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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추석 명절 (히브리서 11:4)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자기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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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섯명절은 한국의 감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사절기를 맞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 묵상하고 은혜를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한 할머니가 대통령 집무실에 와서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는 링컨이 여러 정적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비서는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설득하여 돌려보내려고 할 참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링컨이 비서실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대통령에게 “잠간이면 됩니다. 잠시만 만나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링컨이 집무실에 들어오라고 한 후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뜻밖에 “아무것도 저를 도와주실 것이 없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대통령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각하가 좋아하시는 과자를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국정에 늘 분주하실 터인데 조금이나마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백성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하를 사랑하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링컨은 자기의 생애에서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할머니가 가지고 온 선물은 값으로 따지면 몇 푼어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링컨에게 있어서 그 과자는 몇 천만 불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가격으로 따집니다. 수량으로 계산합니다. 선물도 가격으로 따집니다. “이거 얼마짜리야?” 그러나 선물 속에 담겨있는 정성 어린 마음과 그 사랑을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수량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성경사상 최초의 예물을 드린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기에 곡식의 소산물로 드렸습니다. 한편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이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것을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까요? 몇 몇 성경학자들은 아벨의 제물에 피가 있었기에 받으셨고, 가인의 예물에는 피가 없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운데는 소제와 같은 농산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피의 제사가 율법으로 제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는 어떻게 드려졌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아벨의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했을까요? 아벨에게 있어서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첫째 것을 기뻐하십니다.
창세기 4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본문을 잘 보세요. 가인은 하나님께 땅의 소산물의 첫 열매를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벨과 가인의 헌신의 질적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여호와의 존재가 아벨에게 첫 번째 순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벨은 자기 인생의 첫 번째이신 하나님께 첫째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잠언 3장 9절에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신약에서 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먼저는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헌신의 우선순위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이란 삶의 우선순위, priority를 어디에 두는가입니다. 아벨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선순위는 의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땅히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우리의 존재의 원인이신 하나님께 최선을 드리는 행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물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는 신앙고백이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첫째 것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기름까지 드렸습니다. 기름은 구약시대에 가장 좋은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때에 기름부분은 반드시 태워 주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기름은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강상 고기 기름을 먹지 않지만 지구촌의 가난한 지역에서는 지방섭취를 위해 기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지금도 돼지비계를 소금에 절여 겨울에 먹고 있습니다. 당시 기름은 좋은 것의 상징입니다. 아벨은 좋은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좋은 것을 드린 것은 이미 좋은 것들을 주신 주님께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 좋지 않은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 효자가 뭐예요. 효자란 가장 좋은 것을 부모님께 드리는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한 사람의 감동의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116:12)” 여러분은 이런 감동의 고백이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때를 따라 양식을 주신 것 감사하지 않습니까?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큰 은혜 아닙니까?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동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친히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뿐만 아니라 아벨의 믿음과 그 인격과 그 마음을 함께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자체만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인격을 원하십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백성들이 마음 없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물만 드리는 것에 하나님은 마음이 무겁고 곤비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기준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를 볼 때에 가인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의 예배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원하십니다(삼상16:7).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수양의 기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삼상15:22).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결코 물질 문제가 아닌 자신의 존재의 문제입니다. 헌금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를 드리고, 나의 정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헌금정신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린도후서8:5).”
그리고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산제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제사(a living sacrifice)란 삶의 전부를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집회가 있어서 선교헌금시간이 있었는데 주머니를 뒤지다가 바칠 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헌금 연보에 앉아 “저는 아프리카를 위해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소리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exchanging life, 생명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헌금행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께 목숨을 바친다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만 구체적인 헌금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흑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들의 예배에는 정서적 교감으로 인해 뜨겁습니다. 한 흑인 목사님이 설교하시며 “여러분 오늘의 교회는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했더니,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걷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의 과제는 너무나 긴급합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했더니, 또한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달려갑시다.” 이어서 설교자는 또한 “세상은 너무나 넓습니다, 열방 중에 복음을 선교하기 위해서 교회는 날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했더니, 또다시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예, 맞습니다. 교회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다시 설교자는 “여러분 이런 선교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구체적으로 돈으로 헌신합시다” 했더니 조용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떤 성도가 이렇게 화답하더랍니다. “우리 교회 그냥 주저앉읍시다.” 여러분과 저는 혹시 이 흑인 성도와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헌신과 일치하십니까? Studd 선교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희생도 결코 지나친 것일 수는 없다.”
