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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목자학교 (에스겔서 47:1-12, 요절 47:9)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수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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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큰 생수의 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변화되는 만유의 회복에 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강을 이루어 온 세상의 모든 생물이 번성하고 소성함을 얻었습니다. 죽음의 바다인 사해가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생수는 십자가의 복음, 성령의 강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에, 보혈의 강물, 은혜의 강물,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가정이과 교회가, 그리고 캠퍼스와 민족과 열방이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 집니다. 실패가 승리로 변화됩니다. 죽음이 생명과 부활로 변화됩니다. 가난과 저주가 부요와 축복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통해 나 자신은 물론 교회와 가정과 캠퍼스와 열방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와서 창일하더라(1-5).
생수의 발원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던 사람을 따라 성전 문에 이르러 보니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이 나왔다고요?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성전 전면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나온 물이 동으로 흘러나왔습니다. 동쪽은 하나님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그 물방울이 동으로 흐르다가, 우편제단 남편으로 흘러갔는데, 남쪽은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북문으로 나가 담을 돌아서 동쪽으로 난 문에 이르러 보니, 성전에서 나오던 물이 문의 오른쪽에서 스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을 보겠습니다.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 주던 사람이 갑자기 줄자를 꺼내어 동으로 일천 척, 약 500미터를 재더니 그 물을 건너라고 했습니다. 그 물은 어느 새 개울물이 되어 에스겔의 발목까지 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일천 척을 재더니 또 건너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무릎까지 올랐습니다. 또 다시 일천 척을 재고 나가 건너보니 이번에는 허리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천 척을 재고 나가보니 이게 웬 일입니까? 물이 불어나 헤엄을 치면 몰라도 걸어서는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 강줄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은 거대한 바다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현재 환상으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 지역은 고원 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지역은 사막같이 메마른 지역입니다. 풀 한 포기 없고 마른 모래바람만 불어오는 황량한 곳입니다. 더구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본 성전과 강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성전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2장 19-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46년 동안이나 지은 성전을 어떻게 3일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는가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2:21).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 초막절 날 성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이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성경은 에스겔 47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생수의 강’은 에스겔이 비전 중에 보았던 그 강을 말합니다.
또 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뭐가 나왔다고요? ‘물이 나오더라’. 이상에서 볼 때에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비전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강물, 부활하신 이후 보내신 성령의 강물,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강물입니다.
이 지구상에 가장 신기한 것은 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이 너무 흔하기 때문에 그 귀중함과 신기함을 잘 모릅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흐르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물은 약한 것 같지만 강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육지에 사는 모든 생물들도 물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보통 물이 아닙니다. 보통 물은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좋지 못한 세균이 기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은혜의 강물은 거룩하고 정결합니다. 보통 물은 마시면 잠시 갈증이 해소되지만 곧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강물은 한번 마시면 뱃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갈수록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우리의 영혼에 깊고 큰 강이 되어 흘러 적십니다. 아무리 좋은 정수기의 물이라 할지라도 우리 영혼의 죄를 정수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보혈의 강물은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하면서도 발목만 적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깊은 곳으로 조금 더 나가면 붙들릴 것 같아 항상 발을 뺄 준비를 하고 발목만 담그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발목신앙’, ‘양다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나아가 무릎까지 적십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공부도 하고 주일 예배도 드립니다. 그런데 마음은 언제나 세상에 있습니다. 기린이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세상을 기웃거립니다. 이런 신자는 ‘기린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나아가 허리까지 적십니다. 그러나 마음, 심장까지는 적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연륜은 쌓여있지만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앞서고 무기력합니다. 그러니 얼굴에 은혜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항상 우거지상을 쓰고 검은 연탄재를 뒤집어쓴 사람과 같이 하고 다닙니다. 이런 신앙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탄 감자 신자, 아니면 찐조기 신자라고 부를까요?
