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2008년 4월 생명 축제(누가복음 15:11-24, 요절, 15:24)
하나님의 사랑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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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로, 흔히 탕자의 비유, 혹은 탕자의 이야기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노예 선장이었던 죤 뉴톤은 이 말씀을 듣고 탕아의 삶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램브란트는 그의 생애 중에 유명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중에 탕자의 귀환이란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탕자(prodigal son)란 뜻은 낭비해 버린(prodigal), 혹은 탕진한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미리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하여 먼 나라에 가서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다 탕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이 태어날 때 무한한 가능성, 시간과 건강, 그리고 재능 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낭비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보통 사람은 뇌의 10%를 사용하는데, 천재는 15-20%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그 비율이 10%가 아니라 6%라고 수정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와서는 인간이 두뇌를 단지 1% 이하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으며, 최근에는 인간의 두뇌 활용도가 단지 0.1%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두뇌의 15%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아들만 낭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많은 것을 낭비하셨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간 아들을 걱정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셨고, 재물을 낭비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사랑을 낭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그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11,12).
어느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11,12). 유산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모님이 지금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맏아들에게는 유산의 2/3, 차자에게는 1/3을 분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1/3의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아버지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대 거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소유권의 자유와 그 처분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막상 작은 아들에게 재산의 분깃을 나눠준 뒤 아버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유혹이 넘치는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농촌은 피폐되었지만, 도시는 번창하는 가운데 쾌락과 소비의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탕자가 되기에 알맞은 조건이 이미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타락의 자유로 전락되고 있었습니다. 보통 유학을 떠나면 고생길이지만, 둘째 아들에게는 도시 생활이 유혹과 타락의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분배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과의 관계이지, 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투자해 얻고 싶은 것은 아들의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고 할 정도면 이미 그 아들의 마음에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이고, 마음이 이미 아버지를 떠나 있는 삐뚤어진 병든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집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면 의미가 없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재산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 듯 재산을 나눠줄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기까지만’ 이라는 선이 없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에스키모족은 남을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의로운 사람을 남자일 경우 ‘펭귄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일 경우 ‘연어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5월의 남극은 해가 뜨지 않는 암흑의 대 빙원입니다. 펭귄의 암놈은 5월을 기다렸다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알을 낳는데 하나만 낳습니다. 얼음 바닥이 아닌 곳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알이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 알을 지키고 품는 것은 수놈이 담당합니다. 알이 깨기까지 먹지도 못한 채 꼬박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암놈은 먹이를 구하기 위한 기나긴 장정을 떠납니다. 바다에 이르러 새우 종류의 먹이를 잔뜩 뱃속에 저장시킨 다음 알을 낳은 곳을 향하여 빙원을 가로질러 되돌아옵니다. 돌아오면 새끼가 이미 부화되어 있습니다. 수놈과 교대해서 뱃속에 저장해 온 양식을 소처럼 되새김질로 잘 반죽하여 새끼에게 먹입니다. 달포 남짓 꼬박 굶은 상태에서 눈보라와 폭풍 속에 시달려 체력 소모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펭귄 아버지는 아내가 마련해온 먹이를 먹고 싶지만 애써 외면한 채 굶주림에 비틀대며 바다를 향합니다. 바다로 향하는 펭귄의 아버지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필사적으로 걷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미끄러지고 나뒹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버지 펭귄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 눈을 감습니다. 본능적인 새끼에 대한 애정은 이처럼 아름다우면서 처절합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품을 떠나 탕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순종의 자식이 되고 반발심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여 문둥병 환자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세리와 같이 이기적인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습니다(엡2:1-3). 인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한1서 4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풍족합니다(13-19절).
재산을 나누어 준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처음에는 아버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이고자 얼마동안은 예배당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먼 나라의 선정적인 분위기에 조금씩 마음을 뺏겼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환락가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여자들은 돈 많고 생각 없는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는 젊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정욕대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룸살롱에서 창기와 어울려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는 아까운 줄을 모르고 돈을 뿌리며 다녔습니다. 사치와 허영에 들떠있었습니다.
