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사도행전 제 17 강(말씀, 7:1-17)
조상들의 위대한 믿음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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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로 임명된 후 7장에서 순교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설교로 잘 알려진 사도행전 7장의 그의 설교는 자그마치 52절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설교는 이방 선교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연이어 사도 바울의 등장이라는 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스데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할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의 특별함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극단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서만 계신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동쪽인 메소포타미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그들에게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것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방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스데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창조주이시고,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신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명령과 약속(1-7)
대제사장은 피고인 스데반에게 심문을 시작합니다. “네가 율법을 고치고 성전을 헌다는 말,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은 이때 자기를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변증하되 부드럽고 친근하게 시작합니다. 여러분 부형들(brothers and fathers)이여 들으소서(2). 그리고 그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란 내가 전하고 싶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일차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저들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인물입니다. 그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스데반을 주목했습니다. 왜 저자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할까? 저자가 그리스도 예수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다니 이상하다며 일제히 주목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2,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그리고 창세기 12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겠다. 내가 네 이름을 창대하도록 하겠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 내가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도록 하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고향 친척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이라고 갔는데 하나님은 발붙일 땅조차 주시지 않았습니다(5). 물질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식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오직 약속뿐이었습니다. 축복이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현재가 아닌 미래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현금을 주시지 않고 약속어음을 주셨습니다. 약속어음은 현재 현금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현금으로 쓸 수 없습니다. 어느 시간이 지나야 현금 가치가 있습니다. 약속에는 인간 상호간의 약속인 수평적인 약속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약속, 아버지와 자식 간의 약속 수직적인 약속이 있습니다. 수평적인 약속은 파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직적인 약속인 하나님과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습니다.
요즘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자살한 한 배우를 국민배우라고 떠는데 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민배우라면 연기도 잘해야 되지만 팬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병으로 죽은 것이 아닌 자살했습니다. 그녀는 크리스천입니다. 자살은 부모에게 불효이고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녀입니다. 여러 이유로 이혼했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은 수평적인 약속을 파기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깨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 앞과 서로 간, 그리고 주례자인 목사님 앞과 하객들 앞에서 서약을 했을 것입니다. "머리가 파뿌리가 되기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겠다." 그는 엄숙히 하나님과 약속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직적인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수직적인 약속은 해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결혼하신 분들이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이혼’은 입 밖에조차 꺼내지 마십시오. 아니 꿈에서조차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이혼은 그만 두고 '이'자도 꺼내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마19:7)"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고향 친척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만을 붙들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그에 따른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믿음이란 바로 약속에 대한 응답, 약속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고향 친척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고향에 있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까? 당시에는 고향을 떠나면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친척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지요?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은 우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그 시대의 영향을 따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우상은 달(月)신인 ‘난다르’였습니다. 바로 우상을 숭배하던 데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누구예요?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 낯선 사람들과 사는 사람, 나그네, 영어로 stranger입니다. stranger는 원주민이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그네는 원주민이 볼 때 이상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원주민이 볼 때 나그네는 피부 색깔도 다르고, 생활양식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으니” ‘이 사람들’ 이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는 원주민에게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본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순례자의 삶은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때 과거에 세상에서 즐기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히11:15). 이는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히11:16). 그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그는 본향이 이 세상 나라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하고,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했습니다. 이 때 그는 세상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삶을 즐기기 위해 산과 바다로 떠납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자기를 위해 씁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님과 복음을 전하는데 써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헌금도 드리고 감사헌금도 드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옷차림은 야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건한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과 욕심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 받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해야 합니다. 말에 있어서도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주제는 술, 여자, 남자, 패션, 돈 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고상하고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약점과 흉을 보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고 기도하여 주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는 말들을 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이는 정말 이상한 사람,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3-5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세상이 우리를 비방할 때에 우리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향인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할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천국시민입니다.
하나님은 25년이 지나서 아들인 이삭을 주셨습니다. 25년을 기다린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장 약속하신 것을 주시지 않고 25년 후에 약속을 지키셨을까요? 이는 아브라함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 씀씀이나 모든 것이 종지 같은데 큰 것을 줘보세요. 담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믿음을 키웠습니다. 생각의 폭을 키웠습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다운 뜨거운 심장을 키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의 축복은 내가 할 나름입니다. 최진실 탈랜트가 어떤 드라마에서 “남자는 여자 할 나름이다”라는 말을 했듯이 내가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복을 주십니다. 아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만족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때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수도 했습니다. 엘리에셀을 자기 후사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도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체를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기고, 아브라함 나이 99세,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주님께서 명년 이때에 자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롬4:22, 갈4:9, 약2:23).