그러나 우리가 수영장에 가보면 정말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발목이나 무릎을 적시는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치지 않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곳에서 합니다. 깊은 곳에서 자유형, 배 형, 접형, 평형들을 자유스럽게 즐깁니다. 그리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물이 깊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물이 깊으면 더 좋아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의 바다, 보혈의 바다, 성령의 바다에서 가슴과 머리까지 푹 적시며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낙타무릎이 되기까지 기도하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되 온 몸으로 헌신하고, 찬송을 부르더라도 뜨거운 가슴으로 부르고, 전도를 하더라도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즐거움으로 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섬김과 나눔과 사랑과 헌신이 몸이 배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얕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세계의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과 권세와 쾌락만을 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도 육신적인 사랑 밖에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메주만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하고 거룩한 믿음의 세계, 영적인 세계,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축복과 기쁨과 희망과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과 사랑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실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9).”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 은혜의 강에서 수영을 하면 재미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손해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매이는 것으로 생각하여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희망과 생명을 줍니다. 우리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합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줍니다. 영생을 줍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 은혜의 강물의 세계로 나가시기 원하십니까? 발목과 무릎이나 적시는, 허리나 적시는 얕은 물가를 벗어나 예수님의 깊고 푸른 생수의 강에서 은혜와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생수의 강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가증한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뭣을 버리라고요? ‘가증한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8장 10절을 보면 70인 장로들이 성전 안의 사면벽에 가증한 우상의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다 분향하였습니다. 그들이 종교생활은 하지만 자신의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성전 북문에서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였습니다(8:14). 담무스는 바벨론 풍요의 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풍요와 안일함만을 위해 울고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타령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문제가 경제 문제입니까? 우리나라는 너무 부자가 되어서 문제입니다. 지금 고급 레스토랑에는 자리가 없어서 몇 십분 기다려야 합니다. 백화점에는 수백만 원씩이나 되는 옷과 가방, 구두 등이 없어서 못 팝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하경제 250조가 한국 경제의 1/3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지하경제는 검은 돈입니다. 지금의 문제는 경제가 아닙니다. 그뿐입니까? 8장 16절을 보면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는 25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했습니다.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겉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온갖 욕심과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가증한 일들을 보고도 탄식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보고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애곡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 그릇을 찬 서기관을 보내어 이러한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는 자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마에 표 없는 자, 즉 가증한 일들을 보고도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자들은 살육 하는 기계를 가진 여섯 천사들이 따라오면서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살육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지금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으로 잠자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깨어있습니까? 영적으로 깨어있는 분은 나 자신의 불신앙을 보고 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을 보고 웁니다. 쾌락과 물질과 이기주의로 가득 찬 캠퍼스를 보고 통곡합니다. 민족을 보고, 열방을 보고 울며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불신의 시대를 보고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60년대, 7,80년대, 90년대 선배들은 사회주의 사상과 물질과 쾌락에 병들어 가는 캠퍼스를 보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모래사장에서 계곡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의도 아스팔트 위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기도했습니다. 수양회 밤에 모래사장에서 기도하다가 모기 밥이 되어 다음날 병원에 입원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보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선교단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단과 쾌락과 이기주의와 물질에 정신이 혼미한 캠퍼스를 보고 울어야 합니다. 저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서울대생들이 4년 안에 졸업하는 비율이 17%라고 합니다. 졸업 유예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길게는 7년입니다. 그들은 취직 준비를 위해 7년 8년을 학교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캠퍼스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장수는 할 수 없을까요? 단 1년 만이라도 유예할 수 없을까요?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여러분은 지금 깨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예레미야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그리고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가운데 콩쥐 팥쥐가 있습니다. 하루는 계모가 부엌의 빈 독에 물을 길어다 채우라는 말을 하고는 나갑니다. 콩쥐가 그 계모의 말대로 물을 길어다 부었지만 아무리 길어다 부어도 어찌된 영문인지 독이 차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서 그 독은 밑이 깨진 독이라 차지 않는다고 이유를 알려주면서 콩쥐를 도와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out put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했습니다. 그 귀한 물을 받으려고 웅덩이를 팠습니다. 정성껏 석회도 발랐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물이 고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고이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웅덩이가 터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터진 웅덩이가 있고, 밑 빠진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터진 웅덩이고 무엇이 밑 빠진 항아리입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터진 웅덩이입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이 밑 빠진 독입니다. 웅덩이 물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영에다가 몇 백을 곱해도 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면 형통하게 됩니다. 아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 우리가 10을 수고했는데 결과는 1밖에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수고한 결과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대로 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버리고 웅덩이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인생을 하나님께 투자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섬기십시오. 이럴 때에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 비전을 보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가 처한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민족과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전이 회복되고, 거기서 스며 나온 생수가 마침내 큰 강이 되어 온 세계를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풍성한 은혜의 강물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절망의 때 일수록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처음에 희미하여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처음에는 스미어 나올 정도로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불어나서 큰 강이 되었습니다. 이 물은 처음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 조금씩 스미어 나왔습니다. 12사도가 120명이 되었습니다. 일 천 날쯤 지나 오순절에 이르러 그 물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적시었습니다. 3천명이 회개하고, 5천명으로, 그리고 수만 명으로, 아시아와 유럽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을 휩쓸었습니다. 더 깊고 큰 강을 이루며 유럽으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흘러갔습니다. 이 강물은 우리나라를 적셨습니다. 이 강물은 CMI를 통해 캠퍼스를 새롭게 적시고 있습니다.
