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20-25, 요절 11:22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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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하루아마 시게오가 쓴 “대뇌 혁명(A Great Revolution In The Brain Worl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사람이 싫다 좋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기본적인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와 부정적으로 생각할 때의 단백질 분해방법이 서로 다르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단백질이 부신 피질호르몬과 엔돌핀으로 분해되어 기분이 상승되지만 반면에 부정적으로 받아 드리게 되면 독성이 강한 활성 산소가 발생하여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믿으라.” “되리라.” “받은 줄로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는 적극적인 명령형의 동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믿으라(22). 믿고(23). 믿으라(24)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믿었으면 되었고, 기도했으면 받았고, 기도하면 그대로 될 줄로 믿는 믿음의 확신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으라(22).

예수님은 이튿날 아침에 성전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20). 이 때 제자들은 전날 탐스러웠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고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외쳤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말 한마디에 나무가 말라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권세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런 권능을 행할 수 있는가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보면 Have faith in God.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밖의 믿음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다 믿고 의자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이냐, 아니면 하나님 밖에서의 믿음이냐 일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 자리 I.Q.를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출신 배경과 학연과 지연을 의지합니다. 이 명박 대통령이 지연과 학연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서영이니 강부자니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남편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아내를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강대국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은 결코 믿음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결국에는 의지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있어요? 다 믿는 줄로 알겠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바르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른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을 지으신 하나님, 새들과 물고기를 지으신 하나님, 들짐승을 지으신 하나님, 그리고 최후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짓되 남녀를 지으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는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의하고, 거룩치 못하고, 악하고,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티끌 같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티끌보다 못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십자가상에서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원수 된 담을 허시고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과 질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저주에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축복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서 찬란한 하나님 나라 영광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되 오직 하나님의 령으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무궁무진한 창조의 에너지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의지할 때 우리는 캄캄한 밤에 광명한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너 이상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모든 힘이 고갈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도 에너지의 원천이신 주님을 의지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늙고 지치고 쇠약해졌습니다. 감옥에서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외롭고 슬픈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연약함과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미국으로 다시 파송을 받은 이 요셉 선교사는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직녀와 견우로 살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비자를 신청했지만 계속 추가 서류를 요청했습니다. 그 서류는 미국에 있는 한나 선교사와 자녀들의 현재 미국 비자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사류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그들은 비자가 이미 만료되어 비자가 없는 불법 체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요셉 선교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올 때 한국에서 비자를 받을 것을 확신하고 6월 9일 아시아나 미국 비행기 티켓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와!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하나님은 이 믿음을 받으셔서 티켓보다 2일 앞서서 7일 태평양을 건너도록 길을 여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참 좋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둘째, 믿고 의심하지 말라(23).

우리 모든 개인 개인에게는 태산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 문제, 가정 문제, 사회 문제, 사업 문제, 생활해 나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태산 같은 문제들이 우리의 가슴을 짓누르고 다가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의 마음속에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던지우라는 분명한 목표, 비전과 꿈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삶의 목표도 없고 방향도 없고 성취의 꿈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내려갑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던지우라는 분명한 목표, 우리 생활 속에 삶의 분명한 목표, 분명한 꿈이 있어야 됩니다. 분명한 목표, 꿈이 마음속에 태동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목표를 세우고 꿈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 비전, 꿈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꿈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로 그 꿈을 따라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아시아로 가려 해도 하나님은 그 크신 성령으로 그를 도와주지 않으셨습니다. 아시아로 가려는 그의 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다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비두니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떠났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같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꿈이었지 하나님이 원하는 꿈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서 다른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예비한 꿈보다 자기의 꿈을 좇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드로아에 내려가서 밤중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예비한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을 보겠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은 환상 중에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에서 사람이 일어나서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비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그 꿈속에 온갖 정열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간 이후, 313년에 그 거대한 로마제국이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을 꾸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꿈을 구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한 그 비전과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고집, 아집, 집착을 버려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고집 때문에 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미 마음에 딱 정해놓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정해놓은 대로만 해 주세요!” 기도하는 것인지 고함을 치는 것인지 했든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정한대로 끌려가는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 마음속에 이미 정해 놓은 고집을 깨뜨려야 합니다.

