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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6, 요절 14:1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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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인간이 무엇으로 사느냐”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또 세 가지 답을 하는 주제로 전개됩니다. 미하엘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죄로 지상으로 내어 쫓깁니다. 그 천사가 거지가 되어 추운 겨울 시골 작은 교회에서 엎드려 기도합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그 거지를 본 가난한 구두 직공이 그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그리고 그 거지를 집으로 데려다가 구두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그가 구두직공이 됩니다. 어느 날 한 말쑥한 신사 한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돈을 주고 구두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타국에 갈 일이 있는 데 일 년 동안 신을 신입니다. 튼튼하게 최상으로 좋은 구두를 만들어 주세요.” 구두 직공인 미하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바로 앞에 죽음의 천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사는 곧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1년을 운위하는 것을 본 미하엘은 그 신사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그는 깨닫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죽을 날을 모르는구나.” 그리고 그는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것 같지만 사랑이란 것이 있다. 인간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간, 자신의 수고, 자신의 지식, 자신의 상식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다. 사람들의 수고, 능력, 재간, 지식이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꼭 망할 것 같은데 망하지 않는다. 잘못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상식적으로도 이렇게 되면 끝장인데도 끝나지 않는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많은 걱정과 근심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 문장으로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믿어라.” 근심의 원인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귀중한 선물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날려 보냅시다. 아멘.
첫째,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
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때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지난 주 이 요셉 선교사의 비자 문제가 풀리지 않아 염려와 근심의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염려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는 모르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걱정합니다. 알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니 걱정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닥친다 할지라도 미래만 보장된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전에 헝가리의 이 에스더 선교사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의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나는 거꾸로도 예수님을 믿겠다.” 모든 근심은 미래에 대한 것이고, 장래에 대한 보장, security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장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주실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13:36)”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과 일군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돈벌이가 좋은 세리 직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로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조국이 해방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그리고 각 장관 자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과 근심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장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택문제, 자녀문제,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인한 건강문제, 결혼문제 등이 근심스럽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험악하기 때문에 딸을 둔 부모들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들은 학자금문제, 그리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막연한 장래 문제로 근심하고, 또 어떤 분은 문제를 만들어서 근심합니다. 전에 선교사 한 분은 분명히 조직검사를 하여 암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검사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제게 “제가 죽으면 자녀를 부탁해요”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근심공장을 만들어 놓고 근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과 염려와 불안은 하나님을 떠난 믿음이 없는 자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영어로 ‘trust’,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맡기려면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나의 삶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요 나는 피조물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그분의 자녀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창조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것은 ‘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근심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 곁에는 열두 제자들 뿐입니다(눅12:32). 예수님의 옷차림은 변변치 않으십니다. 예수님 호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후면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잡혀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나를 본받으라.”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어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파괴적 능력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한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조용히 겨자씨 하나가 땅속으로 들어가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그러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지진이 나서 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이보다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려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1:23,24).”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간혹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저 여자와, 저 남자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로 알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보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노라.”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라. 이것을 믿어라. 내가 못 주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때로는 너를 어려운 시련에 버려두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장래를 맡길 수 있습니까? 결혼을 맡길 수 있고, 자녀를 맡길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전폭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순간 산더미와 같이 밀려오는 근심의 파도를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2-4).
2절을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아버지 집은 한 마디로 천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해 하늘, 새 땅, 처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착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얼마든지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도 되고, 건강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 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 가는 것, 새 하늘, 새 땅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야 할 궁극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이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란 현재를 포함하여 미래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천국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 땅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세상과 현실을 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이 세상은 편안해도 문제고, 편안하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세상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좁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늘 넉넉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열심히 침노하여도 얻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침노만 하면 언제나 내 것이 됩니다. 땅은 동록이 많아 나의 소유를 갉아 먹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축복을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에 다 무너지고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합니다(벧전1:3,4).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 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정거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가 영원히 안식할 안식처입니다. 그곳은 공해도 없고, 질병도 없고, 분쟁도 없고, 상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습니다(사11:9). 그곳에는 언제나 얼마든지 맛있는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계22장).
