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창세기 12:1-9(요절 12:2)
복의 근원이 될찌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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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인생을 축복하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만도 복이라는 말이 310회 나오는데 그 중에 창세기에서 88회가 나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맨 처음 하신 말씀도 복이었습니다(창1:28). 그래서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복하면 기복신앙으로 생각하여 이를 매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복이냐 아니냐는 그 중심이 누구냐에 있습니다. 인간 중심이면 그것은 기복입니다. 목적을 오로지 복에 두고 우상 앞에 절하고 빌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복으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복 하면 물지의 축복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습니다. 복은 히브리어로 아쉬레,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로 영어로 번역하면 Blessed, Good, Happy, 좋은 것, 행복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즐겁지 않으면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즐겁고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반면에 별로 가진 것이 없지만 주 안에서 즐겁고 행복하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이 길어야 7,80입니다. 인생은 긴 것 같지만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보니 20이 가장 마딥니다. 그러나 나이 30이 되어 보세요. 금방 40이 됩니다. 40이 되면 금방 5,60이 됩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고민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리고 상처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 속에 산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복이란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복은 어려운 환경과 역경 중에도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역경 중에도 찬양이 넘치고 감사 넘치는 그런 삶이 복입니다. 창세기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대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의 근원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한 마디로 복을 나눠주는 삶,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주를 나눠주는 삶이 아닙니다. 저주의 통로가 아니라 복의 통로입니다. 저주스러운 삶은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이기적인 삶입니다. 미움입니다. 쟁취입니다. 분노입니다. 배신입니다. 불만입니다. 공격적입니다. 증오와 한입니다. 적개감입니다. 복의 통로는 감사입니다. 기쁨입니다. 희생입니다. 헌신입니다. 주고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즐겁고 자유 합니다. 존경하고 다정하고 평화스럽고 따듯하고 감사입니다. 축복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복의 근원은 복의 샘터, 복을 나눠주는 복덩이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샘의 특징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에 있는 검용소입니다. 검용소는 둘레가 약 20m이고, 깊이는 알 수 없으며 사계절 9℃의 지하수가 하루 2,000~3,000t씩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 폭포를 이룹니다. 검용소에서 온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 영월의 동강을 거쳐 단양·충주·여주로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서울과 수도권의 젖줄이 되고 있습니다. 검용소는 수천년을 걸쳐서 언제나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샘은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복의 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히 복의 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는 영원히 복덩이로 삼고자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보편성과 역사성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나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역사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슬픔의 근원, 열등감의 근원, 운명의 근원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던 삶에서 예수님을 믿어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샘터와 같은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복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3절에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미국에 존즈 홉킨스 대학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대학의 한 젊은 사회학 교수가 대학원 학생을 동원하여 지역 사회를 조사 연구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뉴욕의 빈민굴에서 12세에서 16세까지의 청소년 200명을 조사했습니다. 그의 부모님들이 거의 마약을 하고 있고, 폭력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동네는 윤락가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사회학과 학생들과 교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90% 정도는 훗날 범죄자가 되어 형무소를 제 집 같이 드나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노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서재를 정리하다가 옛날 대학원생들과 환경 조사하여 발표했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만났던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며 설문 내용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학문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학원생을 동원하여 당시에 설문에 응했던 그 아이들을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미국 전역을 뒤져 200명 중에 180명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단 4명만이 단 한번 감옥에 간 적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예상을 뒤엎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들을 만나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심도 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통적인 말을 하는데, 자기 동네에 한 여전도사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자기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한 여자 전도님이 자기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와 주일학교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전한 복음의 능력으로 빈민가의 젊은이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 여인이 복음을 나눔으로 한 지역의 젊은이들의 미래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이런 것입니다. 내 속에 주어진 복음, 나를 변화시킨 복음,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나눠주기만 하면, 복음 안에서 위대한 비전과 소망을 심어주기만 하면 위대한 인물들, 걸출한 인물들이 나올 것입니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민족을 변화시키고 통일한국을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복음을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의 통로,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습니다. The Living Bible를 보면 2절 앞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떠나야 합니다(1a).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떠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대가족하면 7-8명 많으면 10명 정도를 생각하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보통 몇 대가 함께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결혼을 하면 다른 지역으로 살림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집 옆에 붙여서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다른 아들이 장가를 가도 역시 아버지 집 옆에다가 집을 붙여서 지어주었습니다. 몇 대가 함께 살면서 이런 식으로 분가를 시키다보니 숫자가 적은 집도 보통 100-200명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집은 대대로 달 신인 난나르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다면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큰 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 삼촌, 숙모 등 모든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당시 사람들은 공동체를 깨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했으니 자기들이 믿는 신을 배신하고 여호와를 섬긴다는 아브라함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종교는 러시아 정교입니다.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분위기가 그랬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던 삶을 떠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환경과 분위기와 생활 습관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주는 좋지 못한 영향력과 죄악을 즐기던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은 생활 속에서 세상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 첫 번째는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삶과 그 영향력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산다는 것은 떠날 곳은 떠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떠날 곳은 떠났습니까? 버릴 것은 버렸습니까? 아직도 머물러 있고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떠나야 한다면 떠나십시오. 버려야 한다면 버리십시오. 그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좋지 못한 환경, 좋지 못한 생활, 좋지 못한 습관, 좋지 못한 가치관, 그리고 세속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등에서 떠나야 합니다.
