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2008년 부활절 특강 (에스겔서 37:1-10, 요절 37:3a)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실에 금고를 여러 개 갖다 놓고 매일 밤 그것을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죽음의 사자가 이 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재물과 자신의 전 소유를 주겠으니 생명을 연장하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냉혹하게 말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네 영혼이야. 그 따위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어.” 사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자의 손목을 꽉 잡았습니다. 부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나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십시오. 더도 말고 딱 일 주일만 주십시오.” 사자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1주일을 달라고? 나는 이 날을 50년간 기다렸다. 1 주일은커녕 단 하루도 기달릴 수 없다. 아니 1 시간도, 단 1분도, 기다릴 수 없어. 네게 남은 시간은 10 초뿐이야. 각오 해.” 죽음의 사자가 9초, 8초, 5초, 2초, 1초 세어나가자 그 부자의 입술이 새파래졌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헤아리기를 그치자 부자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부자가 소유했던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죽음은 일체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죽음 앞에 모두가 슬피 웁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른 뼈들은 일체의 희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날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 골짜기로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가득 차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1). 그곳에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그 뼈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 골짜기에 많은 뼈들이 널려 있는데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2).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현상은 곧 이스라엘의 현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에스겔도 25세의 젊은 나이(B.C.597)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왔습니다(1:2). 에스겔이란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나님이 단련하시다란 뜻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끌려온 지 5년이 지나 30세 때에 선지자로 그발 강가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1). 그발 강가는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백성으로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바벨론으로 끌려온 노예 백성인 동족과 고난을 같이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조국이 망하고 성전과 성벽이 훼파되고 무너졌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33:21). 이제 그들에게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었고, 사명을 잃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루살렘이 회복될 희망은 멀어가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골짜기에서 주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수 있다고 믿느냐?” 이 질문 앞에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 3의 길인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어느 신학생이 답안지에 쓴 대답을 연상시켜줍니다. 어느 신학생이 시험 문제가 단 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백지를 낼 수 없어 시험지에다가 에스겔 식으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며칠 후에 교수님으로부터 돌려받은 채점지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주님 100점. 학생 0점”.
골짜기에 수없는 마른 뼈들은 주님을 떠나 살고 있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줍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죽은 사람이 살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면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마른 뼈에 생기가 돕니다. 마른 뼈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반석에서 샘물이 나고, 마른 막대기에서 새 싹이 납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면 광야와 사막에 길을 열고 강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지 오래되어 바싹 말라버린 뼈들을 살리어 큰 군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박차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가르고 생명의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 하시니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됩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마른 뼈들에게 주의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4-8).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모든 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이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라.” 이 말씀은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고 설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하대 정원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묘지에 가서 전도하라면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한 후에 남은 그슬린 뼈들을 향해 전도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들이 생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마른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마침내 가죽이 덮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 보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대언했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라 삐뚤어진 뼈들에게서 소리가 났습니다. 꿈틀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 저기 널려있던 이 뼈, 저 뼈들이 제 위치를 찾아 전후좌우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손발 뼈, 머리뼈, 갈비뼈, 골반 뼈들이 서로 연락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드디어 사람의 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대언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대언하는 순간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80,90년대 인하대생들은 운명과 열등감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해골로 보였습니다. 저는 요한복음 5장 25절의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그들에게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시니라.”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교회에 왔다가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체들의 행렬 속에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황돈연 선교사는 84학번으로 3지망 인생이라는 깊은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몸은 살아있으나 빠른 뼈와 같이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미국의 이한나 선교사는 그에게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일대일 성경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에게 말씀을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초점을 잃었던 그의 눈동자에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찬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살아났습니다.
이 역사는 90년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민경숙 자매는 99학번입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에 그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는 항상 머리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민요안나 목자가 말씀을 계속 대언했을 때에 그녀의 이마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가 살아났습니다.
