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골로새서 3:1-17, 요절 3:2
위엣 것을 생각하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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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일찍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갈대라는 말은 약하다는 뜻입니다. 나약해서 조금만 다쳐도 부러지고 쓰러지는 그러한 존재를 말합니다. 사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마음도 약하고 몸도 약합니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화만 받아도 밤을 설칩니다. 아주 약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갈대입니다. 그러나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사람 된 가치는 생각하는데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있어서 사람입니다. 만일 생각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갱은 타이티 섬에서 그가 지금까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그는 나의 본질과 지금의 나의 현존,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의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생각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음이 있을 때에 생각하게 되고, 생각할 때에 느낌의 탄성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는 생각의 물음표와 탄성의 느낌표가 없습니다. 물음이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느낌으로 끝날 뿐 느낌의 탄성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땅엣 것을 대비시켜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8장 5,6절에서 영을 따르는 삶과 육을 따르는 삶의 원리를 대비시킨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 이것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대비시킨 원리와도 같습니다(갈5:16-26). 위엣 것과 땅엣 것, 영을 따르는 삶과 육을 따르는 삶, 그리고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는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상호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한 쪽을 따르고 한 쪽을 버려야 합니다. 한 쪽을 죽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위의 것을 찾으라(1).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신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십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단어는 희랍어로 제테이테(ζητίετε), 현재 명령형으로써 지속적으로, 그것에 대한 애정, 그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으로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K.J. 성경에는 seek(구하다)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소망을 알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찾고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열망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다시 말하여 그 사람의 눈의 초점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관심의 측정이 됩니다. 평소 물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물질에 문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평소에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찾는 사람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찾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복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17절을 보겠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능력의 원천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위에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열린 하늘을 향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15:5).”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창28:12).” 모세가 시내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강림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출19:20).” 다윗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4).”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땅만 바라보면 죄악과 죽음과 마귀를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면 생명과 거룩함과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시고 축사하셨습니다(요17:1,마14:19).
히스기야 왕이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대의 포위를 당했습니다. 완전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작전회의였습니까? 전략을 짰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왕하19장14절)”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왕하19:3).” 그는 내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길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온갖 길이 다 포위되어서 막혀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늘 문을 향해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 외침을 들으시고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18만5천명을 다 멸하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오뚝이가 넘어지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추가 있어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 추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되는 하늘 문이 열립니다. 이 땅의 모든 유혹에서 이길 수 있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1:8).” 그러나 바울은 많은 환난과 죽음에까지 이르는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위를 바라보는 중심이 있었고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도토리입니다. 멧돼지는 도토리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 먹으면 이제 땅을 판다고 합니다. 도토리가 땅에 있는 줄 알고 밤낮 땅을 판다는 것입니다. 도토리가 땅에서 납니까? 도토리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떨어집니다. 멧돼지가 도토리를 먹고 싶으면 도토리나무 옆에 가서 밑 둥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땅을 팝니다. 땅에서 삽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들 중에도 멧돼지 같은 성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땅을 열심히 뒤집니다. 땅을 바라봅니다. 땅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없습니다. 땅을 뒤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갖 좋은 것들은 위로부터 옵니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위를 보면 나의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를 보면 그리스도를 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아주 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합니다.
미국의 요나단 에드워즈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나는 걸으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엄위와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엄위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동시에 보는 듯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거룩한 엄위하심과 엄위하신 온유함, 두려운 달콤함, 그리고 높고 위대하고 거룩한 부드러움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이 있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창조주와 구속 주를 명상하곤 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제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위엣 것을 생각하라(2-4).
2절을 보겠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한다는 것은 ‘프로네이테(φρονείτε)’로 판단하다, 주의를 기우리다의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요소가 아닌 의지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의 정도에 따라 인간 수준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정확한 평가 기준은 그 사람의 생각을 보면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소유, 능력, 학벌 등 사회적 소속을 보고 평가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키가 180cm 이상이어야 원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을 꾸고 원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원대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깊고, 깨끗한 사람이 고상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분이 높다 할지라도 그 생각하는 것이 천박하면 천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성도는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위의 것은 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긍휼과 인내와 순결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런 것들은 미래적이고 신령한 것이지만 현재의 것입니다. 죽음은 앞으로 닥칠 미래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현재 실재적이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땅의 것인 돈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지만 완전한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제 내 손에서 떠날지 모릅니다. 높은 지위 또한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요 현실입니다. 만일 죽음이 먼 미래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죽음은 현재의 실재적인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 또한 죽음이 현재적인 것처럼 분명한 현실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문제 또한 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절박한 오늘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의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뒤로 돌이킬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암벽을 오를 때 끝까지 위를 쳐다보고 오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다가 무섭다고 밑을 내려다보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하게 됩니다.
