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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메시지 제 3 강(롬12:3-8, 요절 12:3)
나눔과 봉사의 우선순위는 교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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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무엇이지요? 예배란 영어 단어로 worthship입니다 이 단어는 앵글로색슨어 worthscipe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뜻은 값어치를 지불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란 특별한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최고의 신분으로 간주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분에게 최고의 가치를 돌려 드린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돌릴지어다(시29:2).”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구원역사와 은혜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구원받은 성도가 최상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첫째는 성경에 예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출5:7;29:2;45:11;시66:4; 86:9;96:9;95:6-7;99:5;132:7;138:2). 둘째는, 예배가 영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핵입니다.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고 비성경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핵입니다. 셋째는 영원과 구속사가 예배에 의해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예수님께서 친히 명하셨기 때문이다(마4:10).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게 되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시50편 23절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레10:3참조). 우리 삶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교회가 세움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2장 47절을 보면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도 함께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안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고전14:23-25).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섬김(serving)과 나눔(sharing), 그리고 사랑(loving)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섬김과 나눔의 우선순위, 즉 어디서부터 먼저 봉사하고 섬기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섬기고 봉사하여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봉사와 섬김의 우선순위는 이웃과 국가가 아니라 교회임을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봉사와 섬김이 교회로부터 출발하여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그리고 민족과 열방으로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3).
바울은 교회에서의 봉사를 우선적으로 말씀하기에 앞서 봉사의 대 원칙을 말씀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헬라어 원문에는 생각하다는 동사, 프로네인(φρονεἰν)이란 동사가 4번 나옵니다. 3절에서의 키워드는 생각하다입니다. 생각은 지성의 역할을 합니다. 지성은 행동하기 전에 예측하는 것입니다. 지성은 마치 우리가 당구를 칠 때 공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공을 때리면 어디를 맞고 어디를 맞아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행하는 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지성은 자신의 정체성(self identity)을 알게 하고 자신의 위치를 알도록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내가 지금 어떤 믿음의 분량을 갖고 있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하여 냉정하고도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말고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평가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여 자신의 현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게 평가를 해보면 자기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또 남을 존중하게 되고, 또 자기의 단점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고, 자기의 부족한 점을 찾아서 보강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기 파악, 자기 성찰, 자기 위치를 알지 못하면 삶에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자기의 믿음과 은사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 혼란을 가져왔던 방언문제도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인함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방언을 다른 은사보다 더 높게 생각하다보니 자연히 다른 은사에 대해서 낮게 평가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지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겸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어떤 죄인이었는데 지금 구원을 받아서 이런 사람이 되었고 어떤 점이 부족한가를 잘 압니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그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래 자기가 실력이 좋아서, 본래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교만하여 결국 추락하여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冷情)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런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겸손은 기독교 윤리 실천의 첫 단추입니다. 따라서 모든 봉사와 섬김의 원칙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한 마디로 자기 분수를 알고 주제를 압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지금 서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앉아야 할 자리인가, 일어서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누워야 할 자리인가, 지금 섬기고 동역하여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가, 개척자의 위치에 있는가를 압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행동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갈등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대개 자기 위치를 알지 못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면 자기를 알게 되고, 그 위치와 직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충실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그 일이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는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받아들이어 그 일에 열심을 다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아멘 하고 봉사하고 섬깁니다. 우리는 보통 겸손하면 사양으로 생각하여 할 수 있는 일까지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반면에 할 수 없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고 나서서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 교만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높이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자기 평가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사양하지 말고 교회에 봉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섬김과 봉사의 최우선의 자리다.