셋째,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란 영어로 worship입니다. 이는 worth(가치), ship(신분)에서 왔습니다. 즉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모든 영광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행위가 예배인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예배를 “인간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이고 가장 긴박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진정’이란 거짓의 반대로 말씀에 기초하여 마음과 성품과 온 몸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신6:5). ‘신령’이란 가장 높고 깊고 가장 귀하게 예배드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시편 51편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보다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니은 의로운 바리새인보다 세리의 상한 마음을 받으십니다(눅18:10-14). 상한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 긍휼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아벨은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애통하는 마음과 긍휼히 드리는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성전을 보면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전 뜰에는 번제 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습니다. 번제 단이 있기 때문에 양을 잡고 소를 잡는 등 좀 시끄럽습니다. 성소에는 등대와 진설병과 금향 단이 있습니다. 이곳은 제사장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곳입니다. 지성소는 속죄소가 있는 곳입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오기는 오지만 성전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갑니다. 마당만 밟고 갑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유희장소로 여기고 교제만을 일삼습니다. 그리고 자기유익을 좇아 교회에 옵니다.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하지 않습니다. 성소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지성소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소는 속죄소로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드리는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말씀으로 사명을 회복합니다. 성령으로 비전을 다시 소유합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가슴이 뜨겁습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전도하고자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나는 듯한 힘이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드리는 예배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b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이렇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하는 자가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의 현 시점에서는 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예배를 찾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영원 속에 거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소망하시고 예배를 찾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토록 소망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베푸십니다. 신령한 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거짓 없는 예배입니다. 거짓 없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눈물로 죄를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를 애통하고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내 주 앞에 이 적은 것 다 드리니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소서♬(353장)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자기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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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섯명절은 한국의 감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사절기를 맞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 묵상하고 은혜를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한 할머니가 대통령 집무실에 와서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는 링컨이 여러 정적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비서는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설득하여 돌려보내려고 할 참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링컨이 비서실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대통령에게 “잠간이면 됩니다. 잠시만 만나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링컨이 집무실에 들어오라고 한 후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뜻밖에 “아무것도 저를 도와주실 것이 없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대통령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각하가 좋아하시는 과자를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국정에 늘 분주하실 터인데 조금이나마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백성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하를 사랑하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링컨은 자기의 생애에서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할머니가 가지고 온 선물은 값으로 따지면 몇 푼어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링컨에게 있어서 그 과자는 몇 천만 불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가격으로 따집니다. 수량으로 계산합니다. 선물도 가격으로 따집니다. “이거 얼마짜리야?” 그러나 선물 속에 담겨있는 정성 어린 마음과 그 사랑을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수량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성경사상 최초의 예물을 드린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기에 곡식의 소산물로 드렸습니다. 한편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이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것을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까요? 몇 몇 성경학자들은 아벨의 제물에 피가 있었기에 받으셨고, 가인의 예물에는 피가 없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운데는 소제와 같은 농산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피의 제사가 율법으로 제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는 어떻게 드려졌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아벨의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했을까요? 아벨에게 있어서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첫째 것을 기뻐하십니다.
