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2008년 4월 첫 주 (누가복음 15:1-10, 요절 15:7)
잃은 양을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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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출생하여 1962년에 세상을 떠난 Kreisler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용하는 악기에 대해 만족을 하지 못하고 좋은 악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평소에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모아놓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여행하다가 아주 좋은 뛰어난 바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 수 없어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돈을 마련하여 이 악기를 사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잘 보관하여 주십시오.” 그는 돈을 마련하여 악기점에 갔을 때에는 이미 다른 악기 수집가에게 팔려 있었습니다. 그는 악기 수집가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그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 악기 수집가는 이미 자신의 collection 목록에 들어갔기 때문에 팔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Kreisler는 바이올린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집을 나서다가 뒤돌아서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그 악기가 침묵하기 전 저에게 한번만 연주할 기회를 주십시오.” 주인은 그 부탁에 쾌히 응했습니다. 그가 주인의 허락을 받고 그 악기를 들고 한 10여분동안 신들린 듯 연주를 했습니다. 그의 연주가 계속되면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악기 수집가는 그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때부터 이 악기가 그의 손에서 신기한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주인의 손에 있지 않은 물건은 잃어버려진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을 떠난 모든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우리가 방황하는 까닭, 이 모든 원인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은 하와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제일 먼저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은 불굴의 투지와 노력으로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들, 명예와 사랑, 그리고 물질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었을 때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과 불안하고 답답함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우리를 찾고 계신 분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늘 함께 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안내자 성령님이십니다.
본문은 잃어버린 한 양과 드라크마(은전)로 비유를 들어 잃어버려진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잃어버린 인생들을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내 마음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기도합니다.
첫째. 잃은 양의 비유(1-7).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왔습니다(1). 그들은 공인된 죄인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정죄하고 멀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세리 마태를 12제자 중 하나로 뽑으시고 늘 함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동되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로 인해 상하고 통회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영접하시고 그들을 섬겨주셨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백 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아마 그 양은 평소에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문제 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양은 호기심이 많았고 자유분방했습니다. 또 반발심이 강한 양이기도 했습니다. 그 양은 늘 산 너머 저곳에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동경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목자의 간섭을 받지 않아 좋았습니다.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그 양은 의기양양하게 점점 먼 길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합니다. 또한 방향감각이 없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리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목자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함이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 양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자 없이도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돌에 부딪혀 발에 상처가 나고 가시에 찔려 몸에 피가 났습니다. 마시고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양은 고독하고 쓸쓸했습니다.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목자의 품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양은 목자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스스로 나아갈 힘과 용기가 없었고 또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애타게 목자의 이름만 부르며 도움을 요청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잃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이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잃은 양 한 마리는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까짓 한마리쯤 잃어도 괜찮아. 나에게는 아흔 아홉 마리가 있어. 그 놈은 목자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나갔으니 실컷 고생하다가 이리떼에게 잡혀 먹히던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무조건 찾아 나섰습니다. 목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유익인가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맹수에게 쫓기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 마리를 찾을 때 아흔 아홉 마리 남은 양에 대해 무슨 일이 생기면 더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잃어버린 한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고자 나섰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되 찾을 때까지 찾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기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이 갈만한 곳은 다 찾아갔습니다. 목자는 한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물질과 모든 진심을 다 쏟았습니다. 찾도록 찾는 목자의 심정! 포기치 않는 목자의 심정!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경제원칙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한 양은 100분의 1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이 목자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부모는 많은 자식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하나쯤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5형제를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식을 두지 못한 큰 형님이 5명 중에 한 명을 양자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형님이 자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 5형제 중 누구를 양자로 줄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장남은 장남이기 때문에 줄 수 없고, 차남은 차남이어서 줄 수 없고, 셋째는 셋째여서 줄 수 없고, 넷째는 넷째여서 줄 수 없고, 다섯째는 막내라 줄 수 없었습니다. 이게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특히 대량 생산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가 있어야 전체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는 전체의 총화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막8:36).
