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2007년 성탄 메시지 제 4 강 (마태복음 1:18-25, 요절 1:23)
임마누엘 하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
오늘 말씀은 마태에게 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마태의 성탄 메시지의 주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입니다. 이는 마태의 신앙 간증입니다. 마태는 세리출신입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죄인과 함께 3대 죄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세리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며 영광스러운 독생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성탄 메시지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를 전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교제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죽음과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창3:24,롬6:23,히9:27,계21:8).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지만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십니다(사7:14,삼하7:12-16). 때가 되자 하나님은 마침내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마1:16-1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빌2:6,골1:15,16).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엡4:6).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통치하시고 지키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롬1:3,눅2:7,마1:23,사7:14).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눅1:69).
누가복음 1장 69절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 오셨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신33:17). 예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힘이십니다. 예수님은 권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눅1:71).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어두운 세상을 통치하는 하늘의 악한 영들입니다(엡6:12). 하늘의 악한 영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하늘의 악한 영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늘의 악한 영들은 교회를 공격하여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립니다(슥1:18). 계시록 13장 1절을 보면 악한 영은 얼굴이 7개요 뿔이 10개로, 4방 8방 10방으로 공격합니다. 악한 영은 정욕의 뿔로, 불신의 뿔로, 교만의 뿔로, 두려움의 뿔로, 염려의 뿔로, 의심의 뿔로, 분노의 뿔로, 시기심의 뿔로, 미움의 뿔로, 탐욕의 뿔로, 운명과 패배주의 뿔로 사방팔방으로 정신없이 찔러 넘어뜨립니다.
사람이 교만의 뿔에 찔리면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의 뿔에 찔리면 노이로제에 걸리고, 결국 정신분열증으로 치닫게 됩니다. 사람이 운명주의 뿔에 찔리면 남을 탓하다가 결국 인격과 영혼이 파괴되어 쓸모없게 됩니다. 사람이 탐심의 뿔에 찔리면 돌아버립니다. 사람이 의심의 뿔에 찔리면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 심령이 황폐화 됩니다. 사람이 분노의 뿔에 찔리면 폭력으로 나타나고 난폭해집니다. 사람이 음란과 정욕의 뿔에 찔리면 가정이 무너지게 되고, 새벽이슬 같은 청순한 청소년들이 시름시름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뿔로 공격하는 사단의 뿔을 제압할 수 있는 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를 미워하는 악한 영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불치의 병도 치유됩니다. 우리가 힘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사단과 악한 영들이 정복됩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원망이 감사로, 슬픔이 기쁨으로, 분노가 용서로, 불행이 행복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무기력이 기력으로, 낙담이 낙관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공허가 충만으로, 조금함이 인내로, 부정이 긍정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오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눅1:78.79).
누가복음 1장 78a,79절을 보겠습니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예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 돋는 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고 심장이 박동합니다. 희망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돋는 해를 보기 위해 동해안 정동진을 찾습니다. 돋는 해가 임하는 순간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이와 같이 돋는 해,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 어두움이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돋는 해가 임할 때, 모든 길이 드러나듯이, 돋는 해,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참된 길이 보입니다. 돋는 해는 에너지의 원천으로서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햇빛을 받지 못한 식물들은 누렇게 뜨다가 햇빛을 받는 순간 싱싱하게 살아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죽은 영혼들을 소생시킵니다. 돋는 해, 예수님에게로 향할 때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을 바라본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돋는 해, 예수님은 치료의 광선이 되셔서 더러운 균을 박멸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희망을 주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겉모습은 모두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속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 다르게 부유치 못한 가정의 형편 때문에,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부모들에게 사랑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숨은 죄와 이로 인한 죄의식 때문에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생각이 어둡고, 마음이 어둡습니다. 그러다보니 얼굴 표정 또한 어둡습니다.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평화와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하게 웃지 못합니다. 밝은 자화상을 갖지 못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돋는 해, 예수님께로 가면 마음속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밝은 자화상을 갖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마1:21).