그 결국이 어떠합니까? 13b,14a절을 보겠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는 이제 거지가 되었습니다. 돈이 없는 그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는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재산을 다 허비한 후’ 란 단순히 물질을 허비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젊음, 가능성, 지혜, 시간, 거룩함과 순결 등의 상실을 포함합니다. 잃어버린 돈은 다시 벌어서 모을 수 있지만 젊음과 순결, 거룩함과 시간은 한 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집 나간 탕자는 모든 것을 다 없이한 후 결국은 돼지 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돼지 치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은 돼지와 같은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절망과 공포 속에서 돼지의 사료인 쥐엄 열매를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더욱더 비극적인 것은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절망 중에 무엇을 기억했습니까?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의 품을 기억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키다’는 헬라어 원문에 보면 정신 이상 상태에서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이 하나님 품을 떠나면 그때부터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모두가 정신병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탐닉하고, 돈을 탐닉하고, 성적인 대상을 탐닉하고, 쾌락을 탐닉합니다. 이제 탕자가 제 정신이 돌아오자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탕자는 아버지 품을 떠난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 좋았습니다. 재산을 탕진하며 즐길 때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다 없이하고, 주리고, 돼지를 치면서 조금씩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멸시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죄인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아들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할 생각을 하면 도저히 발걸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 집을 기억했습니다. 아버지가 품꾼들에게까지 풍족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풍성한 사랑의 확신이 발길을 아버지 짐으로 돌릴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입니다. 그리했을 때에 그는 자신의 냄새 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 나는 누더기 옷을 입은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아무 공로 없이 두 손 들고 나아갔습니다. 재산을 나눠 주기까지 아끼고 사랑하시던 그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고 나갔습니다. 지금도 자기를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생각할 때 용기가 났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의 하나는 풍족한 사랑의 경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얼마나 풍성하냐면 로마서 5장 5절을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쏟아 붓다는 흘러넘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이성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죄를 일곱에 일곱을 짓고 회개하였노라 하면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죄를 회개했을 때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낙원으로 인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림과 용서함이 있습니다(20,21).
20절을 보겠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도시로 떠난 뒤 늘 도시로 향한 길을 쳐다보며 그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끈질기게 기다렸습니다. 이 기다림 때문에 아버지는 먼 거리에 있는데도 그의 아들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먼저 사랑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오래오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 기다리게 하는 힘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북한에 두고 온 아내를 반세기 이상 기다렸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면서도 “지금 그 사람은 저 달을 쳐다보고 있겠지.” 라고 속삭이면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갈보리는 기다림의 언덕이요, 십자가는 기다림의 절정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다리는 힘은 눈을 밝게 해 줍니다.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대번에 귀환하는 아들을 알아볼 만큼 아버지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 자식의 모습을 보자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갔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입을 맞추니”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하여 입을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이 입맞춤은 아들의 과거에 대한 넉넉한 용서를 전달하는 아버지의 메시지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앞에 서자마자 아들은 엎드려 그의 죄송한 마음을 토해내며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처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들이 말을 끝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을 다시 맞추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괜찮아, 아들아, 내가 알아, 내가 다 알아.” 그리고 다시 또 다시 입을 맞춥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용서의 선언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해 놓으시고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괜찮아, 난 이미 다 용서 했어”
넷째, 하나님의 사랑은 회복입니다(22-24).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용서로 만족할 수 없으십니다. 그는 아들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새 출발할 수 있도록 그의 신분을 완벽하게 회복하여 주십니다. 22,23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귀환하는 아들을 심문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제일 좋은 새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새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새 신을 신겨 주셨습니다. 모두가 새 출발을 위한 은총의 준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오자마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의의 예복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는 자녀라고 새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의 새 신을 신고 새롭게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새 삶은 환희의 잔치로 시작됩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석상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선언해 주십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야!”