5,6절을 보겠습니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목자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벼랑 끝에 가시덤불에 찔려 죽어가고 있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목자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달려가 그 양을 품에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는 마음의 기쁨을 도저히 혼자 간직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즉시 삼겹살 파티를 준비하여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잔치 비용이 한 마리 양 값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기쁨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기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찾는 수고가 큰 만큼 찾은 기쁨도 컸습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잃은 양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들의 실존을 가리키고, 한 양을 찾고 찾으시는 목자는 하나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품에서 무한한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갈 길 로 갔다”고 했습니다(사53:6). 또 베드로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지만 어두운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벧전2:9).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와 그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잃은 영혼을 찾고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자기 열심히 살아가지만 늘 빈 그물인 베드로를 찾고 찾아 참 생명과 구원을 얻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넌2:25).” 예수님은 무지한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찾고 찾아 그의 실존을 찾아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일생동안 잃은 찾아 유모처럼 섬겼습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2:7).” 유모는 젖먹이 아기를 둔 어머니를 말합니다. 어머니는 젖먹이 어린 아기를 어떻게 기릅니까? 엄마는 젖먹이 아기를 애지중지하게 여깁니다. 엄마는 오늘 젖 몇 리터 먹었지. 오늘 우유 얼마치 먹었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기를 위해 전적으로 희생합니다. 바울은 잃은 양들을 이렇게 섬겼습니다.
오늘날만큼 죄로 인해 길을 잃고 헤매는 시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세상에서 참되게 살고자 하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래에 대한 불확실로 인해 미래의 소망이 보이지 않아 어두움에 헤매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찾고 찾으십니다. 주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고 찾아 잃은 실존을 찾게 하십니다. Amazing grace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국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벌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이지만 그 배후에는 노예 선장이었던 죤 뉴톤이 나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2만 명의 노예들은 사람이었고 나는 짐승이었다. 그리고 나는 죄인이었고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잃은 자였지만 주님 안에서 찾은 자가 되었다(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죤 뉴톤은 회심한 후에 그 유명한 Amazing grace를 작시하였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그리고 목자의 심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목자의 기쁨은 잃은 양을 찾고 찾는 데 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산과 강과 사막을 건너기도 하며 어떤 수고와 희생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새 생명 축제를 갖습니다. 우리는 지금 잃은 한 영혼을 찾고 찾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에게 잃은 양을 찾고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 직장과 캠퍼스에 잃은 한 생명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드라크마의 비유(8-1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해 주셨으나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양은 100마리중 하나이었으나, 두 번째 드라크마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는 10개 중 하나이었습니다. 당시의 드라크마는 하루 일군의 품삯이었는데, 10개 중 하나를 잃은 것은 당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생존에 관한 것입니다. 또 당시 여인들은 드라크마 열 개를 실로 꿰어서 목걸이를 하기도 하고 머리 장식물로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남편이 준 결혼 선물이라면 더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의 구석구석을 쓸며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의 옛집 특히 서민의 집들은 대부분 집에 창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서 집의 구석구석을 비로 쓸어 먼지를 일으키며 찾고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식구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부지런히 쓸고 쓸며 찾았습니다. 그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찾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하나의 양을 찾는 목자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잃어버린 인간을 찾으시는 성령 하나님이실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령님으로 보기보다 교회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사명(Great Commission)이 잃은 영혼을 찾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에 전도가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본문의 여인처럼 잃은 드라크마를 최선을 다하여 찾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최선을 다해 전도함으로 여러분과 제가 오늘날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최선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최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평신도 지도자 중 한 사람은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일 것입니다. 수년전 타임지는 지미 카터를 가르쳐 대통령 퇴임 후 오히려 더 큰 존경을 받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지도자로 그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그는 세계 분쟁이 있는 모든 곳에 화해의 사신으로 찾아다니고, 해비타트,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망치를 들고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줍니다. 매주일이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그의 아내와 더불어 교회청소를 하고, 전도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인생 좌우명은 “Why not the best?”입니다. 