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느헤미야 (8:1-12, 요절, 8:3)
말씀으로 부흥을 사모하라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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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3대 부흥회를 들자면 사무엘상 7장 선지자 사무엘의 미스바 성회와 오늘 말씀 느헤미야 시대의 수문 앞 광장 성회,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회를 들 수 있습니다. 미스바 성회는 기도의 부흥회요, 오순절 성회는 성령부흥회라면, 수문 앞 광장의 성회는 말씀사경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거룩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어 예루살렘 도시가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성벽이 재건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내면의 재건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재건 없이 새로운 내일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성벽이 재건된 후 수문(Water Gate) 광장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의 역사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부흥은 말씀에 대한 새로운 자세, 다시 말하여 말씀에 대한 권위, 말씀에 대한 열망,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이런 말씀의 부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부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1-6).
그들은 밤낮 없이 52일간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고생도 많이 하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을 왕성하였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심령의 부흥이 필요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고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수문 앞 광장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게 한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수문 앞 광장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은혜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손에는 삽을 들고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열심히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밤낮 돌을 나르고 흙을 이기고 등짐을 지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드디어 52일 만에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제 그들이 실컷 놀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성을 재건했으니 축제를 열자고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52일간 성벽을 재건하느냐고 고생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축제 한번 멋지게 벌입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히 에스라 학사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 사본이 희귀했기 때문에 개인 소장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적으로 모여 말씀을 읽고 들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이 준비된 학사였습니다. 그들이 요청하자 그는 즉시 칠월 일일에 율법 책을 가지고 이스라엘 앞에 섰습니다. 칠월 일일은 정월 초하루로 나팔 절입니다. 3절을 보면 에스라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 책을 읽었습니다. 에스라는 최소한 6시간 동안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성경을 읽은 정도가 아니라, 말씀을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말씀을 해석해주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자세가 어떻습니까? 그들은 6시간 동안 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6시간은 그만 두고 1시간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도 때론 지루하여 다리를 꼬고 몸을 비비 꼽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서 장장 6시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꼼짝하지 않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듣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총동원하여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말씀에 귀를 기울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경을 읽기시작하자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성경이 읽혀지기 시작할 때 온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말씀의 권위 앞에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때,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6).”
하나님 앞에 그들의 영혼을 굴복시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의 권위가 존중되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그들이 어느 정도 성경을 읽는 일에 몰두했는지, 6시간 동안이나 여호와의 율법을 청종하는 백성들의 자세를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듣고 있는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느 정도 성경을 읽고 사모하는지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보살피시고 복을 주는지 아십니까? 이사야 66장 2절을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애통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보살피려니와)” 말씀을 사모하는 갈급한 심령이 있고, 말씀 앞에서 떠는 자를 기억하시고 보살펴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읽기는 모든 축복의 시작입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부흥의 시작입니다. 계시록 1장 3절은 이렇게 기록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말씀을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사모했습니다. 얼마나 사모했는지 아십니까?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 크리스천들을 Bible Lover라고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듣기를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1907년에 평양에서 성경사경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에서 이불 짐과 먹을 것을 싸들고 평양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지금도 만일 목포에서 평양을 가려면 기차로 7시간 이상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 전 평양과 목포가 얼마나 먼 길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듣고 싶어서 목포에서 평양까지 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놀라지도 않네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 열매가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1907년의 부흥 운동은 성경사경회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사경회,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 거기에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요즘 식으로 뒤집어졌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미국 한 여자 선교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도,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불결과 음욕, 도적, 거짓, 질투, 부끄러움이 없이 사람의 힘이 무엇이든 이런 고백을 강제할 수 없을 터이다 많은 교인들은 얼굴을 마루에 가리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 우리의 소망과 승리의 삶을 위해서 성경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진정한 축복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이 타는 갈증, 그 목마름,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내 삶이 이 진리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성경을 일주일간 책상에 놓았다가 먼지 묻은 성경을 들고 주일에 들고 오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교회에 놓고 갔다가 주일 예배 때에 펼쳐보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차속에 놓고 다니다가 주일에 들고 오지는 않는지요? 성경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경외하십시오. 말씀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틈틈이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집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일주일에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단 하루만이라도 함께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둘째,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7,8).