21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입니다. 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인간성과 영혼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회를 부패시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순수하고 진실 된 사랑을 하고 또 그러한 사랑을 받고자 합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것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잔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전염됩니다. 그래서 죄는 나 한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가인에게 미치고 마침내 온 세상에 퍼져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죄는 독약을 바른 사탕과 같아서 달콤한 쾌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발을 디뎌놓으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거짓되게 하고, 추하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죄는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죽음은 육신의 죽음과 영적 죽음 모두를 포함합니다. 죽음은 볼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죄를 부분적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17).” 새사람으로 거듭나면 세상이 달라 보이게 됩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고전15:4). 이로 인해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엡2:6). 예수님은 때가 되면 천사들의 승리의 나팔과 함께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때에 먼저 무덤에 갇힌 성도들이 부활합니다. 이 때 무덤이 열리는 소리로 온 산하가 진동하게 됩니다. 또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때 우리는 사모하고 사모하던 예수님, 빛나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은 주와 복음 때문에 당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22-25).
마태복음 1장 22,23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B.C. 8세기경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친히 징조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시던 예루살렘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강대국이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보다 강대국인 앗수르를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왕하16:7).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머리를 의지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권세를 의지하고, 자기 사람이 외모를 의지하고, 자기 실력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는 유다를 징계하고 외면하셔야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고 도우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낙심될 때에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린아이는 혼자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합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다 보면 때로 외롭고 고독하고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지식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특징은 고독입니다. 현대인들은 컴퓨터라는 비대면, 익명성, 다시 말해 비 인격체인 컴퓨터로 하루를 출발하고 하루를 마칩니다. 그리고 치열한 생존경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옆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들로 인해 생기는 질병이 정신질환, 특히 우울증입니다. 이런 고독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독하고 답답할 때에 따뜻한 대화를 오갈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다니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보호하여 주시니 더 이상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래에 대해서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우리가 일 년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를 모든 사고의 위험에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죄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어 믿음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쓰러질 때마다 힘을 주셨습니다.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셨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를 주셨습니다. 물질이 필요할 때 물질을 주셨습니다. 쉼이 필요할 때 쉼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필요할 때 말씀을 주셨습니다. 섬김이 필요할 때 섬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과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마다 주님은 내 편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생명 구원의 역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금년 한 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 제가 무엇이건데 저와 함께 하셔서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주시나이까? 주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아멘.”
임마누엘 하나님은 소망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2008년에도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슬픔을 이기고 운명을 이기고 고독을 이기고 죄의 소욕을 이기고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
오늘 말씀은 마태에게 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마태의 성탄 메시지의 주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입니다. 이는 마태의 신앙 간증입니다. 마태는 세리출신입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죄인과 함께 3대 죄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세리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며 영광스러운 독생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성탄 메시지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를 전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교제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죽음과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창3:24,롬6:23,히9:27,계21:8).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지만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십니다(사7:14,삼하7:12-16). 때가 되자 하나님은 마침내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마1:16-1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빌2:6,골1:15,16).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엡4:6).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통치하시고 지키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롬1:3,눅2:7,마1:23,사7:14).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눅1:69).
누가복음 1장 69절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 오셨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신33:17). 예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힘이십니다. 예수님은 권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눅1:71).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어두운 세상을 통치하는 하늘의 악한 영들입니다(엡6:12). 하늘의 악한 영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하늘의 악한 영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늘의 악한 영들은 교회를 공격하여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립니다(슥1:18). 계시록 13장 1절을 보면 악한 영은 얼굴이 7개요 뿔이 10개로, 4방 8방 10방으로 공격합니다. 악한 영은 정욕의 뿔로, 불신의 뿔로, 교만의 뿔로, 두려움의 뿔로, 염려의 뿔로, 의심의 뿔로, 분노의 뿔로, 시기심의 뿔로, 미움의 뿔로, 탐욕의 뿔로, 운명과 패배주의 뿔로 사방팔방으로 정신없이 찔러 넘어뜨립니다.
사람이 교만의 뿔에 찔리면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의 뿔에 찔리면 노이로제에 걸리고, 결국 정신분열증으로 치닫게 됩니다. 사람이 운명주의 뿔에 찔리면 남을 탓하다가 결국 인격과 영혼이 파괴되어 쓸모없게 됩니다. 사람이 탐심의 뿔에 찔리면 돌아버립니다. 사람이 의심의 뿔에 찔리면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 심령이 황폐화 됩니다. 사람이 분노의 뿔에 찔리면 폭력으로 나타나고 난폭해집니다. 사람이 음란과 정욕의 뿔에 찔리면 가정이 무너지게 되고, 새벽이슬 같은 청순한 청소년들이 시름시름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뿔로 공격하는 사단의 뿔을 제압할 수 있는 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를 미워하는 악한 영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불치의 병도 치유됩니다. 우리가 힘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사단과 악한 영들이 정복됩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원망이 감사로, 슬픔이 기쁨으로, 분노가 용서로, 불행이 행복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무기력이 기력으로, 낙담이 낙관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공허가 충만으로, 조금함이 인내로, 부정이 긍정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오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눅1:78.79).