지금 CMI는 캠퍼스에서 아주 희미합니다. 그러나 CMI를 통해 캠퍼스가 보혈의 강물, 찬양의 강물, 기도의 강물로 뒤덮일 것을 믿습니다. 더 나아가 민족과 열방이 뒤덮일 것을 믿습니다. 아멘. 또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는 우리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내 몸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입니다. 내 안에 말씀이 스미게 되면 나의 가정, 나의 캠퍼스, 민족과 세계를 적시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이 흐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소성하고 번성하더라(6-12).
6,7절을 보겠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되자 천사가 이번에는 에스겔을 데리고 강가를 둘러보게 했습니다. 에스겔이 둘러보니 황량하던 사막은 간데없고 강가의 좌우편에는 나무가 심이 많아 우거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무가 많더라’는 말은 단지 나무만 많은 것이 아니라 나무와 함께 그 열매도 풍성함을 내포한 말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시편 1편 3절에 복 있는 사람을 일컬어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은혜 받으면 강 좌 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은 것 같이 존귀한 삶,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8-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아라바 바다는 우리가 잘 아는 사해입니다. 사해에는 요단강에서 매년 약 5억 4천만 톤의 물이 흘러 들어오고 또 그 외의 몇 개의 강으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흘러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물이 넘치기는커녕, 항상 지중해의 수면보다 395m나 낮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해 밑바닥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열에 물이 모두 증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해의 물은 지중해보다 다섯 배나 짭니다. 이처럼 물이 너무 짜기 때문에 거기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해의 주변 지역은 그 짠 소금기가 배어서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합니다. 사해(死海)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그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물이 흘러들어가자 그 바다가 소성했습니다. 죽은 바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해의 짠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자 물고기가 떼를 지어 헤엄을 치며 다녔습니다. 사해는 더 이상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생명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의 강물,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이 흐르게 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핍니다. 박토가 변하여서 옥토가 됩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은혜의 강물, 보혈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치료와 변화와 소성과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11절을 보겠습니다. 진펄과 갯펄입니다. “진펄과 갯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진펄과 갯펄은 문자적으로 진흙 구덩이, 웅덩이를 말하는데 사해 주변에 언덕 위에 있는 진흙웅덩이를 가리킵니다. 이는 우기에 사해에 물이 넘치면 물이 웅덩이에 고이게 되고, 고인 물은 곧 증발하여 소금 땅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외면하는 자를 말합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아예 은혜를 무시하거나 안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년, 아니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변하지 않는, 아니 안 변해도 그렇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은혜를 받아 열매 맺어야 하는데 몇 년 되어도 은혜만 따먹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펄, 갯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으면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를 받아 삶이 회복되어 주위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갯펄입니까? 아니면 진펄입니까? 진펄과 갯펄이 되지 마십시오.