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고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해와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무려 6번이나 이 깨달음이라는 의미, 영어로는 understanding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2, 3절에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두 번씩이나 알아들을만한(understand) 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 8절에 보면 여러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13절에 보면 밝히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에스라가 읽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목적으로 집중하여 들었습니다. 에스라 또한 백성들이 말씀을 다 깨달을 때가지 말씀을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당시의 영적 지도자들의 중요한 소명은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변함없이 설교자의 소명이 바로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설교 스타일 중에 강해설교를 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inductive Bible study를 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즈음 이단들이 한국 교회에 들어와 혼탁하게 하는 것도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 부족에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자들은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 그 뜻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씀을 듣고 율법을 다 깨달았습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그러면 왜 말씀의 깨달음이 중요합니까? 이는 말씀을 깨달은 만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그 만큼만 그 말씀을 붙잡고 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말씀을 많이 읽어도 깨달음이 없으면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성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어도 우리가 그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게 되면 그 음식은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먹고 소화하지 못하고 다 토해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용할양식이 있습니다. 일용할양식의 본문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일용할양식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메시지를 집중하여 들으십시오. 메시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주일 메시지를 듣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말고 진지하게 경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적어보십시오. 그 묵상한 것을 서로 나누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달라질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가 모여서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자 하는 것보다 다과를 들면서 삶을 나누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혹독하게 게 모임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마게팅 전략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일찍이 토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기쁨을 버리고 영원한 영적인 평안을 얻어라.” 잠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귀를 간지럽게 하는 말들은 그 순간뿐입니다. 말씀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씀 속에서 배어나오는 그런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방법대로 살기보다 세상과 충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여서 삶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앞서야 할 것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으로 자기가 깨지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삶이 변화되어 자신이 내적으로 부흥하게 되고, 그 삶을 통해 가정과 이웃과 직장과 학교와 민족이 변화되고 더 나아가 세상이 변하게 됩니다.
셋째,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9-13).
인간은 지정의의 존재입니다.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지적인 영역이라면, 성경 말씀에 대한 감격은 정적인 영역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행동은 의지적인 영역입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빠져있으면 균형 잡힌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이 없고 지만 강조하면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지가 없고 정만 있으면 붕 떠다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지와 정이 없고 의만 강조되면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백성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그들의 신앙은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말씀에 정적으로 반응했고 의지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눈물과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9a절은 보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서는 먼저 울었습니다. 왜 그들이 울었을까요? 말씀에 감동된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전체의 문맥을 읽어보면 이 눈물은 그들의 죄에 대한 말씀의 지적 앞에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터치되었을 때 그들은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듣고 깨달았을 때에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의 성전이 파괴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들의 죄로 인해 성벽이 무너졌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의 포로가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말씀을 듣고 성벽을 건축하고자 했지만 이방인들을 두려워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죄의 지적 앞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실로 Water Gate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듣고 내 죄로 인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민족의 죄로 인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운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자기 죄로 인한 슬픈 눈물은 회개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서 기뻐했습니다. 10, 12절을 보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그들은 말씀은 듣고 울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날은 여호와의 성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성일은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날이요.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날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날입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권면으로 그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을 때 기쁨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내 죄로 인해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슬퍼하고 울기만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울기만 하면 자신에 대한 연민과 절망에 빠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죄를 깨닫고 슬퍼하고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와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신 은혜의 하나님, 사단의 방해 공작 중에도 성을 재건하게 하신 기적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아멘.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해 종일 신음하고 뼈가 쇠하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그를 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침상이 젖기까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허물을 자복하고 죄를 숨기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그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그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32:5,6,12).”
그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함으로써 홍수의 심판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에 눈물과 기쁨으로 말씀을 읽고 받으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필요한 때라고 느끼지 않으시는지요?
둘째로, 그들은 삶이 변하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지적으로 반응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그들은 축복을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체험한 후에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성도가 한 형제임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누고, 축복을 나누었습니다(행2:42d, 46). 그들은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요일3:16).
그리고 이어지는 느헤미야 9장 이하를 읽어보면 그들이 듣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들이 보여준 궁극적인 반응은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의 비전이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에스라의 결심은 말씀에 대한 준행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이 성벽재건이 하드웨어이었다면, 에스라의 비전은 마음의 재건, 소프트웨어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먼저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은 역사를 바꾸는 시작이요 원동력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인간은 ‘언어 재능’을 가진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말속에는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로 인해 화를 자초하는 사례들이 흔히 접하곤 합니다. 이처럼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로 한 가정의 운명이, 때로는 한 민족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런 힘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어떠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선포합니다. 동일한 말씀으로 만물이 보존되고 지탱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거듭난 존재가 됩니다.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랍니다. 여러분과 저안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에 반응하여 이 시대의 부흥의 씨앗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 말씀에 대한 감격,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부흥을 사모하라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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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3대 부흥회를 들자면 사무엘상 7장 선지자 사무엘의 미스바 성회와 오늘 말씀 느헤미야 시대의 수문 앞 광장 성회,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회를 들 수 있습니다. 미스바 성회는 기도의 부흥회요, 오순절 성회는 성령부흥회라면, 수문 앞 광장의 성회는 말씀사경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거룩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어 예루살렘 도시가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성벽이 재건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내면의 재건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재건 없이 새로운 내일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성벽이 재건된 후 수문(Water Gate) 광장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의 역사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부흥은 말씀에 대한 새로운 자세, 다시 말하여 말씀에 대한 권위, 말씀에 대한 열망,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이런 말씀의 부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부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1-6).