아브라함의 생애는 한 마디로 약속을 믿고 산 생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본질입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갈 때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팔림과 보냄(8-17)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되어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그 후에 출애굽하게 될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그가 후에 이삭을 낳아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후 이삭이 야곱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동생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노예는 당시 말하는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한번 노예가 되면 대대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 형들은 시기심, 질투심으로 동생을 팔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린 요셉은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한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끈질기게 날마다 유혹했습니다. 요셉은 여인의 말을 듣지도 않을 뿐더러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요셉이 시무하러 집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만 있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처는 요셉의 옷을 붙들고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가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고, 둘째는 주인을 배반할 수 없었고,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니 보디발 처가 미니스커트를 벗어 우상에 씌우며 이래 놓으면 못 보지 않느냐. 이에 요셉은 그 우상은 못보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지금도 보시고 계신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요셉은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처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고 붙잡혔을 때는 옷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보디발의 처는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요셉에게 성폭행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중에도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 감옥도 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창세기 39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은혜를 주셔서 억울한 누명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내적 힘을 주셨습니다. 또 힘든 감옥에서도 변함없이 충성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전옥의 도움으로 옥중 제반 사무를 맡아 섬겼습니다.
인간 요셉을 생각하면 형들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꿈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뜻을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훗날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신들’과 ‘하나님’의 대조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괴롭혔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학대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당신들은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형들이 분명히 나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팔려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리로 왔습니다. 나는 팔린 be sold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be sent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당신들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민족과 만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나를 이리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팔려서 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왔습니까? 여러분은 점수에 팔려 대학에 왔습니까? 여러분은 연봉에 팔려 직장에 다닙니까? 여러분은 운명에 팔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습니까? 여러분은 어쩌다가 우연히 한국에 태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팔린 인생입니까? 팔린 것은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성적에 팔리고 돈 몇 푼인 연봉에 팔리고 운명에 팔린 노예입니까? 우리가 만일 연봉에 팔려 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운명의 장난으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성적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인생이 서글퍼집니다. 나란 존재가 그렇게 비참할 수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절로 쏟아져 나옵니다. 매사가 부정적이고 절망스럽게 됩니다. 운명에 울고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팔린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학점에 팔리고, 연봉에 팔리고, 운명에 팔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귀한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절대적인 뜻과 목적을 두고 나를 대학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목적을 두고 직장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목적, 소망을 두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우리가 학교에 온 것, 직장에 들어간 것, 우리가 결혼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팔린 존재가 아닌 보냄을 받은 존재! 이것이 크리스천의 존재의미요 목적입니다. 따라서 나의 삶에 운명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절망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인생에 대해 기대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을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요셉은 죄 없이 형들에게 팔려 환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사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지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아무 죄 없으신 의인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지 사흘 만에 살리어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팔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만민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보냄을 받은 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조상들의 위대한 믿음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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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로 임명된 후 7장에서 순교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설교로 잘 알려진 사도행전 7장의 그의 설교는 자그마치 52절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설교는 이방 선교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연이어 사도 바울의 등장이라는 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스데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할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의 특별함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극단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서만 계신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동쪽인 메소포타미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그들에게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것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방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스데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창조주이시고,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신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명령과 약속(1-7)
대제사장은 피고인 스데반에게 심문을 시작합니다. “네가 율법을 고치고 성전을 헌다는 말,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은 이때 자기를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변증하되 부드럽고 친근하게 시작합니다. 여러분 부형들(brothers and fathers)이여 들으소서(2). 그리고 그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란 내가 전하고 싶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일차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저들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인물입니다. 그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스데반을 주목했습니다. 왜 저자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할까? 저자가 그리스도 예수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다니 이상하다며 일제히 주목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2,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그리고 창세기 12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겠다. 내가 네 이름을 창대하도록 하겠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 내가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도록 하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고향 친척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이라고 갔는데 하나님은 발붙일 땅조차 주시지 않았습니다(5). 물질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식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오직 약속뿐이었습니다. 축복이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현재가 아닌 미래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현금을 주시지 않고 약속어음을 주셨습니다. 약속어음은 현재 현금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현금으로 쓸 수 없습니다. 어느 시간이 지나야 현금 가치가 있습니다. 약속에는 인간 상호간의 약속인 수평적인 약속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약속, 아버지와 자식 간의 약속 수직적인 약속이 있습니다. 수평적인 약속은 파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직적인 약속인 하나님과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습니다.