교회가 왜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여야 할 최우선의 자리입니까? 첫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교회는 영원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구원을 받고 세례 받고 믿음을 배우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주님의 피로 세우신 거룩한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교회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남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교회입니다. 교회 목사의 정년은 70세입니다. 저는 70이 되면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원로 목사가 됩니다. 원로목사가 되면 우리 교회의 목회와 행정에서 떠납니다. 따라서 교회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입니다. 나는 정한 기간 동안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이유는 우리들은 말할 것 없고 다음 세대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께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 떼래야 뗄 수 없는 몸입니다. 이는 마치 아교풀로 종이를 붙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떼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떨어지면 남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에서 떨어져 지옥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또한 우리의 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당연히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몸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있어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마가 아니라 결단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내 몸을 사랑합니다. 내 몸을 사랑하되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온 힘으로 사랑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내 몸이 아프고 내 몸에 어떤 위험이 닥치면 심각한 문제로 생각합니다. 제가 감기 몸살로 열이 나고 컨디션이 좋지 않게 되니 곧 약을 지어먹습니다. 그리고 김 요한 목사님이 과로로 간이 좀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목사님들이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병원을 찾아 정밀 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는 내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이어트도 하고, 열심히 씻고, 열심히 가꿉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능적인 자기애로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교우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내 손에 먼지라도 묻으면 금방 닦지 않습니까? 교회 또한 이렇게 섬기고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평수가 넓은 곳으로 이사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여 평수가 더 넓고 더 좋은 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내 몸은 아닙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내 몸입니다. 교우들은 나의 지체들입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이웃에 비해 훨씬 가까운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비교가 안됩니다. 이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교회는 내 몸이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가 아픕니다. 그 때에 내가 아프기 때문에 노력하여 약을 먹고 노력하여 쉽니까? 즉각적으로, 노력 없이 약 먹고 쉬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교회는 내 몸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교회는 자연스럽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위적인 노력이 아닌 아주 자연스럽고 즉각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치장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보다 훨씬 그 농도가 짙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내 몸을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나에 봉사요 섬김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잘 섬기는 분들을 잘 보세요.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답습니다. 교회를 잘 섬기고 교회를 위해 봉사를 잘 하시는 나이 드신 권사님들을 보세요. 아주 곱게 늙습니다. 피부가 윤이 납니다. 주님을 섬기고 몸 된 교회를 섬긴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섬김과 봉사로 나타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매번 말을 하지만 주님께 투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기에게 투자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 몸을 살펴보세요. 우리 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는 그 기능이 매우 다양합니다. 손과 발이 그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귀와 입의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내장과 심장과 신장과 폐장과 위장이 각기 기능이 다릅니다. 이런 모든 지체는 몸을 세우고 몸을 보존합니다. 이처럼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섬겨야 할 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직분’은 어떤 직책이라기보다는 몸의 기능을 말합니다. 모든 지체가 똑같은 기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을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입은 말하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코는 냄새를 맡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지체가 있는 것은 몸을 섬기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교회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5). 각기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6a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제가 받은 은사와 여러분이 받은 은사는 각기 다릅니다. 은사가 다른 만큼 기능과 책임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헌금하고, 똑같이 교회에 봉사하기 때문에 무엇이 다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일을 하도록 그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은사라고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양한 은사 중에 중요한 은사 일곱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소수 몇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 중에 은사를 받지 않으신 분이 한 명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지체라 할 수 없습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교회에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주신 은사를 묻어두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께서 나중에 악한 종으로 꾸중을 듣게 됩니다. 본문에는 일곱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b-8).”
첫째로, 예언(prophesying)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합니다. 예언이란 점쟁이들처럼 몇 살에 시집을 갈 것이며, 언제 취직이 될 것이며, 또 선거에 당선될 것이라는 것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앞을 내다보는 은사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전도할 때 말씀을 잘 전하는 은사가 바로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목사에게 필수적입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하고 또 사모하여 합니다.
둘째, 섬김(serving) 은사.
‘섬김’의 은사는 봉사하는 일에 남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다 섬기는 자들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일에 특별한 뛰어난 은사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이 은사는 자기 주도적으로 사역하기 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주도적으로 펼치는 사역을 돕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 바로 다음에 섬기는 일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있기까지는 그를 섬긴 아론과 훌이 있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하루 종일 붙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적의 침략을 막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뒤에는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D.L.무디 목사님이 있기까지에는 섬기는 은사를 가진 생키가 있었습니다. 생키는 일생동안 찬양으로 무디 목사님을 동역하며 섬겼습니다. 그가 찬양하면 회중들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때 무디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면 회중들이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섬긴 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강원도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의 할아버지인 R.A. 토레이 박사입니다. 그는 학문이 일천한 무디 목사님을 항상 따라다니며 글을 써주고, 설교문을 정리해 주고,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주는 사역을 보조했습니다.
존 스타트 목사 또한 그를 40년간 섬긴 여비서 프란시스 화이트헤드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모든 원고를 정리하고, 그의 손이 미치는 못하는 부분들을 섬겼습니다. 존 스타트 목사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의 헌정사에서 “1956년부터 1986년까지 30년간 충성스럽고 유능하게 봉사한 것에 대해 감사하며 화이트 헤드에게 드림”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자기의 노작이라 할 수 있는 책을 자기 여비서에게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뒤에서 섬기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사역자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그런 은사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은사는 참으로 귀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어느 은사보다도 이런 섬기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셋째, 가르침(teaching) 은사.
