무겁던 죄 짐도 가벼워지고 작아져 없어집니다. 그러나 비난하고 정죄할 때 그 범죄는 더 커져서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넘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라면 마땅히 남의 약점을 비판하지 말고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땅히’란 단언가 중요합니다. 마땅히 하라는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b절을 읽겠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b).”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남의 행복과 기쁨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접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도우려면 자기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다 챙기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강자입니까? 약자입니까? 강자는 성숙한 사람이요 약자는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교육이란 성숙한 자가 미성숙한 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선생님이 학생을, 선배가 후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교육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배우는 학생으로 미성숙합니다. 또한 부모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분들은 미성숙합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초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미성숙하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하고, 섬김이 필요합니다.
한편 여러분은 미성숙한 사람일지라도 우리보다 미성숙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미성숙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연약한 자야, 나는 도움이 필요한 자야,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으시고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렘1:6,7). 여러분이 나는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는 한 일생동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고, 섬길 수 없고, 한 사람도 전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약하고, 부족하고, 어린 아린 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스스로 낮은 자존감을 버리고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돌보십시오. 우리가 우리는 스스로 부족하고 약하고 어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2,3).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선을 이루다’는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덕’이란 하나님 앞에서도 선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선하고, 이웃에 대해서도 선한 것, 이 세 관계가 합쳐져서 온전해질 때에 덕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득불 우선순위, priority가 있습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으면 이것은 아주 이상적입니다(I am OK, You are OK.)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느냐에 따라 덕이 나옵니다. 나의 유익을 버리고 너의 유익을 택하는 것이 덕입니다(I am not OK, You are OK.) 또 너에게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으면 그것은 최상입니다(You are OK, God is OK.).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부득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때 무엇을 택해야 합니까? 너보다 하나님을 택하는 것입니다(You are not OK, God is OK.). 이게 덕입니다. 이렇게 선택해나가는 것이 덕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을 보면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이고 덕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1:10a).”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6)”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덕이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의지적입니다. 따라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의지 주도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시기 위해 모든 비방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비방의 표징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주홍글씨에 나오는 주인공 헤스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여러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헤스터와 같이 죄를 짓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방과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방의 표적이 되셨고,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셨고, 채찍을 받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창에 허리를 찔리셨고, 피와 물을 다 쏟으셔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오셔서 그들을 징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절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멘.
바울 사도 또한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모든 비방을 다 받았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도 당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고전15:31). 이로 인해 많은 양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고후4:12).
우리는 연약하여 수없이 넘어졌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나를 도와주고 섬겨주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나 스스로 오늘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덕을 세워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셋째,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4).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덕을 세울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교훈입니다.
성경은 인내와 위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성경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인내와 위로를 주시고 소망이 넘치게 해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온갖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경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맺힌 한을 풀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어려울 때에 절망 속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절망 속에서 절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희망 속에서 절망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어두움을 풀 수 없습니다. 밝음에서 어두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만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말씀과 기도 속에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은총을 구라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얼마 전 문화부 장관이요 이화여대 교수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기독교인이 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도, 예수님의 부활도, 구원도 부정하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회심케 만들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외손자의 과잉행동장애와 딸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평생 쌓아올린 지식과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일생동안 쌓아올린 인간의 학문의 세계에서는 점 하나만 찍으면 ‘님을 남으로’(하나님을 남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 인간의 어떠한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딸과 외손자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한 치료의 기적을 목격하면서 절대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사건은, 기적보다도 욥기를 읽으면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 천상의 언어를 얻었다고 한 부분입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욥기를 안 읽었다면 나는 세례를 못 받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서 나는 캄캄한 가슴에 작은 별 하나 담은 게 아니라, 저 하늘, 어둠 속에 붙박인 별들을 얻을 수 있게 됐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욥기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식이 해체되고 창조주와 구원의 주이시며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고 천상의 언어를 얻는 그 성스러운 곳! 그곳은 바로 성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그를 만나주셨고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으로 인간의 한계와 지식과 과학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손길과 영원한 세계를 발견하자 천상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유일한 텍스트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일한 텍스트입니다. 성경은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불행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버지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를 영접하고 환영하고 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할 것이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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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회 또한 똑똑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사회에서도 똘똘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비실거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강한 군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 곳곳에 크리스천들에게 ‘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표적인 말씀을 든다면 여호수아서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했습니다(수1:6). 신약 성경을 보면 에베소서 6장 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Be strong)’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3절을 보면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는 모두가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강해지는 통로는 기도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말씀과 기도와 믿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총칼로 무장한 백만 대군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강해져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1).