요즘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자살한 한 배우를 국민배우라고 떠는데 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민배우라면 연기도 잘해야 되지만 팬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병으로 죽은 것이 아닌 자살했습니다. 그녀는 크리스천입니다. 자살은 부모에게 불효이고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녀입니다. 여러 이유로 이혼했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은 수평적인 약속을 파기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깨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 앞과 서로 간, 그리고 주례자인 목사님 앞과 하객들 앞에서 서약을 했을 것입니다. "머리가 파뿌리가 되기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겠다." 그는 엄숙히 하나님과 약속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직적인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수직적인 약속은 해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결혼하신 분들이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이혼’은 입 밖에조차 꺼내지 마십시오. 아니 꿈에서조차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이혼은 그만 두고 '이'자도 꺼내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마19:7)"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고향 친척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만을 붙들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그에 따른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믿음이란 바로 약속에 대한 응답, 약속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고향 친척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고향에 있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까? 당시에는 고향을 떠나면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친척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지요?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은 우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그 시대의 영향을 따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우상은 달(月)신인 ‘난다르’였습니다. 바로 우상을 숭배하던 데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누구예요?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 낯선 사람들과 사는 사람, 나그네, 영어로 stranger입니다. stranger는 원주민이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그네는 원주민이 볼 때 이상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원주민이 볼 때 나그네는 피부 색깔도 다르고, 생활양식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으니” ‘이 사람들’ 이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는 원주민에게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본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순례자의 삶은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때 과거에 세상에서 즐기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히11:15). 이는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히11:16). 그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그는 본향이 이 세상 나라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하고,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했습니다. 이 때 그는 세상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삶을 즐기기 위해 산과 바다로 떠납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자기를 위해 씁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님과 복음을 전하는데 써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헌금도 드리고 감사헌금도 드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옷차림은 야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건한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과 욕심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 받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해야 합니다. 말에 있어서도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주제는 술, 여자, 남자, 패션, 돈 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고상하고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약점과 흉을 보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고 기도하여 주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는 말들을 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이는 정말 이상한 사람,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3-5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세상이 우리를 비방할 때에 우리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향인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할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천국시민입니다.
하나님은 25년이 지나서 아들인 이삭을 주셨습니다. 25년을 기다린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장 약속하신 것을 주시지 않고 25년 후에 약속을 지키셨을까요? 이는 아브라함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 씀씀이나 모든 것이 종지 같은데 큰 것을 줘보세요. 담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믿음을 키웠습니다. 생각의 폭을 키웠습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다운 뜨거운 심장을 키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의 축복은 내가 할 나름입니다. 최진실 탈랜트가 어떤 드라마에서 “남자는 여자 할 나름이다”라는 말을 했듯이 내가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복을 주십니다. 아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만족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때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수도 했습니다. 엘리에셀을 자기 후사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도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체를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기고, 아브라함 나이 99세,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주님께서 명년 이때에 자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롬4:22, 갈4:9, 약2:23).
아브라함의 생애는 한 마디로 약속을 믿고 산 생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본질입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갈 때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팔림과 보냄(8-17)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되어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그 후에 출애굽하게 될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그가 후에 이삭을 낳아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후 이삭이 야곱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동생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노예는 당시 말하는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한번 노예가 되면 대대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 형들은 시기심, 질투심으로 동생을 팔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린 요셉은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한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끈질기게 날마다 유혹했습니다. 요셉은 여인의 말을 듣지도 않을 뿐더러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요셉이 시무하러 집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만 있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처는 요셉의 옷을 붙들고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가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고, 둘째는 주인을 배반할 수 없었고,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니 보디발 처가 미니스커트를 벗어 우상에 씌우며 이래 놓으면 못 보지 않느냐. 이에 요셉은 그 우상은 못보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지금도 보시고 계신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요셉은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처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고 붙잡혔을 때는 옷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보디발의 처는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요셉에게 성폭행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중에도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 감옥도 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창세기 39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은혜를 주셔서 억울한 누명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내적 힘을 주셨습니다. 또 힘든 감옥에서도 변함없이 충성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전옥의 도움으로 옥중 제반 사무를 맡아 섬겼습니다.
인간 요셉을 생각하면 형들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꿈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뜻을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훗날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신들’과 ‘하나님’의 대조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괴롭혔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학대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당신들은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형들이 분명히 나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팔려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리로 왔습니다. 나는 팔린 be sold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be sent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당신들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민족과 만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나를 이리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팔려서 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왔습니까? 여러분은 점수에 팔려 대학에 왔습니까? 여러분은 연봉에 팔려 직장에 다닙니까? 여러분은 운명에 팔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습니까? 여러분은 어쩌다가 우연히 한국에 태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팔린 인생입니까? 팔린 것은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성적에 팔리고 돈 몇 푼인 연봉에 팔리고 운명에 팔린 노예입니까? 우리가 만일 연봉에 팔려 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운명의 장난으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성적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인생이 서글퍼집니다. 나란 존재가 그렇게 비참할 수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절로 쏟아져 나옵니다. 매사가 부정적이고 절망스럽게 됩니다. 운명에 울고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팔린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학점에 팔리고, 연봉에 팔리고, 운명에 팔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귀한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절대적인 뜻과 목적을 두고 나를 대학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목적을 두고 직장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목적, 소망을 두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우리가 학교에 온 것, 직장에 들어간 것, 우리가 결혼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팔린 존재가 아닌 보냄을 받은 존재! 이것이 크리스천의 존재의미요 목적입니다. 따라서 나의 삶에 운명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절망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인생에 대해 기대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을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요셉은 죄 없이 형들에게 팔려 환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사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지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아무 죄 없으신 의인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지 사흘 만에 살리어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팔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만민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보냄을 받은 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