‘가르침’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차이가 난다면 예언의 은사가 영적인 파워라면, 가르치는 은사는 이해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교수들 중에도 실력은 있는데 가르치는 은사가 없어서 인기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실력은 별로 없는데 재미있게 잘 가르치기 때문에 인기가 짱인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르치는 것도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분은 성경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분들은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넷째, 권위(encouraging) 은사.
‘권위’의 은사는 낙심한 사람에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카운슬링을 잘 합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삶에 지친 마음이 생기가 솟아나고,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됩니다. 권위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따뜻합니다. 바나바는 권위의 아들이라고 별명이 붙을 만큼 권위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외과 의사라면 바나바는 간호사였습니다. 권위의 은사의 반대는 사람을 절망시키고 낙담케 하고 낙망케 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다양성 시대라고 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상이 혼재된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전과 달리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이런 시대에 권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의 은사를 주셔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구제(contributing) 은사.
‘구제’는 돈이 많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돈은 없지만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면 앞장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구제는 성실함으로 힘써야 합니다. 성실함이란 인색함으로 하지 않고 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다스림(leadership) 은사.
‘다스리는 자’는 지도자 자질을 말합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키웁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 주위에는 유능한 일꾼들이 자라납니다. 빌빌거리는 사람들도 이 사람에게 가면 유능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다윗이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주위에는 온갖 비류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모두가 통일 이스라엘의 장군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다스림의 은사를 받은 지도자를 만나 유능한 지도자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일곱째, 긍휼의 베품(showing mercy) 은사.
긍휼의 은사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은사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마음, 어려운 사람을 챙겨주는 배려, 이런 것이 긍휼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은사가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27가지 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더 많은 은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기록된 은사는 당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은사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사를 사모하고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은사를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하나님이 각기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예배, 친교, 제자도, 봉사,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교회의 목적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예배를 섬기고, 성도들 사이에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는 것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또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봉사를 해야 합니다. 또 은사를 가지고 전도 사역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기 은사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여야 합니다.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 위치에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내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교우들을 내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아멘.
나눔과 봉사의 우선순위는 교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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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무엇이지요? 예배란 영어 단어로 worthship입니다 이 단어는 앵글로색슨어 worthscipe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뜻은 값어치를 지불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란 특별한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최고의 신분으로 간주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분에게 최고의 가치를 돌려 드린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돌릴지어다(시29:2).”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구원역사와 은혜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구원받은 성도가 최상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첫째는 성경에 예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출5:7;29:2;45:11;시66:4; 86:9;96:9;95:6-7;99:5;132:7;138:2). 둘째는, 예배가 영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핵입니다.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고 비성경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핵입니다. 셋째는 영원과 구속사가 예배에 의해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예수님께서 친히 명하셨기 때문이다(마4:10).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게 되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시50편 23절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레10:3참조). 우리 삶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교회가 세움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2장 47절을 보면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도 함께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안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고전14:23-25).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섬김(serving)과 나눔(sharing), 그리고 사랑(loving)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섬김과 나눔의 우선순위, 즉 어디서부터 먼저 봉사하고 섬기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섬기고 봉사하여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봉사와 섬김의 우선순위는 이웃과 국가가 아니라 교회임을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봉사와 섬김이 교회로부터 출발하여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그리고 민족과 열방으로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3).