이 좌우명은 그가 사관학교 졸업 후 제독과 임관 인터뷰를 할 때 제독이 그의 학교 성적에 대해 “그것이 당신의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제독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물론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때 제독은 갑자기 큰 톤으로 질문했습니다. “Why not the best?” 그 때 그의 목소리가 마치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좌우명은 “Why not the best?” 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일에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 사무실에서 차 한 잔을 나눌 때 한 목사님이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했더니 얼굴이 상기가 되고 긴장하면서 “그게 뭡니까?”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박대통령을 만나거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 해 주십시오” 하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러지 않아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지미 카터가 박대통령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외신에 알려지면서 미국 국내에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정식 회의 시간에는 미합중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박대통령과 정치·외교 현안들을 최선을 다하여 의논했습니다. 그 후 개인적인 시간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인간 박정희에게 제가 믿는 저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최선을 다하여 전했습니다. 이 인터뷰 시간이 끝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는 기자들이 있다면 저는 그들에게 다시 예수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하여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다 도망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잃어버려진 이웃들, 잊어서는 안 될 이웃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비로 쓸면서 구석구석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찾지 않으니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은 한 영혼을 위해 샅샅이, 구석구석을 비로 쓸듯이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은전은 저 밖의 낭떠러지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주위, 우리 집 가까이, 아주 가까이에서 여러분과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이 소중한 우리의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밝혀서 찾아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7절과 1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은 7절과 10절에서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늘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얼마나 큰 역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회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가정을 변화시키고 캠퍼스를 변화시키고 직장과 시대를 변화시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의 회개는 수많은 교회를 탄생시키고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어거스틴 한 사람의 회개는 당시 기독교를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고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회개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한 인물뿐만 아니라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한 사람의 회개는 주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어두운 밤하늘에 진리의 등불이 하나 밝혀집니다. 그러면 주의가 환해지고 어두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의 일대일 전도와 일대일 성경 공부는 이 시대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우리는 잃은 한 영혼을 찾고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서 우리 주위에 있는 잃은 영혼을 찾고 찾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잃은 양을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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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출생하여 1962년에 세상을 떠난 Kreisler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용하는 악기에 대해 만족을 하지 못하고 좋은 악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평소에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모아놓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여행하다가 아주 좋은 뛰어난 바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 수 없어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돈을 마련하여 이 악기를 사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잘 보관하여 주십시오.” 그는 돈을 마련하여 악기점에 갔을 때에는 이미 다른 악기 수집가에게 팔려 있었습니다. 그는 악기 수집가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그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 악기 수집가는 이미 자신의 collection 목록에 들어갔기 때문에 팔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Kreisler는 바이올린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집을 나서다가 뒤돌아서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그 악기가 침묵하기 전 저에게 한번만 연주할 기회를 주십시오.” 주인은 그 부탁에 쾌히 응했습니다. 그가 주인의 허락을 받고 그 악기를 들고 한 10여분동안 신들린 듯 연주를 했습니다. 그의 연주가 계속되면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악기 수집가는 그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때부터 이 악기가 그의 손에서 신기한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주인의 손에 있지 않은 물건은 잃어버려진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을 떠난 모든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우리가 방황하는 까닭, 이 모든 원인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은 하와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제일 먼저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은 불굴의 투지와 노력으로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들, 명예와 사랑, 그리고 물질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었을 때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과 불안하고 답답함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우리를 찾고 계신 분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늘 함께 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안내자 성령님이십니다.
본문은 잃어버린 한 양과 드라크마(은전)로 비유를 들어 잃어버려진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잃어버린 인생들을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내 마음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기도합니다.
