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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14-18, 요절 15:16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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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가장 슬픈 것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는 것입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 가정의 대가 끊기는 것입니다.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반면에 가정에 아기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는 것은 집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가족이 기뻐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 또한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눅15:7).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로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는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직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은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로마 성도들을 칭찬하는 바울(14)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세우지 않은 교회는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도운 양 이외에는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또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누가 훌륭한 사람입니까?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하여 훌륭합니까? 훌륭한 사람이란 좋은 점을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남을 칭찬을 해 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칭찬은 돈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칭찬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케네스 블랜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주인공 웨스 킹슬리는 회사의 중역으로 회사와 가정에서 인간관계로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플로리다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우연히 씨 월드 해양관에 가서 범고래의 멋진 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3톤이나 되는 범고래가 저렇게 멋진 쇼를 할까”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범고래 조련사를 만나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조련사는 그에게 고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고래 반응이란 첫째로 범고래가 쇼를 멋지게 해냈을 때는 즉각적으로 칭찬하고, 둘째로 실수를 했을 때는 질책하는 대신에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며, 셋째로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격려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고래 반응’을 사용한다면 가정에서 존경받는 부모, 직장에서 성과 높은 비즈니스맨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책에서 가끔은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라고 언급합니다.
일본의 파동학자 에모도 마사로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에서,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고 했습니다. 물을 향해 ‘너를 죽여 버리겠다. 너를 증오한다’며 저주하면 물의 결정체가 흉악하게 깨어져서 아주 형편없이 되고, 결정체 가운데에 보기 흉한 구멍이 뚫리고, 파장이 날카롭게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물에게 ‘사랑해, 감사해’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게 되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다운 육각수를 이루고, 물은 아름다운 결정체로 부드럽게 바뀌고, 파장이 아름답게 규칙적으로 굴곡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주파수가 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이 없는 물도 미움을 받으면 결정체가 무너지고, 사랑을 받으면 활기차고, 아름다워진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심한 욕을 하게 되면 체내의 물은 어떤 형태로 될까요? 흉하고 무질서한 혼돈 속에 구멍이 뚫리고, 파괴적이 되어서 70%의 물이 결정을 잃게 될 것은 뻔합니다. 질서를 잃은 물은 병균의 침투에 저항력을 잃게 되고, 그 결과 온갖 질병의 서식처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감사합니다. 훌륭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당신이 최고입니다”라고 격려하고 칭찬하게 되면 아름다운 육각형 물이 되어 온 몸에 건강과 생명이 가득 차게 됩니다.
미국 버클리 대학 연구팀이 사랑과 칭찬에 대하여 실험을 했는데 그들은 흰쥐에게 세 종류의 방법으로 먹이를 주었습니다. 한 마리에게는 혼자서 실컷 먹도록 해주었고, 다섯 마리 쥐를 한꺼번에 모아 놓고 먹이를 줘서 다섯 마리가 서로 몸을 비벼가면서 먹게 했고, 마지막 쥐는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떠 먹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쥐는 뇌의 세포활동이 쇠퇴하여 뇌의 크기가 작아졌으며 6백 일을 살다가 죽었고, 다섯 마리가 함께 섞여 먹던 쥐는 뇌가 약간 커진 상태로 활동적이었으나 7백일을 살아 혼자 먹던 쥐보다는 백 일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쥐는 활발한 세포활동을 보이며 완전히 커진 뇌로 950일을 살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사랑과 칭찬과 관심을 받고 자란 쥐는 다른 쥐가 받을 수 없는 사랑의 에너지가 몸에 들어가 뇌세포의 성장 호르몬 생성을 자극하여 뇌세포가 증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남을 미워하고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침묵이 금이다.”, “과묵이 미덕이다”라고 침묵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만나면 좀 수다스럽게 서로 축복해주고, 서로 감사하고, 서로 기뻐하고,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칭찬해 주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책망보다 축복하고 칭찬해 주기 바랍니다. 이때 자녀들이 건강하고 축복된 자녀들로 자라게 됩니다.
둘째, 로마 성도들과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바울(15-18).