여러분은 아버지의 이런 선언을 듣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 돌아와야 합니다. 17절과 20절을 보면 “스스로 돌이켰다”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데 최대의 장애물은 죄 문제와 죄책감입니다. 바로 이런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버지 하나님도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아들의 고통은 아버지의 고통이요, 아들의 아픔은 바로 아버지의 아픔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가 받을 고통을 그가 대신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고백할 시간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저의 죄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저의 아버지로 모십니다.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믿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앞으로 새 인생을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새 삶을 인도하시고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 사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사랑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그의 넉넉한 사랑의 품에 안아 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안기십시오.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으로 오십시오. 지금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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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로, 흔히 탕자의 비유, 혹은 탕자의 이야기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노예 선장이었던 죤 뉴톤은 이 말씀을 듣고 탕아의 삶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램브란트는 그의 생애 중에 유명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중에 탕자의 귀환이란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탕자(prodigal son)란 뜻은 낭비해 버린(prodigal), 혹은 탕진한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미리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하여 먼 나라에 가서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다 탕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이 태어날 때 무한한 가능성, 시간과 건강, 그리고 재능 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낭비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보통 사람은 뇌의 10%를 사용하는데, 천재는 15-20%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그 비율이 10%가 아니라 6%라고 수정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와서는 인간이 두뇌를 단지 1% 이하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으며, 최근에는 인간의 두뇌 활용도가 단지 0.1%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두뇌의 15%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아들만 낭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많은 것을 낭비하셨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간 아들을 걱정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셨고, 재물을 낭비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사랑을 낭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그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11,12).
어느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11,12). 유산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모님이 지금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맏아들에게는 유산의 2/3, 차자에게는 1/3을 분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1/3의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아버지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대 거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소유권의 자유와 그 처분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막상 작은 아들에게 재산의 분깃을 나눠준 뒤 아버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유혹이 넘치는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농촌은 피폐되었지만, 도시는 번창하는 가운데 쾌락과 소비의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탕자가 되기에 알맞은 조건이 이미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타락의 자유로 전락되고 있었습니다. 보통 유학을 떠나면 고생길이지만, 둘째 아들에게는 도시 생활이 유혹과 타락의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분배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과의 관계이지, 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투자해 얻고 싶은 것은 아들의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고 할 정도면 이미 그 아들의 마음에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이고, 마음이 이미 아버지를 떠나 있는 삐뚤어진 병든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집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면 의미가 없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재산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 듯 재산을 나눠줄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기까지만’ 이라는 선이 없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에스키모족은 남을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의로운 사람을 남자일 경우 ‘펭귄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일 경우 ‘연어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5월의 남극은 해가 뜨지 않는 암흑의 대 빙원입니다. 펭귄의 암놈은 5월을 기다렸다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알을 낳는데 하나만 낳습니다. 얼음 바닥이 아닌 곳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알이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 알을 지키고 품는 것은 수놈이 담당합니다. 알이 깨기까지 먹지도 못한 채 꼬박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암놈은 먹이를 구하기 위한 기나긴 장정을 떠납니다. 바다에 이르러 새우 종류의 먹이를 잔뜩 뱃속에 저장시킨 다음 알을 낳은 곳을 향하여 빙원을 가로질러 되돌아옵니다. 돌아오면 새끼가 이미 부화되어 있습니다. 수놈과 교대해서 뱃속에 저장해 온 양식을 소처럼 되새김질로 잘 반죽하여 새끼에게 먹입니다. 달포 남짓 꼬박 굶은 상태에서 눈보라와 폭풍 속에 시달려 체력 소모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펭귄 아버지는 아내가 마련해온 먹이를 먹고 싶지만 애써 외면한 채 굶주림에 비틀대며 바다를 향합니다. 바다로 향하는 펭귄의 아버지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필사적으로 걷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미끄러지고 나뒹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버지 펭귄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 눈을 감습니다. 본능적인 새끼에 대한 애정은 이처럼 아름다우면서 처절합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품을 떠나 탕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순종의 자식이 되고 반발심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여 문둥병 환자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세리와 같이 이기적인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습니다(엡2:1-3). 인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한1서 4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풍족합니다(13-19절).
재산을 나누어 준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처음에는 아버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이고자 얼마동안은 예배당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먼 나라의 선정적인 분위기에 조금씩 마음을 뺏겼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환락가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여자들은 돈 많고 생각 없는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는 젊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정욕대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룸살롱에서 창기와 어울려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는 아까운 줄을 모르고 돈을 뿌리며 다녔습니다. 사치와 허영에 들떠있었습니다.