12절을 보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거기에서는 입사귀가 약재료가 됩니다. 약재료란 말은 리트루파, 여호와 라파, 즉 라파에서 파생된 말로 치료하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생명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치유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계시록 22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모든 역사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죽어가는 세상을 구원하고 고치고 치료의 역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복음,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 은혜의 강물입니다. 보혈의 피가 여러분의 온 몸을 적실 때에 구원을 받습니다. 언어가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합니다. 생활이 바뀌고 삶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못된 습관과 못된 행동이 바꾸어집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얼짱 몸짱은 몰라도 삶짱이 됩니다. 가정과 캠퍼스와 민족이 변하고 열방이 변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수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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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큰 생수의 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변화되는 만유의 회복에 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강을 이루어 온 세상의 모든 생물이 번성하고 소성함을 얻었습니다. 죽음의 바다인 사해가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생수는 십자가의 복음, 성령의 강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에, 보혈의 강물, 은혜의 강물,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가정이과 교회가, 그리고 캠퍼스와 민족과 열방이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 집니다. 실패가 승리로 변화됩니다. 죽음이 생명과 부활로 변화됩니다. 가난과 저주가 부요와 축복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통해 나 자신은 물론 교회와 가정과 캠퍼스와 열방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와서 창일하더라(1-5).
생수의 발원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던 사람을 따라 성전 문에 이르러 보니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이 나왔다고요?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성전 전면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나온 물이 동으로 흘러나왔습니다. 동쪽은 하나님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그 물방울이 동으로 흐르다가, 우편제단 남편으로 흘러갔는데, 남쪽은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북문으로 나가 담을 돌아서 동쪽으로 난 문에 이르러 보니, 성전에서 나오던 물이 문의 오른쪽에서 스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을 보겠습니다.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 주던 사람이 갑자기 줄자를 꺼내어 동으로 일천 척, 약 500미터를 재더니 그 물을 건너라고 했습니다. 그 물은 어느 새 개울물이 되어 에스겔의 발목까지 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일천 척을 재더니 또 건너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무릎까지 올랐습니다. 또 다시 일천 척을 재고 나가 건너보니 이번에는 허리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천 척을 재고 나가보니 이게 웬 일입니까? 물이 불어나 헤엄을 치면 몰라도 걸어서는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 강줄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은 거대한 바다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현재 환상으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 지역은 고원 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지역은 사막같이 메마른 지역입니다. 풀 한 포기 없고 마른 모래바람만 불어오는 황량한 곳입니다. 더구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본 성전과 강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성전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2장 19-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46년 동안이나 지은 성전을 어떻게 3일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는가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2:21).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 초막절 날 성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이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성경은 에스겔 47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생수의 강’은 에스겔이 비전 중에 보았던 그 강을 말합니다.
또 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뭐가 나왔다고요? ‘물이 나오더라’. 이상에서 볼 때에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비전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강물, 부활하신 이후 보내신 성령의 강물,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강물입니다.
이 지구상에 가장 신기한 것은 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이 너무 흔하기 때문에 그 귀중함과 신기함을 잘 모릅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흐르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물은 약한 것 같지만 강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육지에 사는 모든 생물들도 물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보통 물이 아닙니다. 보통 물은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좋지 못한 세균이 기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은혜의 강물은 거룩하고 정결합니다. 보통 물은 마시면 잠시 갈증이 해소되지만 곧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강물은 한번 마시면 뱃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갈수록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우리의 영혼에 깊고 큰 강이 되어 흘러 적십니다. 아무리 좋은 정수기의 물이라 할지라도 우리 영혼의 죄를 정수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보혈의 강물은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하면서도 발목만 적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깊은 곳으로 조금 더 나가면 붙들릴 것 같아 항상 발을 뺄 준비를 하고 발목만 담그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발목신앙’, ‘양다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나아가 무릎까지 적십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공부도 하고 주일 예배도 드립니다. 그런데 마음은 언제나 세상에 있습니다. 기린이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세상을 기웃거립니다. 이런 신자는 ‘기린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나아가 허리까지 적십니다. 그러나 마음, 심장까지는 적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연륜은 쌓여있지만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앞서고 무기력합니다. 그러니 얼굴에 은혜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항상 우거지상을 쓰고 검은 연탄재를 뒤집어쓴 사람과 같이 하고 다닙니다. 이런 신앙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탄 감자 신자, 아니면 찐조기 신자라고 부를까요?