누가복음 1장 78a,79절을 보겠습니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예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 돋는 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고 심장이 박동합니다. 희망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돋는 해를 보기 위해 동해안 정동진을 찾습니다. 돋는 해가 임하는 순간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이와 같이 돋는 해,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 어두움이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돋는 해가 임할 때, 모든 길이 드러나듯이, 돋는 해,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참된 길이 보입니다. 돋는 해는 에너지의 원천으로서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햇빛을 받지 못한 식물들은 누렇게 뜨다가 햇빛을 받는 순간 싱싱하게 살아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죽은 영혼들을 소생시킵니다. 돋는 해, 예수님에게로 향할 때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을 바라본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돋는 해, 예수님은 치료의 광선이 되셔서 더러운 균을 박멸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희망을 주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겉모습은 모두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속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 다르게 부유치 못한 가정의 형편 때문에,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부모들에게 사랑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숨은 죄와 이로 인한 죄의식 때문에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생각이 어둡고, 마음이 어둡습니다. 그러다보니 얼굴 표정 또한 어둡습니다.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평화와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하게 웃지 못합니다. 밝은 자화상을 갖지 못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돋는 해, 예수님께로 가면 마음속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밝은 자화상을 갖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마1:21).
21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입니다. 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인간성과 영혼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회를 부패시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순수하고 진실 된 사랑을 하고 또 그러한 사랑을 받고자 합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것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잔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전염됩니다. 그래서 죄는 나 한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가인에게 미치고 마침내 온 세상에 퍼져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죄는 독약을 바른 사탕과 같아서 달콤한 쾌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발을 디뎌놓으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거짓되게 하고, 추하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죄는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죽음은 육신의 죽음과 영적 죽음 모두를 포함합니다. 죽음은 볼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죄를 부분적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17).” 새사람으로 거듭나면 세상이 달라 보이게 됩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고전15:4). 이로 인해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엡2:6). 예수님은 때가 되면 천사들의 승리의 나팔과 함께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때에 먼저 무덤에 갇힌 성도들이 부활합니다. 이 때 무덤이 열리는 소리로 온 산하가 진동하게 됩니다. 또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때 우리는 사모하고 사모하던 예수님, 빛나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은 주와 복음 때문에 당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22-25).
마태복음 1장 22,23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B.C. 8세기경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친히 징조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시던 예루살렘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강대국이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보다 강대국인 앗수르를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왕하16:7).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머리를 의지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권세를 의지하고, 자기 사람이 외모를 의지하고, 자기 실력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는 유다를 징계하고 외면하셔야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고 도우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낙심될 때에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린아이는 혼자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합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다 보면 때로 외롭고 고독하고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지식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특징은 고독입니다. 현대인들은 컴퓨터라는 비대면, 익명성, 다시 말해 비 인격체인 컴퓨터로 하루를 출발하고 하루를 마칩니다. 그리고 치열한 생존경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옆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들로 인해 생기는 질병이 정신질환, 특히 우울증입니다. 이런 고독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독하고 답답할 때에 따뜻한 대화를 오갈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다니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보호하여 주시니 더 이상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래에 대해서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우리가 일 년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를 모든 사고의 위험에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죄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어 믿음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쓰러질 때마다 힘을 주셨습니다.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셨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를 주셨습니다. 물질이 필요할 때 물질을 주셨습니다. 쉼이 필요할 때 쉼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필요할 때 말씀을 주셨습니다. 섬김이 필요할 때 섬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과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마다 주님은 내 편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생명 구원의 역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금년 한 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 제가 무엇이건데 저와 함께 하셔서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주시나이까? 주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아멘.”
임마누엘 하나님은 소망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2008년에도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슬픔을 이기고 운명을 이기고 고독을 이기고 죄의 소욕을 이기고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