오민정 자매는 어떻습니까? 그녀의 얼굴은 심각했습니다. 옷도 주로 어두운 옷만을 입고 다녔습니다. 삶의 의욕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박설 선교사가 말씀을 대언하고 말씀을 선포했을 때에 그녀가 밝은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한 얼굴에 기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무기력한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사는 2000년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강현덕 형제는 2001학번입니다. 그의 일학년 때의 모습은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석고상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로버트와 같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김엘리야 선교사가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웃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박은주 자매는 2005학번입니다. 일학년 때의 그의 얼굴은 우수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민요안나, 민경숙 목자가 계속 말씀을 대언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얼굴에 우수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주님의 형상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목자가 되어 양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장차 하바드대 목자가 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은경 자매 또한 어떻습니까? 그녀는 2006학번입니다. 그는 가련이었습니다. 많은 남학생들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곤 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박은주 목자가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그녀가 변했습니다. 가련이에서 밝은 주님의 아름다운 딸로 변했습니다. 이제 그는 형제들을 말씀으로 돕는 자매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이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모습, 살아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화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놀라운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대언하면 생명 역사, 회복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말씀을 믿고 고백한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말씀은 생명이 있습니다(빌2:16).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로마서 10장 14절은 말씀의 대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사람, 외치는 사람이 없으면 믿는 자들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듯이, 복음이 아무리 복된 말씀이라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구원과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대언하는 곳에 생명과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복음을 대언하지 않으면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죽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2장 5-7절을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옥토에만 뿌릴 수 없습니다. 길가, 가시밭, 돌밭 상관하지 말고 뿌려야 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에스겔서 3장 18절을 보면 생명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그 피 값을 복음을 전하지 않는 네 손에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복음을 먼저 듣고 안 우리는 ‘전해도 그만 전하지 안해도 그만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먼저 듣고 안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을 대언하면 가정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지 않던 부모님들이 믿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직장에서 말씀을 대언하면 직장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학교에서 말씀을 대언하면 캠퍼스가 변합니다. 친구가 변합니다. 선후배들이 변합니다.
4월 둘째 주일에 봄맞이 생명 축제를 갖고자 합니다. 일 년 동안 내가 꼭 전도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에게, 그리고 새 학기에 꼭 말씀을 들려주고 싶은 선배 후배들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봄맞이 생명축제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 친구는 안 돼. 불가능해. 80,90년대 학생들은 되지만 지금 학생들은 안 돼. 이렇게 생각합니까? 그들이 마른 뼈들이기 때문에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됩니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마른 뼈들을 향하여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대언하기 어렵다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기 바랍니다. 새봄맞이 생명축제에 교회로 초청하세요. 생명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초청한 분이 교회에 왔다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냥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복음을 먼저 받은 자의 의무입니다.
♬가라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을 전하겠어요♬
둘째,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9-10).
8절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대언하자 마른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입혀짐으로 사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속에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기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는 누구입니까? ‘생기’는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으로 번역되는 동시에 생기, 혹은 호흡으로도 번역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따라서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는 말씀은 죽어있는 인간이나 죽은 공동체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대언하는 동시에 성령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대언하게 되면 죽은 자들이 완벽하게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말씀은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따라서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전도할 때에 죽은 이 영혼에게 생기로 임하소서! 아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대로 성령께 대언했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9b).” 그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10b절을 읽겠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입니까?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대로 생기에게 대언하였더니 홀연히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와서 그들에게 들어가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딱딱하고 굳어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죽어있던 그들의 맥박이 고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썩은 동태 눈 같던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났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생기가 가득 차고, 어둡고 절망적인 골짜기에 밝고 희망이 넘쳤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던 마른 뼈들이 여기저기서 살아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안일의 자리, 욕심의 자리, 이기심의 자리, 불신의 자리, 절망의 자리, 원망과 불평의 자리, 부정적인 자리, tv와 인터넷에 중독되었던 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큰 군대로 변화되었습니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스런 군대, 세상 정욕에 무릎 꿇지 않고 깨어 있는 군대(삿7:3,6), 싸움에서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군대(히10:39),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믿음의 군대(엡6:13),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충성스런 군대(딤후2:4), 어떤 악조건에도 살아남을 수 있고, 어떤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군대, 고난을 사랑하는 강한 하나님의 큰 군대, 헌신을 즐거워하는 군대로 변화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나 죽은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생기이신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 때 우리의 가정이 더 이상 죽은 공동묘지가 아니라 물댄 사랑의 동산이 됩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하던 캠퍼스와 우리의 이웃과 직장이 주님의 낙원이 됩니다. 한 사람이 아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새 날이 도래합니다.