그곳은 의와 사랑, 자유와 평화, 생명과 빛이 충만한 낙원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22:5).”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나라의 문을 여시고 제자들을 그 곳으로 인도하여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3).
토마스 에디슨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을 발명한 발명왕입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왕성하게 일하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만이 현재를 소유할 수 있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만이 오늘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비해 놓으신 천국을 믿고 소유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5,6).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시자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5)?” 그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보아야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길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통로로 목적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길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갈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라 할지라도 길이 없으면 이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길이 보이지 않거나 길이 아예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위험을 맞게 됩니다. 길이 없으면 실패와 좌절만이 거듭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짜 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런 때 길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목표와 그것에 이르는 길을 함께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나침반이면서도 항구에 이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 주님이 빛의 길일뿐만 아니라 그 길이 험난할 때 함께 길을 동행해주는 동행자이십니다. 고난을 함께 하시는 동고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하게 동행해 주시는 길벗이 되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 그들과 동행해 주시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길벗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길이라고 고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해 밟히고 계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두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굽은 길이요(잠1:15,16,10:9), 허무한 길이요(욥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입니다(욥24:13, 호2:6). 이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사59:7,잠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진리의 길이요 거룩한 길이요, 평탄한 길입니다(시23:3,25:10, 27:11,사35:8). 부요한 길이요 정직한 길입니다(시65:11,잠2:13).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잠2:19,3:17,마7:14). 이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갈등할 때가 있는데 그 갈등 또한 길 문제입니다. “이 길이 진리의 길인가? 가다가 진리의 길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그 때 누가 내 인생을 보상해주지?”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망한 사람 한 명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가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보화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마음 놓고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1:7,8).”
예수님은 길이 되실 뿐 아니라 진리이십니다. 세상 지식이 진리에 이르지 못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위험합니다. 이러한 세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많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것은 가짜요, 사이비입니다. 비록 길이 험하고 위태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때 참 길이요, 영생으로 인도할 때 참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장래를 맡길 수 있습니까? 결혼을 맡길 수 있고, 자녀를 맡길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전폭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순간 산더미와 같이 밀려오는 근심의 파도를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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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인간이 무엇으로 사느냐”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또 세 가지 답을 하는 주제로 전개됩니다. 미하엘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죄로 지상으로 내어 쫓깁니다. 그 천사가 거지가 되어 추운 겨울 시골 작은 교회에서 엎드려 기도합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그 거지를 본 가난한 구두 직공이 그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그리고 그 거지를 집으로 데려다가 구두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그가 구두직공이 됩니다. 어느 날 한 말쑥한 신사 한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돈을 주고 구두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타국에 갈 일이 있는 데 일 년 동안 신을 신입니다. 튼튼하게 최상으로 좋은 구두를 만들어 주세요.” 구두 직공인 미하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바로 앞에 죽음의 천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사는 곧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1년을 운위하는 것을 본 미하엘은 그 신사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그는 깨닫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죽을 날을 모르는구나.” 그리고 그는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것 같지만 사랑이란 것이 있다. 인간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간, 자신의 수고, 자신의 지식, 자신의 상식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다. 사람들의 수고, 능력, 재간, 지식이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꼭 망할 것 같은데 망하지 않는다. 잘못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상식적으로도 이렇게 되면 끝장인데도 끝나지 않는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많은 걱정과 근심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 문장으로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믿어라.” 근심의 원인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귀중한 선물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날려 보냅시다. 아멘.