바울은 교회에서의 봉사를 우선적으로 말씀하기에 앞서 봉사의 대 원칙을 말씀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헬라어 원문에는 생각하다는 동사, 프로네인(φρονεἰν)이란 동사가 4번 나옵니다. 3절에서의 키워드는 생각하다입니다. 생각은 지성의 역할을 합니다. 지성은 행동하기 전에 예측하는 것입니다. 지성은 마치 우리가 당구를 칠 때 공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공을 때리면 어디를 맞고 어디를 맞아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행하는 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지성은 자신의 정체성(self identity)을 알게 하고 자신의 위치를 알도록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내가 지금 어떤 믿음의 분량을 갖고 있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하여 냉정하고도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말고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평가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여 자신의 현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게 평가를 해보면 자기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또 남을 존중하게 되고, 또 자기의 단점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고, 자기의 부족한 점을 찾아서 보강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기 파악, 자기 성찰, 자기 위치를 알지 못하면 삶에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자기의 믿음과 은사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 혼란을 가져왔던 방언문제도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인함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방언을 다른 은사보다 더 높게 생각하다보니 자연히 다른 은사에 대해서 낮게 평가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지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겸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어떤 죄인이었는데 지금 구원을 받아서 이런 사람이 되었고 어떤 점이 부족한가를 잘 압니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그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래 자기가 실력이 좋아서, 본래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교만하여 결국 추락하여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冷情)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런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겸손은 기독교 윤리 실천의 첫 단추입니다. 따라서 모든 봉사와 섬김의 원칙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한 마디로 자기 분수를 알고 주제를 압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지금 서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앉아야 할 자리인가, 일어서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누워야 할 자리인가, 지금 섬기고 동역하여야 할 자리인가, 아니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가, 개척자의 위치에 있는가를 압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행동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갈등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대개 자기 위치를 알지 못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면 자기를 알게 되고, 그 위치와 직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충실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그 일이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는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받아들이어 그 일에 열심을 다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아멘 하고 봉사하고 섬깁니다. 우리는 보통 겸손하면 사양으로 생각하여 할 수 있는 일까지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반면에 할 수 없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고 나서서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 교만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높이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자기 평가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사양하지 말고 교회에 봉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섬김과 봉사의 최우선의 자리다.
교회가 왜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여야 할 최우선의 자리입니까? 첫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교회는 영원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구원을 받고 세례 받고 믿음을 배우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주님의 피로 세우신 거룩한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교회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남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교회입니다. 교회 목사의 정년은 70세입니다. 저는 70이 되면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원로 목사가 됩니다. 원로목사가 되면 우리 교회의 목회와 행정에서 떠납니다. 따라서 교회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입니다. 나는 정한 기간 동안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이유는 우리들은 말할 것 없고 다음 세대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께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 떼래야 뗄 수 없는 몸입니다. 이는 마치 아교풀로 종이를 붙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떼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떨어지면 남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에서 떨어져 지옥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또한 우리의 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당연히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몸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있어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마가 아니라 결단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내 몸을 사랑합니다. 내 몸을 사랑하되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온 힘으로 사랑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내 몸이 아프고 내 몸에 어떤 위험이 닥치면 심각한 문제로 생각합니다. 제가 감기 몸살로 열이 나고 컨디션이 좋지 않게 되니 곧 약을 지어먹습니다. 그리고 김 요한 목사님이 과로로 간이 좀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목사님들이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병원을 찾아 정밀 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는 내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이어트도 하고, 열심히 씻고, 열심히 가꿉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능적인 자기애로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교우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내 손에 먼지라도 묻으면 금방 닦지 않습니까? 교회 또한 이렇게 섬기고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평수가 넓은 곳으로 이사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여 평수가 더 넓고 더 좋은 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내 몸은 아닙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내 몸입니다. 교우들은 나의 지체들입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이웃에 비해 훨씬 가까운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비교가 안됩니다. 이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교회는 내 몸이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가 아픕니다. 그 때에 내가 아프기 때문에 노력하여 약을 먹고 노력하여 쉽니까? 즉각적으로, 노력 없이 약 먹고 쉬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교회는 내 몸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교회는 자연스럽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위적인 노력이 아닌 아주 자연스럽고 즉각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치장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보다 훨씬 그 농도가 짙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내 몸을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나에 봉사요 섬김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잘 섬기는 분들을 잘 보세요.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답습니다. 교회를 잘 섬기고 교회를 위해 봉사를 잘 하시는 나이 드신 권사님들을 보세요. 아주 곱게 늙습니다. 피부가 윤이 납니다. 주님을 섬기고 몸 된 교회를 섬긴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섬김과 봉사로 나타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매번 말을 하지만 주님께 투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기에게 투자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 몸을 살펴보세요. 우리 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는 그 기능이 매우 다양합니다. 손과 발이 그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귀와 입의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내장과 심장과 신장과 폐장과 위장이 각기 기능이 다릅니다. 이런 모든 지체는 몸을 세우고 몸을 보존합니다. 이처럼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섬겨야 할 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직분’은 어떤 직책이라기보다는 몸의 기능을 말합니다. 모든 지체가 똑같은 기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을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입은 말하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코는 냄새를 맡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지체가 있는 것은 몸을 섬기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교회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5). 각기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6a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제가 받은 은사와 여러분이 받은 은사는 각기 다릅니다. 은사가 다른 만큼 기능과 책임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헌금하고, 똑같이 교회에 봉사하기 때문에 무엇이 다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일을 하도록 그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은사라고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양한 은사 중에 중요한 은사 일곱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소수 몇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 중에 은사를 받지 않으신 분이 한 명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지체라 할 수 없습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교회에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주신 은사를 묻어두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께서 나중에 악한 종으로 꾸중을 듣게 됩니다. 본문에는 일곱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b-8).”