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부흥이 도래합니다. 민족이 살아나고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이 민족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열방을 향하여 외치게 됩니다. 이게 부흥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부흥을 체험하고 이 역사에 쓰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새롭게 하소서 은혜의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땅에 임하소서♫아멘.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실에 금고를 여러 개 갖다 놓고 매일 밤 그것을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죽음의 사자가 이 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재물과 자신의 전 소유를 주겠으니 생명을 연장하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냉혹하게 말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네 영혼이야. 그 따위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어.” 사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자의 손목을 꽉 잡았습니다. 부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나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십시오. 더도 말고 딱 일 주일만 주십시오.” 사자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1주일을 달라고? 나는 이 날을 50년간 기다렸다. 1 주일은커녕 단 하루도 기달릴 수 없다. 아니 1 시간도, 단 1분도, 기다릴 수 없어. 네게 남은 시간은 10 초뿐이야. 각오 해.” 죽음의 사자가 9초, 8초, 5초, 2초, 1초 세어나가자 그 부자의 입술이 새파래졌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헤아리기를 그치자 부자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부자가 소유했던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죽음은 일체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죽음 앞에 모두가 슬피 웁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른 뼈들은 일체의 희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날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 골짜기로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가득 차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1). 그곳에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그 뼈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 골짜기에 많은 뼈들이 널려 있는데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2).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현상은 곧 이스라엘의 현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에스겔도 25세의 젊은 나이(B.C.597)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왔습니다(1:2). 에스겔이란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나님이 단련하시다란 뜻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끌려온 지 5년이 지나 30세 때에 선지자로 그발 강가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1). 그발 강가는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백성으로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바벨론으로 끌려온 노예 백성인 동족과 고난을 같이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조국이 망하고 성전과 성벽이 훼파되고 무너졌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33:21). 이제 그들에게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었고, 사명을 잃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루살렘이 회복될 희망은 멀어가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골짜기에서 주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수 있다고 믿느냐?” 이 질문 앞에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 3의 길인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어느 신학생이 답안지에 쓴 대답을 연상시켜줍니다. 어느 신학생이 시험 문제가 단 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백지를 낼 수 없어 시험지에다가 에스겔 식으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며칠 후에 교수님으로부터 돌려받은 채점지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주님 100점. 학생 0점”.
골짜기에 수없는 마른 뼈들은 주님을 떠나 살고 있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줍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죽은 사람이 살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면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마른 뼈에 생기가 돕니다. 마른 뼈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반석에서 샘물이 나고, 마른 막대기에서 새 싹이 납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면 광야와 사막에 길을 열고 강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지 오래되어 바싹 말라버린 뼈들을 살리어 큰 군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박차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가르고 생명의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 하시니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됩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마른 뼈들에게 주의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4-8).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모든 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이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라.” 이 말씀은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고 설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하대 정원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묘지에 가서 전도하라면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한 후에 남은 그슬린 뼈들을 향해 전도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들이 생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마른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마침내 가죽이 덮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 보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대언했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라 삐뚤어진 뼈들에게서 소리가 났습니다. 꿈틀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 저기 널려있던 이 뼈, 저 뼈들이 제 위치를 찾아 전후좌우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손발 뼈, 머리뼈, 갈비뼈, 골반 뼈들이 서로 연락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드디어 사람의 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대언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대언하는 순간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80,90년대 인하대생들은 운명과 열등감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해골로 보였습니다. 저는 요한복음 5장 25절의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그들에게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시니라.”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교회에 왔다가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체들의 행렬 속에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황돈연 선교사는 84학번으로 3지망 인생이라는 깊은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몸은 살아있으나 빠른 뼈와 같이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미국의 이한나 선교사는 그에게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일대일 성경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에게 말씀을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초점을 잃었던 그의 눈동자에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찬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살아났습니다.
이 역사는 90년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민경숙 자매는 99학번입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에 그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는 항상 머리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민요안나 목자가 말씀을 계속 대언했을 때에 그녀의 이마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가 살아났습니다.