첫째,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
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때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지난 주 이 요셉 선교사의 비자 문제가 풀리지 않아 염려와 근심의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염려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는 모르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걱정합니다. 알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니 걱정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닥친다 할지라도 미래만 보장된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전에 헝가리의 이 에스더 선교사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의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나는 거꾸로도 예수님을 믿겠다.” 모든 근심은 미래에 대한 것이고, 장래에 대한 보장, security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장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주실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13:36)”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과 일군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돈벌이가 좋은 세리 직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로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조국이 해방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그리고 각 장관 자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과 근심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장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택문제, 자녀문제,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인한 건강문제, 결혼문제 등이 근심스럽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험악하기 때문에 딸을 둔 부모들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들은 학자금문제, 그리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막연한 장래 문제로 근심하고, 또 어떤 분은 문제를 만들어서 근심합니다. 전에 선교사 한 분은 분명히 조직검사를 하여 암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검사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제게 “제가 죽으면 자녀를 부탁해요”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근심공장을 만들어 놓고 근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과 염려와 불안은 하나님을 떠난 믿음이 없는 자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영어로 ‘trust’,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맡기려면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나의 삶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요 나는 피조물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그분의 자녀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창조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것은 ‘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근심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 곁에는 열두 제자들 뿐입니다(눅12:32). 예수님의 옷차림은 변변치 않으십니다. 예수님 호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후면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잡혀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나를 본받으라.”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어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파괴적 능력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한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조용히 겨자씨 하나가 땅속으로 들어가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그러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지진이 나서 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이보다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려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1:23,24).”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간혹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저 여자와, 저 남자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로 알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보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노라.”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라. 이것을 믿어라. 내가 못 주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때로는 너를 어려운 시련에 버려두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장래를 맡길 수 있습니까? 결혼을 맡길 수 있고, 자녀를 맡길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전폭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순간 산더미와 같이 밀려오는 근심의 파도를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2-4).
2절을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아버지 집은 한 마디로 천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해 하늘, 새 땅, 처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착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얼마든지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도 되고, 건강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 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 가는 것, 새 하늘, 새 땅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야 할 궁극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이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란 현재를 포함하여 미래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천국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 땅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세상과 현실을 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이 세상은 편안해도 문제고, 편안하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세상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좁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늘 넉넉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열심히 침노하여도 얻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침노만 하면 언제나 내 것이 됩니다. 땅은 동록이 많아 나의 소유를 갉아 먹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축복을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에 다 무너지고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합니다(벧전1:3,4).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 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정거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가 영원히 안식할 안식처입니다. 그곳은 공해도 없고, 질병도 없고, 분쟁도 없고, 상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습니다(사11:9). 그곳에는 언제나 얼마든지 맛있는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계22장).
그곳은 의와 사랑, 자유와 평화, 생명과 빛이 충만한 낙원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22:5).”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나라의 문을 여시고 제자들을 그 곳으로 인도하여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3).
토마스 에디슨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을 발명한 발명왕입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왕성하게 일하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만이 현재를 소유할 수 있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만이 오늘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비해 놓으신 천국을 믿고 소유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5,6).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시자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5)?” 그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보아야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길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통로로 목적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길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갈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라 할지라도 길이 없으면 이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길이 보이지 않거나 길이 아예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위험을 맞게 됩니다. 길이 없으면 실패와 좌절만이 거듭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짜 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런 때 길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목표와 그것에 이르는 길을 함께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나침반이면서도 항구에 이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 주님이 빛의 길일뿐만 아니라 그 길이 험난할 때 함께 길을 동행해주는 동행자이십니다. 고난을 함께 하시는 동고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하게 동행해 주시는 길벗이 되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 그들과 동행해 주시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길벗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길이라고 고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해 밟히고 계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두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굽은 길이요(잠1:15,16,10:9), 허무한 길이요(욥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입니다(욥24:13, 호2:6). 이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사59:7,잠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진리의 길이요 거룩한 길이요, 평탄한 길입니다(시23:3,25:10, 27:11,사35:8). 부요한 길이요 정직한 길입니다(시65:11,잠2:13).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잠2:19,3:17,마7:14). 이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갈등할 때가 있는데 그 갈등 또한 길 문제입니다. “이 길이 진리의 길인가? 가다가 진리의 길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그 때 누가 내 인생을 보상해주지?”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망한 사람 한 명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가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보화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마음 놓고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1:7,8).”
예수님은 길이 되실 뿐 아니라 진리이십니다. 세상 지식이 진리에 이르지 못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위험합니다. 이러한 세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많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것은 가짜요, 사이비입니다. 비록 길이 험하고 위태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때 참 길이요, 영생으로 인도할 때 참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장래를 맡길 수 있습니까? 결혼을 맡길 수 있고, 자녀를 맡길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전폭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순간 산더미와 같이 밀려오는 근심의 파도를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