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교회는 각계각층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세상에 교회만큼 이질적인 공동체는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모이는 대부분의 단체는 어떤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취미를 중심으로 모이는 동호회, 동향인끼리 모이는 향우회, 종씨끼리 모이는 종친회, 같은 학교 출신끼리 모이는 동창회, 그리고 전우들끼리 모이는 전우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 유별난 해병전우회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구성원들이 쉽게 어울릴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적인 성향으로는 함께 어울릴 수 없고, 태생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 있는데, 믿음과 거룩한 사명, 그리고 사랑의 끈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하세♬
문제는 사랑과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차가 천차만별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있는 반면에 믿음이 약한 자도 있습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랑이 좀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명이 투철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약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강한 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앞 뒤가 꽉 막혀 있지 않습니다. 생각이 깊고 넓으며 이해심 또한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쉽게 불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쉽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쉽게 분내지 않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까다롭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 얽매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행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잘 비판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킵니다. 자기는 못하면서도 남의 약점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유치합니다. 잘 토라지고, 잘 삐치고, 쉽게 분냅니다. 의지가 약하고, 감정처리가 미숙합니다. 생각이 얇습니다. 교회에 이런 연약한 사람들이 많게 되면 바람 잘 날 없이 늘 시끄럽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어느 정도 해주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담당하다’는 짊어지다,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이사야서 53장 6절을 보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당신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이로 인해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담당하다’를 짐을 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보면 조롱하고 비웃고 정죄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짐을 지다’는 남의 실수를 내 실수로 생각하여, 이해하고, 믿고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 고통을 함께 하고, 슬픔을 함께 하는 것이 것입니다.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고난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죄 짐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죄 짐까지 져 줄 수 있을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남을 돕고 섬기고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약자에 대한 배려요 섬김입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강자는 약자를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일수록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약자를 섬기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남도 사는 길입니다.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썬다싱이 고통을 함께 나눈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썬다싱이 친구와 함께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얼어서 쓰러진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에 썬다싱은 함께 가던 친구에게 얼어서 쓰러진 사람을 돕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도 힘든데 어떻게 그를 업고 갈 수 있느냐며 먼저 가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썬다싱은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얼마 동안 가니 혼자 살겠다고 간 그 친구가 눈 속에 파 묻혀 죽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얼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가다가 보니 땀이 나고 온기가 생겨 썬다싱도 살고, 졸도하여 쓰러진 사람도 살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혼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게 되고, 남을 살리고자 하면 나도 살고 남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짐을 서로 져 주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우찌므라 간조는 본래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교회주의자가 된 것은 미국 유학 중에 자기 아내가 사소한 실수로 출교를 당한 데 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이런 사소한 죄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면 무슨 교회가 필요한가 하고 무교회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죄 짐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죄 짐을 져 줄 때 무겁던 죄 짐도 가벼워지고 작아져 없어집니다. 그러나 비난하고 정죄할 때 그 범죄는 더 커져서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넘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라면 마땅히 남의 약점을 비판하지 말고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땅히’란 단언가 중요합니다. 마땅히 하라는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b절을 읽겠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b).”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남의 행복과 기쁨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접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도우려면 자기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다 챙기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강자입니까? 약자입니까? 강자는 성숙한 사람이요 약자는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교육이란 성숙한 자가 미성숙한 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선생님이 학생을, 선배가 후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교육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배우는 학생으로 미성숙합니다. 또한 부모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분들은 미성숙합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초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미성숙하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하고, 섬김이 필요합니다.
한편 여러분은 미성숙한 사람일지라도 우리보다 미성숙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미성숙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연약한 자야, 나는 도움이 필요한 자야,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으시고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렘1:6,7). 여러분이 나는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는 한 일생동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고, 섬길 수 없고, 한 사람도 전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약하고, 부족하고, 어린 아린 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스스로 낮은 자존감을 버리고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돌보십시오. 우리가 우리는 스스로 부족하고 약하고 어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2,3).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선을 이루다’는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덕’이란 하나님 앞에서도 선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선하고, 이웃에 대해서도 선한 것, 이 세 관계가 합쳐져서 온전해질 때에 덕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득불 우선순위, priority가 있습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으면 이것은 아주 이상적입니다(I am OK, You are OK.)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느냐에 따라 덕이 나옵니다. 나의 유익을 버리고 너의 유익을 택하는 것이 덕입니다(I am not OK, You are OK.) 또 너에게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으면 그것은 최상입니다(You are OK, God is OK.).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부득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때 무엇을 택해야 합니까? 너보다 하나님을 택하는 것입니다(You are not OK, God is OK.). 이게 덕입니다. 이렇게 선택해나가는 것이 덕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을 보면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이고 덕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1:10a).”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6)”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덕이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의지적입니다. 따라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의지 주도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시기 위해 모든 비방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비방의 표징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주홍글씨에 나오는 주인공 헤스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여러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헤스터와 같이 죄를 짓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방과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방의 표적이 되셨고,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셨고, 채찍을 받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창에 허리를 찔리셨고, 피와 물을 다 쏟으셔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오셔서 그들을 징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절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멘.
바울 사도 또한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모든 비방을 다 받았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도 당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고전15:31). 이로 인해 많은 양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고후4:12).
우리는 연약하여 수없이 넘어졌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나를 도와주고 섬겨주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나 스스로 오늘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덕을 세워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셋째,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4).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덕을 세울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교훈입니다.
성경은 인내와 위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성경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인내와 위로를 주시고 소망이 넘치게 해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온갖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경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맺힌 한을 풀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어려울 때에 절망 속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절망 속에서 절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희망 속에서 절망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어두움을 풀 수 없습니다. 밝음에서 어두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만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말씀과 기도 속에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은총을 구라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얼마 전 문화부 장관이요 이화여대 교수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기독교인이 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도, 예수님의 부활도, 구원도 부정하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회심케 만들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외손자의 과잉행동장애와 딸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평생 쌓아올린 지식과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일생동안 쌓아올린 인간의 학문의 세계에서는 점 하나만 찍으면 ‘님을 남으로’(하나님을 남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 인간의 어떠한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딸과 외손자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한 치료의 기적을 목격하면서 절대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사건은, 기적보다도 욥기를 읽으면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 천상의 언어를 얻었다고 한 부분입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욥기를 안 읽었다면 나는 세례를 못 받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서 나는 캄캄한 가슴에 작은 별 하나 담은 게 아니라, 저 하늘, 어둠 속에 붙박인 별들을 얻을 수 있게 됐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욥기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식이 해체되고 창조주와 구원의 주이시며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고 천상의 언어를 얻는 그 성스러운 곳! 그곳은 바로 성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그를 만나주셨고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으로 인간의 한계와 지식과 과학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손길과 영원한 세계를 발견하자 천상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유일한 텍스트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일한 텍스트입니다. 성경은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불행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버지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를 영접하고 환영하고 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