첫째. 잃은 양의 비유(1-7).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왔습니다(1). 그들은 공인된 죄인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정죄하고 멀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세리 마태를 12제자 중 하나로 뽑으시고 늘 함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동되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로 인해 상하고 통회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영접하시고 그들을 섬겨주셨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백 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아마 그 양은 평소에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문제 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양은 호기심이 많았고 자유분방했습니다. 또 반발심이 강한 양이기도 했습니다. 그 양은 늘 산 너머 저곳에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동경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목자의 간섭을 받지 않아 좋았습니다.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그 양은 의기양양하게 점점 먼 길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합니다. 또한 방향감각이 없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리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목자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함이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 양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자 없이도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돌에 부딪혀 발에 상처가 나고 가시에 찔려 몸에 피가 났습니다. 마시고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양은 고독하고 쓸쓸했습니다.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목자의 품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양은 목자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스스로 나아갈 힘과 용기가 없었고 또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애타게 목자의 이름만 부르며 도움을 요청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잃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이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잃은 양 한 마리는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까짓 한마리쯤 잃어도 괜찮아. 나에게는 아흔 아홉 마리가 있어. 그 놈은 목자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나갔으니 실컷 고생하다가 이리떼에게 잡혀 먹히던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무조건 찾아 나섰습니다. 목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유익인가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맹수에게 쫓기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 마리를 찾을 때 아흔 아홉 마리 남은 양에 대해 무슨 일이 생기면 더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잃어버린 한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고자 나섰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되 찾을 때까지 찾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기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이 갈만한 곳은 다 찾아갔습니다. 목자는 한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물질과 모든 진심을 다 쏟았습니다. 찾도록 찾는 목자의 심정! 포기치 않는 목자의 심정!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경제원칙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한 양은 100분의 1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이 목자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부모는 많은 자식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하나쯤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5형제를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식을 두지 못한 큰 형님이 5명 중에 한 명을 양자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형님이 자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 5형제 중 누구를 양자로 줄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장남은 장남이기 때문에 줄 수 없고, 차남은 차남이어서 줄 수 없고, 셋째는 셋째여서 줄 수 없고, 넷째는 넷째여서 줄 수 없고, 다섯째는 막내라 줄 수 없었습니다. 이게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특히 대량 생산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가 있어야 전체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는 전체의 총화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막8:36).
5,6절을 보겠습니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목자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벼랑 끝에 가시덤불에 찔려 죽어가고 있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목자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달려가 그 양을 품에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는 마음의 기쁨을 도저히 혼자 간직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즉시 삼겹살 파티를 준비하여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잔치 비용이 한 마리 양 값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기쁨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기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찾는 수고가 큰 만큼 찾은 기쁨도 컸습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잃은 양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들의 실존을 가리키고, 한 양을 찾고 찾으시는 목자는 하나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품에서 무한한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갈 길 로 갔다”고 했습니다(사53:6). 또 베드로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지만 어두운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벧전2:9).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와 그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잃은 영혼을 찾고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자기 열심히 살아가지만 늘 빈 그물인 베드로를 찾고 찾아 참 생명과 구원을 얻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넌2:25).” 예수님은 무지한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찾고 찾아 그의 실존을 찾아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일생동안 잃은 찾아 유모처럼 섬겼습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2:7).” 유모는 젖먹이 아기를 둔 어머니를 말합니다. 어머니는 젖먹이 어린 아기를 어떻게 기릅니까? 엄마는 젖먹이 아기를 애지중지하게 여깁니다. 엄마는 오늘 젖 몇 리터 먹었지. 오늘 우유 얼마치 먹었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기를 위해 전적으로 희생합니다. 바울은 잃은 양들을 이렇게 섬겼습니다.