그들은 밤낮 없이 52일간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고생도 많이 하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을 왕성하였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심령의 부흥이 필요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고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수문 앞 광장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게 한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수문 앞 광장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은혜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손에는 삽을 들고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열심히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밤낮 돌을 나르고 흙을 이기고 등짐을 지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드디어 52일 만에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제 그들이 실컷 놀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성을 재건했으니 축제를 열자고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52일간 성벽을 재건하느냐고 고생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축제 한번 멋지게 벌입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히 에스라 학사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 사본이 희귀했기 때문에 개인 소장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적으로 모여 말씀을 읽고 들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이 준비된 학사였습니다. 그들이 요청하자 그는 즉시 칠월 일일에 율법 책을 가지고 이스라엘 앞에 섰습니다. 칠월 일일은 정월 초하루로 나팔 절입니다. 3절을 보면 에스라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 책을 읽었습니다. 에스라는 최소한 6시간 동안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성경을 읽은 정도가 아니라, 말씀을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말씀을 해석해주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자세가 어떻습니까? 그들은 6시간 동안 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6시간은 그만 두고 1시간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도 때론 지루하여 다리를 꼬고 몸을 비비 꼽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서 장장 6시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꼼짝하지 않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듣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총동원하여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말씀에 귀를 기울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경을 읽기시작하자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성경이 읽혀지기 시작할 때 온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말씀의 권위 앞에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때,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6).”
하나님 앞에 그들의 영혼을 굴복시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의 권위가 존중되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그들이 어느 정도 성경을 읽는 일에 몰두했는지, 6시간 동안이나 여호와의 율법을 청종하는 백성들의 자세를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듣고 있는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느 정도 성경을 읽고 사모하는지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보살피시고 복을 주는지 아십니까? 이사야 66장 2절을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애통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보살피려니와)” 말씀을 사모하는 갈급한 심령이 있고, 말씀 앞에서 떠는 자를 기억하시고 보살펴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읽기는 모든 축복의 시작입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부흥의 시작입니다. 계시록 1장 3절은 이렇게 기록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말씀을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사모했습니다. 얼마나 사모했는지 아십니까?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 크리스천들을 Bible Lover라고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듣기를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1907년에 평양에서 성경사경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에서 이불 짐과 먹을 것을 싸들고 평양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지금도 만일 목포에서 평양을 가려면 기차로 7시간 이상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 전 평양과 목포가 얼마나 먼 길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듣고 싶어서 목포에서 평양까지 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놀라지도 않네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 열매가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1907년의 부흥 운동은 성경사경회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사경회,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 거기에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요즘 식으로 뒤집어졌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미국 한 여자 선교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도,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불결과 음욕, 도적, 거짓, 질투, 부끄러움이 없이 사람의 힘이 무엇이든 이런 고백을 강제할 수 없을 터이다 많은 교인들은 얼굴을 마루에 가리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 우리의 소망과 승리의 삶을 위해서 성경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진정한 축복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이 타는 갈증, 그 목마름,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내 삶이 이 진리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성경을 일주일간 책상에 놓았다가 먼지 묻은 성경을 들고 주일에 들고 오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교회에 놓고 갔다가 주일 예배 때에 펼쳐보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차속에 놓고 다니다가 주일에 들고 오지는 않는지요? 성경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경외하십시오. 말씀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틈틈이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집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일주일에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단 하루만이라도 함께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둘째,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7,8).