첫째로 구원의 은혜(15)
로마 성도들은 착하고, 성경 지식이 해박하며, 서로 권하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혜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로마 교회와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누고자 하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기 자신을 나는 복음의 원수였고, 복음의 훼방자였으며, 죄인의 괴수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인간 조건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사상과 히브리사상을 섭렵한 대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도 royal family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하나님은 바울을 아무 조건 없이 구원하셔서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는 이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일생 그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Amazing Grace! 찬송가 작시자인 죤 뉴톤은 과거 노예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깡패 두목으로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신앙 훈련을 받아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그가 커서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10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탔습니다. 뱃사람이 된 후로 그는 세상의 못된 짓을 다 배우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술을 즐기고 허랑방탕했습니다. 그는 노예선장이 되어 많은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술에 취해 장난삼아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뉴톤은 예배당의 맨 뒷좌석 구석에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그가 숙연해지면서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거만했던 그의 고개는 숙여지고, 드디어는 자기도 무르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날 그가 들은 설교는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말씀이 그의 심령에 부딪혀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는 그 날 이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82세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를 섬겼습니다. 뉴톤 목사님은 천국에 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생각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다음은 분명히 천국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없는 것이고, 그 다음은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와 그가 팔아넘겨 돈을 벌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영가에 맞춰서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405장)
둘째로 복음을 전하는 은혜(16)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전도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로 생각하여 전도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도를 은혜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은혜가 됩니까?
첫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6a).
16a절을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바울은 “이 은혜는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일군’은 노예나 머슴이 아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minister, 성직자, 장관이란 뜻입니다. 성직자나 장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 전한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보다 잘 난 사람을 제쳐두고, 나를 부르셔서 복음전하는 자로 사용하시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내 입술로 복음을 전하여 영원히 지옥 형벌에 타 죽을 죄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감사히 여겼습니다(롬11:31, 딤전1:12).
세상에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연약하고, 무능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되면 그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본 회퍼 목사님은 부르심 자체가 은혜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그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돈을 가진 그 자체가 은혜가 아닙니다. 그 돈이 하나님을 위해 쓰여질 때 은혜가 됩니다.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그 지위 자체가 아니라 은혜가 아닙니다. 그 지위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학문이 많은 사람 또한 그 학문 자체가 은혜가 아닙니다. 그 학문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때 은혜가 되고 귀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크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복음은 아무나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만이 전할 수 있는 큰 특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16b).
16b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어째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됩니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원수끼리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과 제물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28장 12,13절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영화롭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답게 하셨고, 이 제사장 직무를 아무나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이란 히브리어로는 코헨(Kohen)으로 ‘서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있는 성막에는 의자가 없어 제사장은 늘 서서 섬깁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섬기는 자입니다. 또한 라틴어로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다리 역할 즉, 중보자입니다. 이 직분은 다윗 같은 훌륭한 왕도 제사장 직무를 대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물을 자신이 드리다가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제사장 직분을 넘보다가는 큰 변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장 직분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과 같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만 제사장 직분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제사장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은 신령할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계5:10). 사도 요한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계1:6). 이를 볼 때 내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엄지를 쳐들고 외쳐보겠습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아멘.” 이 직분을 천사도 흠모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찬270장)♬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것과 주님께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양이나 소를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했습니까?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요,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제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 안에서 깨끗하게 되어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16c절을 읽겠습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성령님께서 추한 죄인들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딛3:5).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추한 죄인을 거룩한 주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영접하고 큰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절망과 미움으로 병든 마음이 희망과 기쁨으로 변합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꿈과 비전이 없던 사람이 미래의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추한 사람이 정결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됩니다. 전도의 열매가 곧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었고, 이를 위하여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전도는 신앙생활에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셋째는 전도는 성령의 많은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17,18).