창세기 4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본문을 잘 보세요. 가인은 하나님께 땅의 소산물의 첫 열매를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벨과 가인의 헌신의 질적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여호와의 존재가 아벨에게 첫 번째 순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벨은 자기 인생의 첫 번째이신 하나님께 첫째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잠언 3장 9절에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신약에서 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먼저는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헌신의 우선순위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이란 삶의 우선순위, priority를 어디에 두는가입니다. 아벨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선순위는 의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땅히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우리의 존재의 원인이신 하나님께 최선을 드리는 행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물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는 신앙고백이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첫째 것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기름까지 드렸습니다. 기름은 구약시대에 가장 좋은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때에 기름부분은 반드시 태워 주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기름은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강상 고기 기름을 먹지 않지만 지구촌의 가난한 지역에서는 지방섭취를 위해 기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지금도 돼지비계를 소금에 절여 겨울에 먹고 있습니다. 당시 기름은 좋은 것의 상징입니다. 아벨은 좋은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좋은 것을 드린 것은 이미 좋은 것들을 주신 주님께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 좋지 않은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 효자가 뭐예요. 효자란 가장 좋은 것을 부모님께 드리는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한 사람의 감동의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116:12)” 여러분은 이런 감동의 고백이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때를 따라 양식을 주신 것 감사하지 않습니까?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큰 은혜 아닙니까?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동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친히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뿐만 아니라 아벨의 믿음과 그 인격과 그 마음을 함께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자체만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인격을 원하십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백성들이 마음 없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물만 드리는 것에 하나님은 마음이 무겁고 곤비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기준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를 볼 때에 가인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의 예배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원하십니다(삼상16:7).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수양의 기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삼상15:22).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결코 물질 문제가 아닌 자신의 존재의 문제입니다. 헌금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를 드리고, 나의 정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헌금정신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린도후서8:5).”
그리고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산제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제사(a living sacrifice)란 삶의 전부를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집회가 있어서 선교헌금시간이 있었는데 주머니를 뒤지다가 바칠 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헌금 연보에 앉아 “저는 아프리카를 위해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소리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exchanging life, 생명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헌금행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께 목숨을 바친다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만 구체적인 헌금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흑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들의 예배에는 정서적 교감으로 인해 뜨겁습니다. 한 흑인 목사님이 설교하시며 “여러분 오늘의 교회는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했더니,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걷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의 과제는 너무나 긴급합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했더니, 또한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달려갑시다.” 이어서 설교자는 또한 “세상은 너무나 넓습니다, 열방 중에 복음을 선교하기 위해서 교회는 날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했더니, 또다시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예, 맞습니다. 교회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다시 설교자는 “여러분 이런 선교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구체적으로 돈으로 헌신합시다” 했더니 조용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떤 성도가 이렇게 화답하더랍니다. “우리 교회 그냥 주저앉읍시다.” 여러분과 저는 혹시 이 흑인 성도와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헌신과 일치하십니까? Studd 선교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희생도 결코 지나친 것일 수는 없다.”
셋째,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란 영어로 worship입니다. 이는 worth(가치), ship(신분)에서 왔습니다. 즉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모든 영광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행위가 예배인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예배를 “인간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이고 가장 긴박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진정’이란 거짓의 반대로 말씀에 기초하여 마음과 성품과 온 몸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신6:5). ‘신령’이란 가장 높고 깊고 가장 귀하게 예배드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시편 51편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보다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니은 의로운 바리새인보다 세리의 상한 마음을 받으십니다(눅18:10-14). 상한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 긍휼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아벨은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애통하는 마음과 긍휼히 드리는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성전을 보면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전 뜰에는 번제 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습니다. 번제 단이 있기 때문에 양을 잡고 소를 잡는 등 좀 시끄럽습니다. 성소에는 등대와 진설병과 금향 단이 있습니다. 이곳은 제사장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곳입니다. 지성소는 속죄소가 있는 곳입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오기는 오지만 성전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갑니다. 마당만 밟고 갑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유희장소로 여기고 교제만을 일삼습니다. 그리고 자기유익을 좇아 교회에 옵니다.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하지 않습니다. 성소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지성소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소는 속죄소로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드리는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말씀으로 사명을 회복합니다. 성령으로 비전을 다시 소유합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가슴이 뜨겁습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전도하고자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나는 듯한 힘이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드리는 예배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b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이렇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하는 자가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의 현 시점에서는 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예배를 찾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영원 속에 거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소망하시고 예배를 찾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토록 소망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베푸십니다. 신령한 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거짓 없는 예배입니다. 거짓 없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눈물로 죄를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를 애통하고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내 주 앞에 이 적은 것 다 드리니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소서♬(35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