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고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해와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무려 6번이나 이 깨달음이라는 의미, 영어로는 understanding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2, 3절에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두 번씩이나 알아들을만한(understand) 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 8절에 보면 여러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13절에 보면 밝히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에스라가 읽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목적으로 집중하여 들었습니다. 에스라 또한 백성들이 말씀을 다 깨달을 때가지 말씀을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당시의 영적 지도자들의 중요한 소명은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변함없이 설교자의 소명이 바로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설교 스타일 중에 강해설교를 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inductive Bible study를 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즈음 이단들이 한국 교회에 들어와 혼탁하게 하는 것도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 부족에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자들은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 그 뜻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씀을 듣고 율법을 다 깨달았습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그러면 왜 말씀의 깨달음이 중요합니까? 이는 말씀을 깨달은 만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그 만큼만 그 말씀을 붙잡고 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말씀을 많이 읽어도 깨달음이 없으면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성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어도 우리가 그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게 되면 그 음식은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먹고 소화하지 못하고 다 토해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용할양식이 있습니다. 일용할양식의 본문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일용할양식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메시지를 집중하여 들으십시오. 메시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주일 메시지를 듣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말고 진지하게 경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적어보십시오. 그 묵상한 것을 서로 나누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달라질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가 모여서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자 하는 것보다 다과를 들면서 삶을 나누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혹독하게 게 모임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마게팅 전략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일찍이 토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기쁨을 버리고 영원한 영적인 평안을 얻어라.” 잠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귀를 간지럽게 하는 말들은 그 순간뿐입니다. 말씀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씀 속에서 배어나오는 그런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방법대로 살기보다 세상과 충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여서 삶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앞서야 할 것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으로 자기가 깨지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삶이 변화되어 자신이 내적으로 부흥하게 되고, 그 삶을 통해 가정과 이웃과 직장과 학교와 민족이 변화되고 더 나아가 세상이 변하게 됩니다.
셋째,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9-13).
인간은 지정의의 존재입니다.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지적인 영역이라면, 성경 말씀에 대한 감격은 정적인 영역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행동은 의지적인 영역입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빠져있으면 균형 잡힌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이 없고 지만 강조하면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지가 없고 정만 있으면 붕 떠다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지와 정이 없고 의만 강조되면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백성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그들의 신앙은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말씀에 정적으로 반응했고 의지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눈물과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9a절은 보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서는 먼저 울었습니다. 왜 그들이 울었을까요? 말씀에 감동된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전체의 문맥을 읽어보면 이 눈물은 그들의 죄에 대한 말씀의 지적 앞에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터치되었을 때 그들은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듣고 깨달았을 때에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의 성전이 파괴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들의 죄로 인해 성벽이 무너졌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의 포로가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말씀을 듣고 성벽을 건축하고자 했지만 이방인들을 두려워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죄의 지적 앞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실로 Water Gate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듣고 내 죄로 인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민족의 죄로 인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운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자기 죄로 인한 슬픈 눈물은 회개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서 기뻐했습니다. 10, 12절을 보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그들은 말씀은 듣고 울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날은 여호와의 성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성일은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날이요.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날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날입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권면으로 그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을 때 기쁨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내 죄로 인해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슬퍼하고 울기만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울기만 하면 자신에 대한 연민과 절망에 빠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죄를 깨닫고 슬퍼하고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와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신 은혜의 하나님, 사단의 방해 공작 중에도 성을 재건하게 하신 기적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아멘.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해 종일 신음하고 뼈가 쇠하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그를 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침상이 젖기까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허물을 자복하고 죄를 숨기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그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그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32:5,6,12).”
그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함으로써 홍수의 심판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에 눈물과 기쁨으로 말씀을 읽고 받으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필요한 때라고 느끼지 않으시는지요?
둘째로, 그들은 삶이 변하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지적으로 반응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그들은 축복을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체험한 후에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성도가 한 형제임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누고, 축복을 나누었습니다(행2:42d, 46). 그들은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요일3:16).
그리고 이어지는 느헤미야 9장 이하를 읽어보면 그들이 듣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들이 보여준 궁극적인 반응은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의 비전이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에스라의 결심은 말씀에 대한 준행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이 성벽재건이 하드웨어이었다면, 에스라의 비전은 마음의 재건, 소프트웨어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먼저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은 역사를 바꾸는 시작이요 원동력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인간은 ‘언어 재능’을 가진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말속에는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로 인해 화를 자초하는 사례들이 흔히 접하곤 합니다. 이처럼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로 한 가정의 운명이, 때로는 한 민족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런 힘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어떠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선포합니다. 동일한 말씀으로 만물이 보존되고 지탱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거듭난 존재가 됩니다.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랍니다. 여러분과 저안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에 반응하여 이 시대의 부흥의 씨앗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 말씀에 대한 감격,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