17,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능력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많은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체험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고, 그 다음 절, 17절을 보면 능력이 함께 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 전하는 곳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이적은 모두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먼 자가 눈을 떴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들린 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랑하고 간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랑과 세상 이야기, 그리고, 남의 흉이나 보게 됩니다. 반면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니 매사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신 일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합니다. 그러니 믿음이 자라게 되고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캠퍼스와 직장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리기를 바랍니다. 전도할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전도할 때 복을 받습니다. 전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전도할 때 모든 신령한 은혜가 부어집니다.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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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가장 슬픈 것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는 것입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 가정의 대가 끊기는 것입니다.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반면에 가정에 아기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는 것은 집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가족이 기뻐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 또한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눅15:7).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로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는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직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은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로마 성도들을 칭찬하는 바울(14)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세우지 않은 교회는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도운 양 이외에는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또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누가 훌륭한 사람입니까?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하여 훌륭합니까? 훌륭한 사람이란 좋은 점을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남을 칭찬을 해 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칭찬은 돈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칭찬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케네스 블랜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주인공 웨스 킹슬리는 회사의 중역으로 회사와 가정에서 인간관계로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플로리다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우연히 씨 월드 해양관에 가서 범고래의 멋진 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3톤이나 되는 범고래가 저렇게 멋진 쇼를 할까”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범고래 조련사를 만나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조련사는 그에게 고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고래 반응이란 첫째로 범고래가 쇼를 멋지게 해냈을 때는 즉각적으로 칭찬하고, 둘째로 실수를 했을 때는 질책하는 대신에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며, 셋째로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격려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고래 반응’을 사용한다면 가정에서 존경받는 부모, 직장에서 성과 높은 비즈니스맨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책에서 가끔은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라고 언급합니다.
일본의 파동학자 에모도 마사로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에서,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고 했습니다. 물을 향해 ‘너를 죽여 버리겠다. 너를 증오한다’며 저주하면 물의 결정체가 흉악하게 깨어져서 아주 형편없이 되고, 결정체 가운데에 보기 흉한 구멍이 뚫리고, 파장이 날카롭게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물에게 ‘사랑해, 감사해’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게 되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다운 육각수를 이루고, 물은 아름다운 결정체로 부드럽게 바뀌고, 파장이 아름답게 규칙적으로 굴곡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주파수가 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이 없는 물도 미움을 받으면 결정체가 무너지고, 사랑을 받으면 활기차고, 아름다워진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심한 욕을 하게 되면 체내의 물은 어떤 형태로 될까요? 흉하고 무질서한 혼돈 속에 구멍이 뚫리고, 파괴적이 되어서 70%의 물이 결정을 잃게 될 것은 뻔합니다. 질서를 잃은 물은 병균의 침투에 저항력을 잃게 되고, 그 결과 온갖 질병의 서식처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감사합니다. 훌륭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당신이 최고입니다”라고 격려하고 칭찬하게 되면 아름다운 육각형 물이 되어 온 몸에 건강과 생명이 가득 차게 됩니다.
미국 버클리 대학 연구팀이 사랑과 칭찬에 대하여 실험을 했는데 그들은 흰쥐에게 세 종류의 방법으로 먹이를 주었습니다. 한 마리에게는 혼자서 실컷 먹도록 해주었고, 다섯 마리 쥐를 한꺼번에 모아 놓고 먹이를 줘서 다섯 마리가 서로 몸을 비벼가면서 먹게 했고, 마지막 쥐는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떠 먹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쥐는 뇌의 세포활동이 쇠퇴하여 뇌의 크기가 작아졌으며 6백 일을 살다가 죽었고, 다섯 마리가 함께 섞여 먹던 쥐는 뇌가 약간 커진 상태로 활동적이었으나 7백일을 살아 혼자 먹던 쥐보다는 백 일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쥐는 활발한 세포활동을 보이며 완전히 커진 뇌로 950일을 살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사랑과 칭찬과 관심을 받고 자란 쥐는 다른 쥐가 받을 수 없는 사랑의 에너지가 몸에 들어가 뇌세포의 성장 호르몬 생성을 자극하여 뇌세포가 증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남을 미워하고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침묵이 금이다.”, “과묵이 미덕이다”라고 침묵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만나면 좀 수다스럽게 서로 축복해주고, 서로 감사하고, 서로 기뻐하고,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칭찬해 주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책망보다 축복하고 칭찬해 주기 바랍니다. 이때 자녀들이 건강하고 축복된 자녀들로 자라게 됩니다.
둘째, 로마 성도들과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바울(15-18).
