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조회 수 3505 추천 수 0 2012.07.12 07:13:46
요한복음 6:60-71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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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는 뚜껑 없는 감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영국의 메리 여왕은 젊은 부부와 어린 세 자녀 등 일가족 5명을 뚜껑 없는 감옥에 수감을 했습니다. 사방이 140㎝ 정도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뛰어넘어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메리여왕은 그 가족에게 “주 예수에 대해 믿음을 지키려면 그 안에서 죽으라. 만일 살고 싶거든 신앙을 포기하고 담을 넘어 집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가족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가족은 신앙 양심에 따라 죽음을 선택을 했습니다.

로마 근교에는 카타콤이라는 지하묘소가 있습니다. 공동묘지 밑에 거미줄처럼 이리 저리 굴을 파서 초대교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땅굴 속에 들어가서 일생동안 지내는 곳입니다. 공동묘지 밑에 수많은 굴을 팠습니다. 거미줄처럼 얽혀진 굴은 수천 킬로에 달합니다. 거기에는 따스한 햇살이 없습니다. 습기차고 냄새나는 곳입니다. 그들은 동굴에서 태어나고, 동굴에서 죽습니다. 무려300여년 동안 거기서 살면서 죽은 순교자는 175만에서 40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동굴 안에서 죽고 그 안에서 장례식을 치릅니다. 시체 썩은 냄새, 대소변 악취, 혼탁한 공기 속에서 햇빛도 보지 못하고 굶주립니다. 그러니 장수하지 못합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믿음의 충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그런 삶을 산 것은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매 맞고 손톱 발톱이 빠질 정도로 대나무 꼬챙이로 찌름을 당하고, 맨발로 못이 박힌 판 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기철 목사님에게 침을 뱉고 천웅쪽으로 절을하라고 말하자 주기철 목사님은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 경찰들이 화가나 뾰족한 십자가 못을 밟게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끝까지 믿음을 변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추운 겨울에 옥사하셨습니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가다보면 쿼바디스 교회(Quo Vadis Church)가 나옵니다. 베드로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가 극에 달하였을 때, 성도들의 강권에 의해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나 피신할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향해 오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ae).” 그때 예수께서 “내 종 베드로가 교회를 버리고 도망친 로마로,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로마로 다시 돌아가 그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정말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끝까지 신앙과 충성과 헌신을 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하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나는, 우리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믿음’이란 영어 성경에서 보면 faith입니다. 그리고 ‘충성’이란 단어는 faithful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보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 충성이란 단어 속에 신실함, 끝까지 따라가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어려울 때일수록, 바쁠 때일수록, 종말의 때가 다가올수록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신앙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 믿음을 지키는 사람, 충성과 헌신을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60).

52-5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생명이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들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렵다는 뜻은 헬라어로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불쾌하고 싫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불쾌하고 싫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을 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계산과 목적을 꼭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방법이 자신들의 생각과 뜻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싫었고 예수님을 좇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5병2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흥분하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 기적을 보면서 그들은 이 분이야말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켜주고, 자신들의 경제적인 문제,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성취하여 보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가까이 갈수록 예수님의 생각과 방법이 자신들과 생각과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씩 둘씩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walked with God입니다. 노아 시대는 어둠의 시대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시대였습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시대였습니다(창6:5). 그러나 그는 시대의 정신과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과 뜻과 목적과 맞지 않은 사람과 여행을 할 때에 그 여행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마음이 같고 뜻과 목적이 같은 사람과 함께 여행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아주 짧게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노아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목적이 같았습니다. 그 때에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주님과 끝까지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부부간도, 사업의 동업자도 만찬가지입니다. 뜻이 같아야 오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자기의 뜻과 자기 생각과 목적에 주님을 끌어당기면 주님은 오히려 우리의 걸림돌이 됩니다. 주님이 부담스럽습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주님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목표, 나의 틀, 나의 야심, 나의 교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자가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갔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난감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올려 바코드 판독기를 통과하여 합니다. 점원이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지만 아들이 울며 장난감을 꼭 뒨 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에 아들을 올려놓고 계산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의 것을 내려놓으면 주님의 것으로 채워주는 데 내 생각, 내 습관, 내 목표를 꼭 쥔 채 예수님을 초대하게 되면 그곳에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지만 마음속에 아직 세상 욕심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결혼문제를 맡기지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자기 꿈과 이상과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내 뜻과 계획과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갈등의 진원지, 악취를 풍기는 진원지가 되고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내려놓으면 나라는 존재는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진원지, 평화와 기쁨의 진원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교제의 진원지, 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내려놓은 만큼 넉넉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계산과 계획과 생각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영적인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61-65).