성도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될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첫째는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3a). 죽었다는 것은 완전한 단절,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는 땅의 것에 대해 이미 죽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죽은 것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죽은 것을 찾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3b).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추어진 현재적 하늘의 영적 생명입니다. 감추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4).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강조된 단어는 영광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마다 찾아보면 영광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재림은 재앙의 날이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영광의 날이 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는 부활의 새 몸, 영광의 새 몸이 됩니다. 우리 죽음은 최후가 아닙니다. 주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그날, 부활의 새 몸을 입고 다시 부활하게 될 이 소망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다시 나타나실 그 날에 우리는 영광중에서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11).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죽으면 삽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면 삽니다. 살려고 하면 결혼 못하고 죽으면 결혼합니다. 요즘 결혼하기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죽어서 힘들지 죽으면 결혼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누가 나의 인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까?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 자기에게 잘해 줄 사람을 찾으니까 힘들고 또 없습니다. 죽어 보세요. 누구를 도울까? 결혼해서 그 누구를 한 단계 올려줄까? 하는 마음을 먹으면 지천에 깔린 것이 남자이고, 지천에 깔린 것이 여자입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생각해 보세요. 평강공주 같은 마음이 있으면 여기저기 온달이 있습니다. 훈남이를 찾고 훈순이를 찾으니 안 보입니다. 낮아지면 좀 보이고, 죽으면 많이 보입니다. 안 보이는 것은 아직 내가 안 죽었기 때문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는 곳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 가지고 섬길 곳을 찾아보세요. 왜 대 기업만 찾습니까? 섬기려는 마음을 먹으면 일할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죽으면 길이 보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주님께 다 맡긴다는 것입니다. 결과까지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라보면서 철저히 죽은 사람은 결혼을 아주 쉽게 잘 하고, 취직도 쉽게 잘 합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부부 싸움합니까? 죽지 않기 때문에 치고받는 것입니다. 죽으면 부부 싸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죽으면 행복합니다. 죽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요소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겠습니다. 음란과 부정입니다. 음란이란 부도덕한 성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금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이혼 사유의 48%가 외도에 있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행복보다 순결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부정은 더럽고 그릇된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죽여야 할 것은 사욕과 악한 정욕입니다. 사욕은 격렬한 충동을 가리키고, 악한 정욕은 일반적이고 잠재적인 정욕을 가리킵니다. 음란과 부정이 행동적인 표현이라면 사욕과 악한 정욕은 마음에 일어나는 충동과 욕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죽여야 될 것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죄 중에서 가장 추한 죄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가져옵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결코 자기 소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하게 됩니다. 탐심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이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탐심은 그 대상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늘 배를 섬기는 배신자(胃信者)가 됩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9절을 보면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벗어버린다는 것은 일시적인 행동이나 결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과정을 뜻합니다. 계속해서 벗어버리라! 계속해서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건 현재 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사람은, 계속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되어야 할 새 사람, 그 사람의 구체적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새로운 모델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내가 본받아야 삶의 진정한 모델입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간다는 말은 주님과 같이, 하나님 같이 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위에 계신 그리스도, 내 삶의 주인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남은 날을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로 주님께 직접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적인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인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합니다. 땅의 것들인 음란한 것, 부정한 것, 악한 것, 정욕적인 것, 탐욕적인 것들을 더 이상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엣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무거워지고 근심 걱정이 많아지고 답답해집니다. 그래서 신경 쇠약에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벼워지고 넓어지고 평안해지고 즐거워지고 마음과 몸이 건강해 집니다.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평강주의자가 됩니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즐거운 사람이 됩니다. 제가 주님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위엣 것을 생각하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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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일찍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갈대라는 말은 약하다는 뜻입니다. 나약해서 조금만 다쳐도 부러지고 쓰러지는 그러한 존재를 말합니다. 사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마음도 약하고 몸도 약합니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화만 받아도 밤을 설칩니다. 아주 약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갈대입니다. 그러나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사람 된 가치는 생각하는데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있어서 사람입니다. 만일 생각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갱은 타이티 섬에서 그가 지금까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그는 나의 본질과 지금의 나의 현존,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의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생각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음이 있을 때에 생각하게 되고, 생각할 때에 느낌의 탄성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는 생각의 물음표와 탄성의 느낌표가 없습니다. 물음이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느낌으로 끝날 뿐 느낌의 탄성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땅엣 것을 대비시켜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8장 5,6절에서 영을 따르는 삶과 육을 따르는 삶의 원리를 대비시킨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 이것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대비시킨 원리와도 같습니다(갈5:16-26). 