둘째, 지시할 땅으로 가야 합니다(1b).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b)”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우르에서 가나안까지는 서쪽으로 약 1,200km 정도의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사이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북서쪽으로 약 1,200km 올라가서 도착한 곳이 하란입니다. 하란은 우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르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가나안을 향해서 가던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하였다’는 말의 원어를 살펴보면 잠시 머무른 것이 아니고 아예 거기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인 가나안까지 가야 하는데 목적한 곳이 아닌 하란에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사는데 두 번째 요구 조건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 하나님의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목적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낸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 완전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에 맞게 사는 것이 완전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분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나안이 목적지인데 비스무리하게 하란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목적지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서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셋째, 단을 쌓아야 합니다(7).
7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고 8절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는 환경이 좋기 때문에 드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내 집 장만을 못하고 이사 다니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는데 아브라함은 그보다 더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힘이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가족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전혀 생소한 땅에 가서 나그네처럼 지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뉴욕에 가면 허드슨 강이 있는데 그 강의 하류에 가면 쏠트라인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소금물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선을 말합니다.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서 허드슨 강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물이 계속 흐르게 되면 결국 민물이 바닷물의 세력을 계속 밀어내어 수원지가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허드슨 강의 salt line은 끊임없이 당기고 미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인생살이,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영력이 강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만, 영력이 약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밀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salt line을 지키는 힘은 예배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고 그 힘으로 세상을 이겼으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배는 영적인 충전을 받는 시간입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지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기름이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충전의 시간입니다. 예배가 약해지면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지고, 교회 사랑도 식어집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예배가 죽은 신자는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이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어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가 살아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님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생활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게 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생활에 생기가 넘치게 되고 새 힘이 넘치게 됩니다.
복의 근원이 될찌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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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인생을 축복하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만도 복이라는 말이 310회 나오는데 그 중에 창세기에서 88회가 나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맨 처음 하신 말씀도 복이었습니다(창1:28). 그래서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복하면 기복신앙으로 생각하여 이를 매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복이냐 아니냐는 그 중심이 누구냐에 있습니다. 인간 중심이면 그것은 기복입니다. 목적을 오로지 복에 두고 우상 앞에 절하고 빌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복으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복 하면 물지의 축복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습니다. 복은 히브리어로 아쉬레,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로 영어로 번역하면 Blessed, Good, Happy, 좋은 것, 행복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즐겁지 않으면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즐겁고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반면에 별로 가진 것이 없지만 주 안에서 즐겁고 행복하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이 길어야 7,80입니다. 인생은 긴 것 같지만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보니 20이 가장 마딥니다. 그러나 나이 30이 되어 보세요. 금방 40이 됩니다. 40이 되면 금방 5,60이 됩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고민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리고 상처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 속에 산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복이란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복은 어려운 환경과 역경 중에도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역경 중에도 찬양이 넘치고 감사 넘치는 그런 삶이 복입니다. 창세기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대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의 근원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한 마디로 복을 나눠주는 삶,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주를 나눠주는 삶이 아닙니다. 저주의 통로가 아니라 복의 통로입니다. 저주스러운 삶은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이기적인 삶입니다. 미움입니다. 쟁취입니다. 분노입니다. 배신입니다. 불만입니다. 공격적입니다. 증오와 한입니다. 적개감입니다. 복의 통로는 감사입니다. 기쁨입니다. 희생입니다. 헌신입니다. 주고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즐겁고 자유 합니다. 존경하고 다정하고 평화스럽고 따듯하고 감사입니다. 축복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복의 근원은 복의 샘터, 복을 나눠주는 복덩이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샘의 특징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에 있는 검용소입니다. 검용소는 둘레가 약 20m이고, 깊이는 알 수 없으며 사계절 9℃의 지하수가 하루 2,000~3,000t씩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 폭포를 이룹니다. 검용소에서 온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 영월의 동강을 거쳐 단양·충주·여주로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서울과 수도권의 젖줄이 되고 있습니다. 검용소는 수천년을 걸쳐서 언제나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샘은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복의 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히 복의 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는 영원히 복덩이로 삼고자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보편성과 역사성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나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역사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슬픔의 근원, 열등감의 근원, 운명의 근원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던 삶에서 예수님을 믿어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샘터와 같은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복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3절에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미국에 존즈 홉킨스 대학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대학의 한 젊은 사회학 교수가 대학원 학생을 동원하여 지역 사회를 조사 연구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뉴욕의 빈민굴에서 12세에서 16세까지의 청소년 200명을 조사했습니다. 