첫째로, 예언(prophesying)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합니다. 예언이란 점쟁이들처럼 몇 살에 시집을 갈 것이며, 언제 취직이 될 것이며, 또 선거에 당선될 것이라는 것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앞을 내다보는 은사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전도할 때 말씀을 잘 전하는 은사가 바로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목사에게 필수적입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하고 또 사모하여 합니다.
둘째, 섬김(serving) 은사.
‘섬김’의 은사는 봉사하는 일에 남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다 섬기는 자들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일에 특별한 뛰어난 은사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이 은사는 자기 주도적으로 사역하기 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주도적으로 펼치는 사역을 돕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 바로 다음에 섬기는 일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있기까지는 그를 섬긴 아론과 훌이 있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하루 종일 붙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적의 침략을 막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뒤에는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D.L.무디 목사님이 있기까지에는 섬기는 은사를 가진 생키가 있었습니다. 생키는 일생동안 찬양으로 무디 목사님을 동역하며 섬겼습니다. 그가 찬양하면 회중들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때 무디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면 회중들이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섬긴 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강원도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의 할아버지인 R.A. 토레이 박사입니다. 그는 학문이 일천한 무디 목사님을 항상 따라다니며 글을 써주고, 설교문을 정리해 주고,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주는 사역을 보조했습니다.
존 스타트 목사 또한 그를 40년간 섬긴 여비서 프란시스 화이트헤드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모든 원고를 정리하고, 그의 손이 미치는 못하는 부분들을 섬겼습니다. 존 스타트 목사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의 헌정사에서 “1956년부터 1986년까지 30년간 충성스럽고 유능하게 봉사한 것에 대해 감사하며 화이트 헤드에게 드림”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자기의 노작이라 할 수 있는 책을 자기 여비서에게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뒤에서 섬기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사역자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그런 은사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은사는 참으로 귀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어느 은사보다도 이런 섬기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셋째, 가르침(teaching) 은사.
‘가르침’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차이가 난다면 예언의 은사가 영적인 파워라면, 가르치는 은사는 이해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교수들 중에도 실력은 있는데 가르치는 은사가 없어서 인기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실력은 별로 없는데 재미있게 잘 가르치기 때문에 인기가 짱인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르치는 것도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분은 성경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분들은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넷째, 권위(encouraging) 은사.
‘권위’의 은사는 낙심한 사람에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카운슬링을 잘 합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삶에 지친 마음이 생기가 솟아나고,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됩니다. 권위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따뜻합니다. 바나바는 권위의 아들이라고 별명이 붙을 만큼 권위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외과 의사라면 바나바는 간호사였습니다. 권위의 은사의 반대는 사람을 절망시키고 낙담케 하고 낙망케 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다양성 시대라고 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상이 혼재된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전과 달리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이런 시대에 권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의 은사를 주셔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구제(contributing) 은사.
‘구제’는 돈이 많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돈은 없지만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면 앞장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구제는 성실함으로 힘써야 합니다. 성실함이란 인색함으로 하지 않고 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다스림(leadership) 은사.
‘다스리는 자’는 지도자 자질을 말합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키웁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 주위에는 유능한 일꾼들이 자라납니다. 빌빌거리는 사람들도 이 사람에게 가면 유능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다윗이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주위에는 온갖 비류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모두가 통일 이스라엘의 장군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다스림의 은사를 받은 지도자를 만나 유능한 지도자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일곱째, 긍휼의 베품(showing mercy) 은사.
긍휼의 은사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은사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마음, 어려운 사람을 챙겨주는 배려, 이런 것이 긍휼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은사가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27가지 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더 많은 은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기록된 은사는 당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은사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사를 사모하고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은사를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하나님이 각기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예배, 친교, 제자도, 봉사,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교회의 목적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예배를 섬기고, 성도들 사이에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는 것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또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봉사를 해야 합니다. 또 은사를 가지고 전도 사역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기 은사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여야 합니다.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 위치에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내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교우들을 내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