위엣 것과 땅엣 것, 영을 따르는 삶과 육을 따르는 삶, 그리고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는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상호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한 쪽을 따르고 한 쪽을 버려야 합니다. 한 쪽을 죽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위의 것을 찾으라(1).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신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십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단어는 희랍어로 제테이테(ζητίετε), 현재 명령형으로써 지속적으로, 그것에 대한 애정, 그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으로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K.J. 성경에는 seek(구하다)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소망을 알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찾고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열망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다시 말하여 그 사람의 눈의 초점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관심의 측정이 됩니다. 평소 물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물질에 문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평소에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찾는 사람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찾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복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17절을 보겠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능력의 원천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위에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열린 하늘을 향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15:5).”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창28:12).” 모세가 시내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강림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출19:20).” 다윗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4).”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땅만 바라보면 죄악과 죽음과 마귀를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면 생명과 거룩함과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시고 축사하셨습니다(요17:1,마14:19).
히스기야 왕이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대의 포위를 당했습니다. 완전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작전회의였습니까? 전략을 짰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왕하19장14절)”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왕하19:3).” 그는 내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길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온갖 길이 다 포위되어서 막혀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늘 문을 향해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 외침을 들으시고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18만5천명을 다 멸하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오뚝이가 넘어지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추가 있어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 추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되는 하늘 문이 열립니다. 이 땅의 모든 유혹에서 이길 수 있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1:8).” 그러나 바울은 많은 환난과 죽음에까지 이르는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위를 바라보는 중심이 있었고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도토리입니다. 멧돼지는 도토리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 먹으면 이제 땅을 판다고 합니다. 도토리가 땅에 있는 줄 알고 밤낮 땅을 판다는 것입니다. 도토리가 땅에서 납니까? 도토리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떨어집니다. 멧돼지가 도토리를 먹고 싶으면 도토리나무 옆에 가서 밑 둥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땅을 팝니다. 땅에서 삽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들 중에도 멧돼지 같은 성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땅을 열심히 뒤집니다. 땅을 바라봅니다. 땅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없습니다. 땅을 뒤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갖 좋은 것들은 위로부터 옵니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위를 보면 나의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를 보면 그리스도를 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아주 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합니다.
미국의 요나단 에드워즈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나는 걸으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엄위와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엄위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동시에 보는 듯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거룩한 엄위하심과 엄위하신 온유함, 두려운 달콤함, 그리고 높고 위대하고 거룩한 부드러움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이 있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창조주와 구속 주를 명상하곤 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제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위엣 것을 생각하라(2-4).
2절을 보겠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한다는 것은 ‘프로네이테(φρονείτε)’로 판단하다, 주의를 기우리다의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요소가 아닌 의지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의 정도에 따라 인간 수준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정확한 평가 기준은 그 사람의 생각을 보면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소유, 능력, 학벌 등 사회적 소속을 보고 평가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키가 180cm 이상이어야 원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을 꾸고 원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원대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깊고, 깨끗한 사람이 고상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분이 높다 할지라도 그 생각하는 것이 천박하면 천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성도는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위의 것은 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긍휼과 인내와 순결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런 것들은 미래적이고 신령한 것이지만 현재의 것입니다. 죽음은 앞으로 닥칠 미래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현재 실재적이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땅의 것인 돈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지만 완전한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제 내 손에서 떠날지 모릅니다. 높은 지위 또한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요 현실입니다. 만일 죽음이 먼 미래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죽음은 현재의 실재적인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 또한 죽음이 현재적인 것처럼 분명한 현실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문제 또한 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절박한 오늘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의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뒤로 돌이킬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암벽을 오를 때 끝까지 위를 쳐다보고 오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다가 무섭다고 밑을 내려다보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하게 됩니다.