첫째로 구원의 은혜(15)
로마 성도들은 착하고, 성경 지식이 해박하며, 서로 권하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혜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로마 교회와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누고자 하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기 자신을 나는 복음의 원수였고, 복음의 훼방자였으며, 죄인의 괴수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인간 조건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사상과 히브리사상을 섭렵한 대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도 royal family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하나님은 바울을 아무 조건 없이 구원하셔서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는 이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일생 그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Amazing Grace! 찬송가 작시자인 죤 뉴톤은 과거 노예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깡패 두목으로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신앙 훈련을 받아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그가 커서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10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탔습니다. 뱃사람이 된 후로 그는 세상의 못된 짓을 다 배우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술을 즐기고 허랑방탕했습니다. 그는 노예선장이 되어 많은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술에 취해 장난삼아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뉴톤은 예배당의 맨 뒷좌석 구석에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그가 숙연해지면서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거만했던 그의 고개는 숙여지고, 드디어는 자기도 무르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날 그가 들은 설교는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말씀이 그의 심령에 부딪혀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는 그 날 이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82세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를 섬겼습니다. 뉴톤 목사님은 천국에 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생각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다음은 분명히 천국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없는 것이고, 그 다음은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와 그가 팔아넘겨 돈을 벌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영가에 맞춰서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405장)
둘째로 복음을 전하는 은혜(16)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전도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로 생각하여 전도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도를 은혜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은혜가 됩니까?
첫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6a).
16a절을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바울은 “이 은혜는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일군’은 노예나 머슴이 아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minister, 성직자, 장관이란 뜻입니다. 성직자나 장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 전한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보다 잘 난 사람을 제쳐두고, 나를 부르셔서 복음전하는 자로 사용하시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내 입술로 복음을 전하여 영원히 지옥 형벌에 타 죽을 죄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감사히 여겼습니다(롬11:31, 딤전1:12).
세상에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연약하고, 무능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되면 그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본 회퍼 목사님은 부르심 자체가 은혜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그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돈을 가진 그 자체가 은혜가 아닙니다. 그 돈이 하나님을 위해 쓰여질 때 은혜가 됩니다.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그 지위 자체가 아니라 은혜가 아닙니다. 그 지위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학문이 많은 사람 또한 그 학문 자체가 은혜가 아닙니다. 그 학문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때 은혜가 되고 귀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크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복음은 아무나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만이 전할 수 있는 큰 특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16b).
16b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어째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됩니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원수끼리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과 제물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28장 12,13절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영화롭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답게 하셨고, 이 제사장 직무를 아무나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이란 히브리어로는 코헨(Kohen)으로 ‘서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있는 성막에는 의자가 없어 제사장은 늘 서서 섬깁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섬기는 자입니다. 또한 라틴어로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다리 역할 즉, 중보자입니다. 이 직분은 다윗 같은 훌륭한 왕도 제사장 직무를 대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물을 자신이 드리다가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제사장 직분을 넘보다가는 큰 변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장 직분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과 같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만 제사장 직분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제사장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은 신령할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계5:10). 사도 요한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계1:6). 이를 볼 때 내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엄지를 쳐들고 외쳐보겠습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아멘.” 이 직분을 천사도 흠모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찬270장)♬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것과 주님께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양이나 소를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했습니까?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요,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제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 안에서 깨끗하게 되어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16c절을 읽겠습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성령님께서 추한 죄인들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딛3:5).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추한 죄인을 거룩한 주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영접하고 큰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절망과 미움으로 병든 마음이 희망과 기쁨으로 변합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꿈과 비전이 없던 사람이 미래의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추한 사람이 정결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됩니다. 전도의 열매가 곧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었고, 이를 위하여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전도는 신앙생활에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셋째는 전도는 성령의 많은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17,18).
17,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능력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많은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체험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고, 그 다음 절, 17절을 보면 능력이 함께 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 전하는 곳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이적은 모두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먼 자가 눈을 떴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들린 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랑하고 간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랑과 세상 이야기, 그리고, 남의 흉이나 보게 됩니다. 반면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니 매사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신 일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합니다. 그러니 믿음이 자라게 되고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캠퍼스와 직장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리기를 바랍니다. 전도할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전도할 때 복을 받습니다. 전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전도할 때 모든 신령한 은혜가 부어집니다.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