그 결국이 어떠합니까? 13b,14a절을 보겠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는 이제 거지가 되었습니다. 돈이 없는 그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는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재산을 다 허비한 후’ 란 단순히 물질을 허비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젊음, 가능성, 지혜, 시간, 거룩함과 순결 등의 상실을 포함합니다. 잃어버린 돈은 다시 벌어서 모을 수 있지만 젊음과 순결, 거룩함과 시간은 한 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집 나간 탕자는 모든 것을 다 없이한 후 결국은 돼지 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돼지 치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은 돼지와 같은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절망과 공포 속에서 돼지의 사료인 쥐엄 열매를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더욱더 비극적인 것은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절망 중에 무엇을 기억했습니까?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의 품을 기억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키다’는 헬라어 원문에 보면 정신 이상 상태에서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이 하나님 품을 떠나면 그때부터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모두가 정신병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탐닉하고, 돈을 탐닉하고, 성적인 대상을 탐닉하고, 쾌락을 탐닉합니다. 이제 탕자가 제 정신이 돌아오자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탕자는 아버지 품을 떠난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 좋았습니다. 재산을 탕진하며 즐길 때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다 없이하고, 주리고, 돼지를 치면서 조금씩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멸시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죄인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아들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할 생각을 하면 도저히 발걸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 집을 기억했습니다. 아버지가 품꾼들에게까지 풍족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풍성한 사랑의 확신이 발길을 아버지 짐으로 돌릴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입니다. 그리했을 때에 그는 자신의 냄새 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 나는 누더기 옷을 입은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아무 공로 없이 두 손 들고 나아갔습니다. 재산을 나눠 주기까지 아끼고 사랑하시던 그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고 나갔습니다. 지금도 자기를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생각할 때 용기가 났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의 하나는 풍족한 사랑의 경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얼마나 풍성하냐면 로마서 5장 5절을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쏟아 붓다는 흘러넘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이성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죄를 일곱에 일곱을 짓고 회개하였노라 하면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죄를 회개했을 때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낙원으로 인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림과 용서함이 있습니다(20,21).
20절을 보겠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도시로 떠난 뒤 늘 도시로 향한 길을 쳐다보며 그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끈질기게 기다렸습니다. 이 기다림 때문에 아버지는 먼 거리에 있는데도 그의 아들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먼저 사랑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오래오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 기다리게 하는 힘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북한에 두고 온 아내를 반세기 이상 기다렸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면서도 “지금 그 사람은 저 달을 쳐다보고 있겠지.” 라고 속삭이면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갈보리는 기다림의 언덕이요, 십자가는 기다림의 절정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다리는 힘은 눈을 밝게 해 줍니다.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대번에 귀환하는 아들을 알아볼 만큼 아버지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 자식의 모습을 보자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갔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입을 맞추니”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하여 입을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이 입맞춤은 아들의 과거에 대한 넉넉한 용서를 전달하는 아버지의 메시지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앞에 서자마자 아들은 엎드려 그의 죄송한 마음을 토해내며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처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들이 말을 끝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을 다시 맞추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괜찮아, 아들아, 내가 알아, 내가 다 알아.” 그리고 다시 또 다시 입을 맞춥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용서의 선언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해 놓으시고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괜찮아, 난 이미 다 용서 했어”
넷째, 하나님의 사랑은 회복입니다(22-24).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용서로 만족할 수 없으십니다. 그는 아들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새 출발할 수 있도록 그의 신분을 완벽하게 회복하여 주십니다. 22,23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귀환하는 아들을 심문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제일 좋은 새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새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새 신을 신겨 주셨습니다. 모두가 새 출발을 위한 은총의 준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오자마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의의 예복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는 자녀라고 새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의 새 신을 신고 새롭게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새 삶은 환희의 잔치로 시작됩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석상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선언해 주십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야!”
여러분은 아버지의 이런 선언을 듣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 돌아와야 합니다. 17절과 20절을 보면 “스스로 돌이켰다”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데 최대의 장애물은 죄 문제와 죄책감입니다. 바로 이런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버지 하나님도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아들의 고통은 아버지의 고통이요, 아들의 아픔은 바로 아버지의 아픔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가 받을 고통을 그가 대신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고백할 시간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저의 죄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저의 아버지로 모십니다.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믿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앞으로 새 인생을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새 삶을 인도하시고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 사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사랑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그의 넉넉한 사랑의 품에 안아 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안기십시오.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으로 오십시오. 지금 나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