결혼도 마찬 가지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이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 이상은 이상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우리의 고집, 자기 나름대로 세운 이상, 그 우상을 하나님 앞에서 깨뜨리고 부수고 빻아서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손해가 오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받아들이겠나이다.” 이와 같은 겸손하고 깨어진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예비해 놓으신 그 꿈과 비전을 내게 허락하소서!” 우리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비전, 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외 없이 누구둔지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의심’이란 말의 원어로 혼돈된 결정, 또는 사리 분별이 엇갈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구하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 상태의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따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의심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믿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십니다. 따라서 믿음이 결여된 간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꿈을 갖고 외쳐도 의심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감각을 통한 환경이 우리에게 의심을 심고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환경은 내 꿈을 정면으로 대결합니다. 내 꿈과 반대로 몰아갑니다. 이 의심은 아침에도, 점심때도, 저녁때도, 밤에도 환경이라는 현 상황을 바라보도록 하여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이 낳지. 내가 무슨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어. 나는 이미 떡 먹고 시루 엎었어. 너는 절대 안 돼. 네 처지와 환경을 보아라.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 다른 사람은 돼도 너는 절대로 안 돼!” 환경이 꿈을 앗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한 고백이 사라지고 희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감각을 통한 환경적인 의심의 공격을 이겨내야 합니다.

감각을 통한 환경을 이겨내면 그 다음에 이성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의심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공부한 축적된 이성입니다. “이건 비이성적이다. 비합리적이다. 이것은 안 될 일이다. 생각해 보아라. 수판 놓아보아라. 그리고 경험을 비추어 보아라. 이 일은 반드시 안 된다. 생각해봐 될 것 같아!” 감각을 통한 환경과 이성이 손을 잡아 나를 집요하게 안 된다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그 공격 앞에 좌초되기 쉽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포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심을 이기는 전쟁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의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의심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됩니다. 말씀만이 환경을 대결하고, 말씀으로만이 이성과 대결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기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의 자양분이 의심을 극복하고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말씀 이외에 여러분 우리를 의심에서 건져줄 자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멀리하는, 감각적인, 흥분적인 신앙은 아주 위험합니다. 이런 신앙은 우리의 믿음을 순식간에 사라지도록 합니다. 여기에 큐티와 말씀공부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첫째도 말씀, 둘째도 말씀, 셋째도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리고 의심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합니다. 기도는 감각적인 사회 분위기,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떠나서 하나님과 대화하게 만들어 줍니다. 천국의 아름다운 대기를 호흡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아니하면 믿음이 식어져서 세상적인 생각이 마음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면 따뜻한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제 많이 기도했다고 오늘 만족할 수 없습니다.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됩니다.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의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 받은 줄로 믿으라(24).

주님은 결론적으로 기도의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는 즉각적인 응답의 기도와 미래 적인 응답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산을 초월하고 계시는 분이심으로 그 기도가 언제 응답되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동일한 응답이 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늦을 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늦은 것도 아니요 빠른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결국 승리했습니다(롬4:18-21).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기도했으면 이미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했으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받아버렸다. 이미 나아버렸다. 이미 응답받았다. 나는 이미 승리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밖에 남은 게 없다.” 그렇습니다. 기도했으면 이미 받은 줄로 믿고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넷째, 용서하라(25).

기도할 때 가장 걸리는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용서하는 믿음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그때 비로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덧입으려면 반드시 형제와 걸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를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같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을 때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용서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의 심령에 사죄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의지나 본성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a).”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구속하신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기정사실로 여기게 하소서! 이미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게 하소서! 의심이 들어오지 않도록 말씀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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