성도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될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첫째는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3a). 죽었다는 것은 완전한 단절,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는 땅의 것에 대해 이미 죽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죽은 것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죽은 것을 찾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3b).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추어진 현재적 하늘의 영적 생명입니다. 감추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4).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강조된 단어는 영광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마다 찾아보면 영광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재림은 재앙의 날이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영광의 날이 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는 부활의 새 몸, 영광의 새 몸이 됩니다. 우리 죽음은 최후가 아닙니다. 주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그날, 부활의 새 몸을 입고 다시 부활하게 될 이 소망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다시 나타나실 그 날에 우리는 영광중에서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11).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죽으면 삽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면 삽니다. 살려고 하면 결혼 못하고 죽으면 결혼합니다. 요즘 결혼하기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죽어서 힘들지 죽으면 결혼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누가 나의 인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까?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 자기에게 잘해 줄 사람을 찾으니까 힘들고 또 없습니다. 죽어 보세요. 누구를 도울까? 결혼해서 그 누구를 한 단계 올려줄까? 하는 마음을 먹으면 지천에 깔린 것이 남자이고, 지천에 깔린 것이 여자입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생각해 보세요. 평강공주 같은 마음이 있으면 여기저기 온달이 있습니다. 훈남이를 찾고 훈순이를 찾으니 안 보입니다. 낮아지면 좀 보이고, 죽으면 많이 보입니다. 안 보이는 것은 아직 내가 안 죽었기 때문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는 곳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 가지고 섬길 곳을 찾아보세요. 왜 대 기업만 찾습니까? 섬기려는 마음을 먹으면 일할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죽으면 길이 보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주님께 다 맡긴다는 것입니다. 결과까지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라보면서 철저히 죽은 사람은 결혼을 아주 쉽게 잘 하고, 취직도 쉽게 잘 합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부부 싸움합니까? 죽지 않기 때문에 치고받는 것입니다. 죽으면 부부 싸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죽으면 행복합니다. 죽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요소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겠습니다. 음란과 부정입니다. 음란이란 부도덕한 성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금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이혼 사유의 48%가 외도에 있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행복보다 순결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부정은 더럽고 그릇된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죽여야 할 것은 사욕과 악한 정욕입니다. 사욕은 격렬한 충동을 가리키고, 악한 정욕은 일반적이고 잠재적인 정욕을 가리킵니다. 음란과 부정이 행동적인 표현이라면 사욕과 악한 정욕은 마음에 일어나는 충동과 욕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죽여야 될 것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죄 중에서 가장 추한 죄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가져옵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결코 자기 소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하게 됩니다. 탐심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이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탐심은 그 대상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늘 배를 섬기는 배신자(胃信者)가 됩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9절을 보면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벗어버린다는 것은 일시적인 행동이나 결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과정을 뜻합니다. 계속해서 벗어버리라! 계속해서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건 현재 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사람은, 계속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되어야 할 새 사람, 그 사람의 구체적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새로운 모델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내가 본받아야 삶의 진정한 모델입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간다는 말은 주님과 같이, 하나님 같이 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위에 계신 그리스도, 내 삶의 주인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남은 날을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로 주님께 직접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적인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인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합니다. 땅의 것들인 음란한 것, 부정한 것, 악한 것, 정욕적인 것, 탐욕적인 것들을 더 이상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엣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무거워지고 근심 걱정이 많아지고 답답해집니다. 그래서 신경 쇠약에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벼워지고 넓어지고 평안해지고 즐거워지고 마음과 몸이 건강해 집니다.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평강주의자가 됩니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즐거운 사람이 됩니다. 제가 주님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