오민정 자매는 어떻습니까? 그녀의 얼굴은 심각했습니다. 옷도 주로 어두운 옷만을 입고 다녔습니다. 삶의 의욕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박설 선교사가 말씀을 대언하고 말씀을 선포했을 때에 그녀가 밝은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한 얼굴에 기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무기력한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사는 2000년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강현덕 형제는 2001학번입니다. 그의 일학년 때의 모습은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석고상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로버트와 같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김엘리야 선교사가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웃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박은주 자매는 2005학번입니다. 일학년 때의 그의 얼굴은 우수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민요안나, 민경숙 목자가 계속 말씀을 대언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얼굴에 우수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주님의 형상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목자가 되어 양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장차 하바드대 목자가 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은경 자매 또한 어떻습니까? 그녀는 2006학번입니다. 그는 가련이었습니다. 많은 남학생들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곤 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박은주 목자가 말씀을 대언했을 때에 그녀가 변했습니다. 가련이에서 밝은 주님의 아름다운 딸로 변했습니다. 이제 그는 형제들을 말씀으로 돕는 자매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이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모습, 살아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화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놀라운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대언하면 생명 역사, 회복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말씀을 믿고 고백한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말씀은 생명이 있습니다(빌2:16).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로마서 10장 14절은 말씀의 대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사람, 외치는 사람이 없으면 믿는 자들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듯이, 복음이 아무리 복된 말씀이라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구원과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대언하는 곳에 생명과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복음을 대언하지 않으면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죽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2장 5-7절을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옥토에만 뿌릴 수 없습니다. 길가, 가시밭, 돌밭 상관하지 말고 뿌려야 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에스겔서 3장 18절을 보면 생명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그 피 값을 복음을 전하지 않는 네 손에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복음을 먼저 듣고 안 우리는 ‘전해도 그만 전하지 안해도 그만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먼저 듣고 안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을 대언하면 가정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지 않던 부모님들이 믿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직장에서 말씀을 대언하면 직장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학교에서 말씀을 대언하면 캠퍼스가 변합니다. 친구가 변합니다. 선후배들이 변합니다.
4월 둘째 주일에 봄맞이 생명 축제를 갖고자 합니다. 일 년 동안 내가 꼭 전도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에게, 그리고 새 학기에 꼭 말씀을 들려주고 싶은 선배 후배들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봄맞이 생명축제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 친구는 안 돼. 불가능해. 80,90년대 학생들은 되지만 지금 학생들은 안 돼. 이렇게 생각합니까? 그들이 마른 뼈들이기 때문에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됩니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마른 뼈들을 향하여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대언하기 어렵다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기 바랍니다. 새봄맞이 생명축제에 교회로 초청하세요. 생명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초청한 분이 교회에 왔다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냥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복음을 먼저 받은 자의 의무입니다.
♬가라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을 전하겠어요♬
둘째,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9-10).
8절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대언하자 마른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입혀짐으로 사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속에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기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는 누구입니까? ‘생기’는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으로 번역되는 동시에 생기, 혹은 호흡으로도 번역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따라서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는 말씀은 죽어있는 인간이나 죽은 공동체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대언하는 동시에 성령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대언하게 되면 죽은 자들이 완벽하게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말씀은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따라서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전도할 때에 죽은 이 영혼에게 생기로 임하소서! 아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대로 성령께 대언했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9b).” 그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10b절을 읽겠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입니까?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대로 생기에게 대언하였더니 홀연히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와서 그들에게 들어가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딱딱하고 굳어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죽어있던 그들의 맥박이 고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썩은 동태 눈 같던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났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생기가 가득 차고, 어둡고 절망적인 골짜기에 밝고 희망이 넘쳤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던 마른 뼈들이 여기저기서 살아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안일의 자리, 욕심의 자리, 이기심의 자리, 불신의 자리, 절망의 자리, 원망과 불평의 자리, 부정적인 자리, tv와 인터넷에 중독되었던 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큰 군대로 변화되었습니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스런 군대, 세상 정욕에 무릎 꿇지 않고 깨어 있는 군대(삿7:3,6), 싸움에서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군대(히10:39),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믿음의 군대(엡6:13),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충성스런 군대(딤후2:4), 어떤 악조건에도 살아남을 수 있고, 어떤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군대, 고난을 사랑하는 강한 하나님의 큰 군대, 헌신을 즐거워하는 군대로 변화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나 죽은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생기이신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 때 우리의 가정이 더 이상 죽은 공동묘지가 아니라 물댄 사랑의 동산이 됩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하던 캠퍼스와 우리의 이웃과 직장이 주님의 낙원이 됩니다. 한 사람이 아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새 날이 도래합니다.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부흥이 도래합니다. 민족이 살아나고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이 민족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열방을 향하여 외치게 됩니다. 이게 부흥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부흥을 체험하고 이 역사에 쓰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새롭게 하소서 은혜의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땅에 임하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