그러나 우리가 수영장에 가보면 정말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발목이나 무릎을 적시는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치지 않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곳에서 합니다. 깊은 곳에서 자유형, 배 형, 접형, 평형들을 자유스럽게 즐깁니다. 그리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물이 깊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물이 깊으면 더 좋아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의 바다, 보혈의 바다, 성령의 바다에서 가슴과 머리까지 푹 적시며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낙타무릎이 되기까지 기도하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되 온 몸으로 헌신하고, 찬송을 부르더라도 뜨거운 가슴으로 부르고, 전도를 하더라도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즐거움으로 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섬김과 나눔과 사랑과 헌신이 몸이 배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얕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세계의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과 권세와 쾌락만을 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도 육신적인 사랑 밖에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메주만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하고 거룩한 믿음의 세계, 영적인 세계,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축복과 기쁨과 희망과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과 사랑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실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9).”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 은혜의 강에서 수영을 하면 재미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손해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매이는 것으로 생각하여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희망과 생명을 줍니다. 우리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합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줍니다. 영생을 줍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 은혜의 강물의 세계로 나가시기 원하십니까? 발목과 무릎이나 적시는, 허리나 적시는 얕은 물가를 벗어나 예수님의 깊고 푸른 생수의 강에서 은혜와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생수의 강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가증한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뭣을 버리라고요? ‘가증한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8장 10절을 보면 70인 장로들이 성전 안의 사면벽에 가증한 우상의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다 분향하였습니다. 그들이 종교생활은 하지만 자신의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성전 북문에서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였습니다(8:14). 담무스는 바벨론 풍요의 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풍요와 안일함만을 위해 울고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타령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문제가 경제 문제입니까? 우리나라는 너무 부자가 되어서 문제입니다. 지금 고급 레스토랑에는 자리가 없어서 몇 십분 기다려야 합니다. 백화점에는 수백만 원씩이나 되는 옷과 가방, 구두 등이 없어서 못 팝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하경제 250조가 한국 경제의 1/3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지하경제는 검은 돈입니다. 지금의 문제는 경제가 아닙니다. 그뿐입니까? 8장 16절을 보면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는 25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했습니다.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겉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온갖 욕심과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가증한 일들을 보고도 탄식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보고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애곡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 그릇을 찬 서기관을 보내어 이러한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는 자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마에 표 없는 자, 즉 가증한 일들을 보고도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자들은 살육 하는 기계를 가진 여섯 천사들이 따라오면서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살육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지금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으로 잠자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깨어있습니까? 영적으로 깨어있는 분은 나 자신의 불신앙을 보고 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을 보고 웁니다. 쾌락과 물질과 이기주의로 가득 찬 캠퍼스를 보고 통곡합니다. 민족을 보고, 열방을 보고 울며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불신의 시대를 보고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60년대, 7,80년대, 90년대 선배들은 사회주의 사상과 물질과 쾌락에 병들어 가는 캠퍼스를 보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모래사장에서 계곡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의도 아스팔트 위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기도했습니다. 수양회 밤에 모래사장에서 기도하다가 모기 밥이 되어 다음날 병원에 입원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보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선교단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단과 쾌락과 이기주의와 물질에 정신이 혼미한 캠퍼스를 보고 울어야 합니다. 저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서울대생들이 4년 안에 졸업하는 비율이 17%라고 합니다. 졸업 유예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길게는 7년입니다. 그들은 취직 준비를 위해 7년 8년을 학교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캠퍼스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장수는 할 수 없을까요? 단 1년 만이라도 유예할 수 없을까요?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여러분은 지금 깨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예레미야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그리고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가운데 콩쥐 팥쥐가 있습니다. 하루는 계모가 부엌의 빈 독에 물을 길어다 채우라는 말을 하고는 나갑니다. 콩쥐가 그 계모의 말대로 물을 길어다 부었지만 아무리 길어다 부어도 어찌된 영문인지 독이 차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서 그 독은 밑이 깨진 독이라 차지 않는다고 이유를 알려주면서 콩쥐를 도와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out put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했습니다. 그 귀한 물을 받으려고 웅덩이를 팠습니다. 정성껏 석회도 발랐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물이 고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고이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웅덩이가 터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터진 웅덩이가 있고, 밑 빠진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터진 웅덩이고 무엇이 밑 빠진 항아리입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터진 웅덩이입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이 밑 빠진 독입니다. 웅덩이 물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영에다가 몇 백을 곱해도 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면 형통하게 됩니다. 아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 우리가 10을 수고했는데 결과는 1밖에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수고한 결과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대로 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버리고 웅덩이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인생을 하나님께 투자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섬기십시오. 이럴 때에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 비전을 보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가 처한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민족과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전이 회복되고, 거기서 스며 나온 생수가 마침내 큰 강이 되어 온 세계를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풍성한 은혜의 강물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절망의 때 일수록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처음에 희미하여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처음에는 스미어 나올 정도로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불어나서 큰 강이 되었습니다. 이 물은 처음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 조금씩 스미어 나왔습니다. 12사도가 120명이 되었습니다. 일 천 날쯤 지나 오순절에 이르러 그 물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적시었습니다. 3천명이 회개하고, 5천명으로, 그리고 수만 명으로, 아시아와 유럽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을 휩쓸었습니다. 더 깊고 큰 강을 이루며 유럽으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흘러갔습니다. 이 강물은 우리나라를 적셨습니다. 이 강물은 CMI를 통해 캠퍼스를 새롭게 적시고 있습니다.