오늘날만큼 죄로 인해 길을 잃고 헤매는 시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세상에서 참되게 살고자 하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래에 대한 불확실로 인해 미래의 소망이 보이지 않아 어두움에 헤매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찾고 찾으십니다. 주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고 찾아 잃은 실존을 찾게 하십니다. Amazing grace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국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벌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이지만 그 배후에는 노예 선장이었던 죤 뉴톤이 나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2만 명의 노예들은 사람이었고 나는 짐승이었다. 그리고 나는 죄인이었고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잃은 자였지만 주님 안에서 찾은 자가 되었다(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죤 뉴톤은 회심한 후에 그 유명한 Amazing grace를 작시하였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그리고 목자의 심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목자의 기쁨은 잃은 양을 찾고 찾는 데 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산과 강과 사막을 건너기도 하며 어떤 수고와 희생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새 생명 축제를 갖습니다. 우리는 지금 잃은 한 영혼을 찾고 찾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에게 잃은 양을 찾고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 직장과 캠퍼스에 잃은 한 생명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드라크마의 비유(8-1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해 주셨으나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양은 100마리중 하나이었으나, 두 번째 드라크마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는 10개 중 하나이었습니다. 당시의 드라크마는 하루 일군의 품삯이었는데, 10개 중 하나를 잃은 것은 당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생존에 관한 것입니다. 또 당시 여인들은 드라크마 열 개를 실로 꿰어서 목걸이를 하기도 하고 머리 장식물로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남편이 준 결혼 선물이라면 더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의 구석구석을 쓸며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의 옛집 특히 서민의 집들은 대부분 집에 창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서 집의 구석구석을 비로 쓸어 먼지를 일으키며 찾고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식구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부지런히 쓸고 쓸며 찾았습니다. 그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찾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하나의 양을 찾는 목자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잃어버린 인간을 찾으시는 성령 하나님이실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령님으로 보기보다 교회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사명(Great Commission)이 잃은 영혼을 찾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에 전도가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본문의 여인처럼 잃은 드라크마를 최선을 다하여 찾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최선을 다해 전도함으로 여러분과 제가 오늘날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최선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최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평신도 지도자 중 한 사람은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일 것입니다. 수년전 타임지는 지미 카터를 가르쳐 대통령 퇴임 후 오히려 더 큰 존경을 받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지도자로 그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그는 세계 분쟁이 있는 모든 곳에 화해의 사신으로 찾아다니고, 해비타트,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망치를 들고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줍니다. 매주일이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그의 아내와 더불어 교회청소를 하고, 전도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인생 좌우명은 “Why not the best?”입니다. 이 좌우명은 그가 사관학교 졸업 후 제독과 임관 인터뷰를 할 때 제독이 그의 학교 성적에 대해 “그것이 당신의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제독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물론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때 제독은 갑자기 큰 톤으로 질문했습니다. “Why not the best?” 그 때 그의 목소리가 마치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좌우명은 “Why not the best?” 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일에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 사무실에서 차 한 잔을 나눌 때 한 목사님이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했더니 얼굴이 상기가 되고 긴장하면서 “그게 뭡니까?”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박대통령을 만나거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 해 주십시오” 하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러지 않아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지미 카터가 박대통령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외신에 알려지면서 미국 국내에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정식 회의 시간에는 미합중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박대통령과 정치·외교 현안들을 최선을 다하여 의논했습니다. 그 후 개인적인 시간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인간 박정희에게 제가 믿는 저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최선을 다하여 전했습니다. 이 인터뷰 시간이 끝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는 기자들이 있다면 저는 그들에게 다시 예수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하여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다 도망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잃어버려진 이웃들, 잊어서는 안 될 이웃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비로 쓸면서 구석구석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찾지 않으니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은 한 영혼을 위해 샅샅이, 구석구석을 비로 쓸듯이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은전은 저 밖의 낭떠러지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주위, 우리 집 가까이, 아주 가까이에서 여러분과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이 소중한 우리의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밝혀서 찾아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7절과 1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은 7절과 10절에서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늘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얼마나 큰 역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회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가정을 변화시키고 캠퍼스를 변화시키고 직장과 시대를 변화시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의 회개는 수많은 교회를 탄생시키고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어거스틴 한 사람의 회개는 당시 기독교를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고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회개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한 인물뿐만 아니라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한 사람의 회개는 주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어두운 밤하늘에 진리의 등불이 하나 밝혀집니다. 그러면 주의가 환해지고 어두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의 일대일 전도와 일대일 성경 공부는 이 시대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우리는 잃은 한 영혼을 찾고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서 우리 주위에 있는 잃은 영혼을 찾고 찾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