5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거하고 나는 그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먹고 마신다는 말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수군거렸습니다. 6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육적인 차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63). 육적인 차원으로 영적인 차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육적인 차원은 걸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제자 중에 많은 자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여호수아 선교사에게 한국에서 미국 수양회에 참석할 명단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메일이 다 깨져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한글 버전이 한글 97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제가 쓰는 버전은 2004입지다. 낮은 프로그램이 높은 버전의 글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육적인 차원의 신앙이 영적인 차원의 신앙에 대하여 이해가 할 수 없습니다. 걸림돌이 되고 깨집니다. 아무 유익과 열매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적인 신앙은 인간중심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적인 데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육적인 믿음은 아직도 자아가 죽지 않은 신앙체계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육적 소욕을 처리할 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육적인 소욕에 무릎을 꿇고 후회하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또 다시 세상과 육적으로 나갑니다. 기도시간이 길어지면 부담을 느낍니다. 메시지 시간이 길어지면 짜증스러워합니다. 헌금을 하라고 하면 인상을 씁니다. 헌신을 요구하면 뒤돌아섭니다. 조건적입니다. 조금이라도 힘들게 되면 금방 믿음에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렇다고 이적과 기사 등 성령의 은사들을 추구하면 영적인 사람이냐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주님의 기적을 체험했고, 그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 떠났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깊은 마음속에 자기중심적이고, 또 가시적이고 물질적 차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영적 차원의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육적인 차원에서부터 신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 차원의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나의 전존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6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우리 속사람인 영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나가는 삶이 영적인 차원의 신앙입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영적인 차원의 신앙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종교적인 모습이 있다하더라도 말씀 앞에서 나를 깨뜨리며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는다면 영적인 차원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아직 서툴고 교회의 일들을 잘 모르지만 작은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움직여지는 삶이 영적인 차원의 신앙입니다. 로마서 8장 7-11절은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이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을 인정할 때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성령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우리를 살아나게 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유대의 석학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국회의원정도 되고, 종교적으로는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교육적으로는 랍비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모습은 있었지만 그 안에 갈증이 있었습니다. 삶의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어집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육적인 상태의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나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와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이 영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 영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차원의 신앙생활을 내려놓고 영적인 차원으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씀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때에 주님과 영원히 동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66-69).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추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를 향한 방향을 보면서 떠나갔습니다.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가 삶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꽁무니를 뺐습니다. 자기 틀에 맞고 낭만적일 때는 따랐지만 길이 험한 길임을 알고는 떠났습니다. 변절을 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더 나아가 가룟 유다는 타락의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 신분, 권력, 어떤 영향력을 얻을 목적으로 왔다가 그것이 되어지지 않자 진리와 소중한 관계를 돈 몇 푼에 팔는 자의 길로 나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많은 사람이 떠나간다고 부화뇌동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현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그리고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닙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문제 해결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만은 틀림이 업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영생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영생의 말씀을 발견하지 못하면 신앙의 한계에 부딪혀 무리들과 같이 어려울 때 떠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생의 말씀을 발견한다면 어떤 희생과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남는 자가 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영생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한 자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원자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29절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짧지만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나 왕, 또는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제사장이나 왕, 선지자들은 대부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된 그리스도로 오심으로 이들의 역할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이요, 왕이요, 선지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나와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그 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완성하신 마지막 선지자가 되십니다(히1:1,2).

그가 이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늘 함께 하며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피상적인 지식은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 자체를 아는 참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과 가치관 등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알고 있습니까?

영생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의 말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고,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으면 영원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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