그의 부모님들이 거의 마약을 하고 있고, 폭력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동네는 윤락가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사회학과 학생들과 교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90% 정도는 훗날 범죄자가 되어 형무소를 제 집 같이 드나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노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서재를 정리하다가 옛날 대학원생들과 환경 조사하여 발표했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만났던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며 설문 내용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학문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학원생을 동원하여 당시에 설문에 응했던 그 아이들을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미국 전역을 뒤져 200명 중에 180명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단 4명만이 단 한번 감옥에 간 적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예상을 뒤엎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들을 만나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심도 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통적인 말을 하는데, 자기 동네에 한 여전도사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자기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한 여자 전도님이 자기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와 주일학교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전한 복음의 능력으로 빈민가의 젊은이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 여인이 복음을 나눔으로 한 지역의 젊은이들의 미래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이런 것입니다. 내 속에 주어진 복음, 나를 변화시킨 복음,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나눠주기만 하면, 복음 안에서 위대한 비전과 소망을 심어주기만 하면 위대한 인물들, 걸출한 인물들이 나올 것입니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민족을 변화시키고 통일한국을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복음을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의 통로,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습니다. The Living Bible를 보면 2절 앞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떠나야 합니다(1a).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떠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대가족하면 7-8명 많으면 10명 정도를 생각하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보통 몇 대가 함께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결혼을 하면 다른 지역으로 살림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집 옆에 붙여서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다른 아들이 장가를 가도 역시 아버지 집 옆에다가 집을 붙여서 지어주었습니다. 몇 대가 함께 살면서 이런 식으로 분가를 시키다보니 숫자가 적은 집도 보통 100-200명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집은 대대로 달 신인 난나르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다면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큰 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 삼촌, 숙모 등 모든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당시 사람들은 공동체를 깨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했으니 자기들이 믿는 신을 배신하고 여호와를 섬긴다는 아브라함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종교는 러시아 정교입니다.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분위기가 그랬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던 삶을 떠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환경과 분위기와 생활 습관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주는 좋지 못한 영향력과 죄악을 즐기던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은 생활 속에서 세상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 첫 번째는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삶과 그 영향력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산다는 것은 떠날 곳은 떠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떠날 곳은 떠났습니까? 버릴 것은 버렸습니까? 아직도 머물러 있고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떠나야 한다면 떠나십시오. 버려야 한다면 버리십시오. 그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좋지 못한 환경, 좋지 못한 생활, 좋지 못한 습관, 좋지 못한 가치관, 그리고 세속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등에서 떠나야 합니다.
둘째, 지시할 땅으로 가야 합니다(1b).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b)”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우르에서 가나안까지는 서쪽으로 약 1,200km 정도의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사이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북서쪽으로 약 1,200km 올라가서 도착한 곳이 하란입니다. 하란은 우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르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가나안을 향해서 가던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하였다’는 말의 원어를 살펴보면 잠시 머무른 것이 아니고 아예 거기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인 가나안까지 가야 하는데 목적한 곳이 아닌 하란에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사는데 두 번째 요구 조건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 하나님의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목적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낸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 완전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에 맞게 사는 것이 완전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분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나안이 목적지인데 비스무리하게 하란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목적지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서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셋째, 단을 쌓아야 합니다(7).
7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고 8절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는 환경이 좋기 때문에 드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내 집 장만을 못하고 이사 다니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는데 아브라함은 그보다 더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힘이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가족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전혀 생소한 땅에 가서 나그네처럼 지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뉴욕에 가면 허드슨 강이 있는데 그 강의 하류에 가면 쏠트라인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소금물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선을 말합니다.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서 허드슨 강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물이 계속 흐르게 되면 결국 민물이 바닷물의 세력을 계속 밀어내어 수원지가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허드슨 강의 salt line은 끊임없이 당기고 미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인생살이,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영력이 강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만, 영력이 약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밀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salt line을 지키는 힘은 예배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고 그 힘으로 세상을 이겼으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배는 영적인 충전을 받는 시간입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지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기름이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충전의 시간입니다. 예배가 약해지면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지고, 교회 사랑도 식어집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예배가 죽은 신자는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이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어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가 살아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님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생활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게 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생활에 생기가 넘치게 되고 새 힘이 넘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