지금 CMI는 캠퍼스에서 아주 희미합니다. 그러나 CMI를 통해 캠퍼스가 보혈의 강물, 찬양의 강물, 기도의 강물로 뒤덮일 것을 믿습니다. 더 나아가 민족과 열방이 뒤덮일 것을 믿습니다. 아멘. 또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는 우리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내 몸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입니다. 내 안에 말씀이 스미게 되면 나의 가정, 나의 캠퍼스, 민족과 세계를 적시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이 흐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소성하고 번성하더라(6-12).
6,7절을 보겠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되자 천사가 이번에는 에스겔을 데리고 강가를 둘러보게 했습니다. 에스겔이 둘러보니 황량하던 사막은 간데없고 강가의 좌우편에는 나무가 심이 많아 우거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무가 많더라’는 말은 단지 나무만 많은 것이 아니라 나무와 함께 그 열매도 풍성함을 내포한 말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시편 1편 3절에 복 있는 사람을 일컬어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은혜 받으면 강 좌 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은 것 같이 존귀한 삶,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8-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아라바 바다는 우리가 잘 아는 사해입니다. 사해에는 요단강에서 매년 약 5억 4천만 톤의 물이 흘러 들어오고 또 그 외의 몇 개의 강으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흘러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물이 넘치기는커녕, 항상 지중해의 수면보다 395m나 낮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해 밑바닥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열에 물이 모두 증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해의 물은 지중해보다 다섯 배나 짭니다. 이처럼 물이 너무 짜기 때문에 거기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해의 주변 지역은 그 짠 소금기가 배어서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합니다. 사해(死海)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그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물이 흘러들어가자 그 바다가 소성했습니다. 죽은 바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해의 짠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자 물고기가 떼를 지어 헤엄을 치며 다녔습니다. 사해는 더 이상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생명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의 강물,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이 흐르게 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핍니다. 박토가 변하여서 옥토가 됩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은혜의 강물, 보혈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치료와 변화와 소성과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11절을 보겠습니다. 진펄과 갯펄입니다. “진펄과 갯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진펄과 갯펄은 문자적으로 진흙 구덩이, 웅덩이를 말하는데 사해 주변에 언덕 위에 있는 진흙웅덩이를 가리킵니다. 이는 우기에 사해에 물이 넘치면 물이 웅덩이에 고이게 되고, 고인 물은 곧 증발하여 소금 땅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외면하는 자를 말합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아예 은혜를 무시하거나 안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년, 아니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변하지 않는, 아니 안 변해도 그렇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은혜를 받아 열매 맺어야 하는데 몇 년 되어도 은혜만 따먹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펄, 갯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으면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를 받아 삶이 회복되어 주위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갯펄입니까? 아니면 진펄입니까? 진펄과 갯펄이 되지 마십시오.
12절을 보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거기에서는 입사귀가 약재료가 됩니다. 약재료란 말은 리트루파, 여호와 라파, 즉 라파에서 파생된 말로 치료하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생명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치유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계시록 22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모든 역사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죽어가는 세상을 구원하고 고치고 치료의 역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복음,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 은혜의 강물입니다. 보혈의 피가 여러분의 온 몸을 적실 때에 구원을 받습니다. 언어가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합니다. 생활이 바뀌고 삶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못된 습관과 못된 행동이 바꾸어집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얼짱 몸짱은 몰라도 삶짱이 됩니다. 가정과 캠퍼스와 민족이 변하고 열방이 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