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사도행전 제 18 강(말씀, 7:17-36, 요절 7:33)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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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생애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 됨을 전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모세의 생애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비판하는 누이 미리암을 내리치셔서 문둥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으로 세우신 모세를 대적하는 백성을 징벌하셨습니다. 모세를 거역한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이 곧 모세 중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반면에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고, 교회에 종들을 세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통해 역하사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에 대한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간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이르자 모세를 호렙산의 불꽃가운데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냄새나는 신을 벗고 주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미디안에서 나그네가 되어(17-29)
애굽에 거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과 합하여 모두 70명이었습니다(창46:27,출1:5). 그들은 요셉의 후광으로 고센 땅에서 목축을 하면서 지냈습니다(창46:26-34). 당시 목축업은 하층민들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 무려 장정만 60만 3550명이나 되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애굽 인구가 900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 이스라엘이 2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하늘의 뭇별과 해변의 모래알과 같은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들이 일어나자 이스라엘의 형편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혹시 전쟁이 나면 반기를 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노예가 되면 후손들이 모두 노예가 됩니다. 일단 노예가 되면 그 순간부터 자유가 박탈됩니다. 주권이 박탈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목적과 방향이 상실됩니다. ‘내일’이란 단어가 사라집니다. 내일이 없으니 희망이 있을 리 없습니다. 느는 것은 눈치뿐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감사가 없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이 입에 붙어 있고, 받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역사성과 역사의식이 없게 됩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기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갖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독수리가 창공을 나는 것과 같은 비전과 영적인 소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생깁니다. 습관은 습관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노예생활을 계속하다보면 근성이 생기는데 그 근성이 노예근성입니다. 노예근성은 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노예근성의 모습은 사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사탄의 노예가 되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1차원적인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이런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하는 위대한 사명을 가진 존귀한 존재입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과 비전이 넘치는 visionful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학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번성하여지자 히브리 산파인 십보라와 부아에게 이스라엘 중에 남자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습니다(출1:15-16). 그러나 산파는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출1:17). 이는 보이는 바로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가 태어나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지라고 공개 살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 곧 하수에 빠져 죽어야 하는 비참한 운명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태어나자 그의 부모는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임금의 명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 동안 키웠습니다. 부모는 더 이상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갈 상자에 넣어 나일강가의 갈대숲에 띄웠습니다(출2:3). 그리고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에게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공주는 그 안에 히브리 아이가 울고 있음을 보고는 모세를 궁중에 데려다가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 때 누이는 재치 있게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히브리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이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Tyler는 3세 이전에 인격의 92%가 형성된다고 했고, 우리 속담에도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에게서 받은 신앙교육은 모세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그의 피 속에는 히브리 사상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어 최고의 선진국인 애굽에서 학문을 배우고 궁중예절과 궁중무술을 배워 문무예지가 겸비한 왕자가 되었습니다(22). 이 궁중 교육은 후에 모세 5경을 기록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자 형제 이스라엘을 돌 볼 생각이 났습니다(23). 나이 40이 되었다는 것은 히브리사람으로서 자아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모세는 고민해야 하였습니다. 현재 모세는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히브리인이 된다면 이 모든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공주의 은혜와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는 아픔입니다. 모세는 여러 날 밤을 새며 고민해야 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냐?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 뜻대로 살 것인가? 히브리 백성으로서의 Identity를 가지고 살 것인가? 아니면 공주의 기대대로 살 것인가? 마침내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세상의 쾌락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단했습니다(히11:24,25). 이 결단으로 그는 위대한 모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이런 결단을 해야 합니다. 결단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영광과 축복이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모세가 히브리 백성의 고통을 돌아볼 때에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으로부터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궁중에서 배운 무술로 단숨에 애굽 사람을 죽이고 재빨리 모래사장에 묻었습니다. 이튿날 나가보니 오늘은 같은 히브리인끼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싸우는 것을 말리려다가 동족으로부터 오히려 배척을 받고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고 이드로 장인 집에서 40년간 자기 양도 아닌 처가 집 양을 치며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다보니 광야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창하게 하던 애굽 말도 다 잊어버렸습니다(출4:10). 화려하던 그의 풍모와 광채는 온데간데없고 양 똥 냄새만 풍기는 양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품었던 위대한 이상과 꿈과 동족에 대한 열정도 다 사라졌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문무예지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꿈은 산산이 깨어진 그 이름 모세였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린다고 산산이 깨어진 모세의 꿈이 되살아 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로 보내어 이런 혹독한 훈련을 받도록 했을까요?
첫째는 모세의 강한 자아를 깨어 겸손케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궁중 교육이 인간 기초훈련이었다면 광야훈련은 신앙교육으로 자아를 깨는 훈련이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이 자기 동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창한 언변과 인간조건을 믿었습니다. 이때야말로 자기 동족을 위하여 큰일을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과 혈기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광야 훈련을 통해 겸손과 온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민12:3).
둘째는 사람을 살리는 목자로 키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양은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양으로 비유합니다. 모세는 40년 간 양을 치며 노예근성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하고 품고 사랑하고 도울 수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대들고 원망하는 노예백성들을 끝까지 섬겨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광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의욕으로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아를 깨는 겸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광야 훈련을 통해 혈기가 죽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본성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광야 훈련을 통해 겸손한 자로 빚어질 때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네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30-33)
모세의 광야 훈련 40년 째였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광야 떨기나무에 나타나셨습니다. 가시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았습니다. 그 불꽃은 보통 불꽃과 달랐습니다. 모세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그 불꽃을 보기 위하여 떨기나무 가까이 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2,33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였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깊은 실의와 좌절 가운데 있는 모세에게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심령에 불꽃같은 비전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왜 신을 벗어야 합니까?
첫째는 그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입니까? 모세가 볼 때에 자기가 서 있는 광야는 거룩한 땅이 아니라 저주받은 땅이었습니다. 광야는 자신의 모든 꿈과 소망을 앗아간 곳입니다. 광야는 슬픔과 운명을 안겨 준 곳입니다. 광야는 사명을 앗아간 곳입니다. 광야는 좌절과 체념을 심어준 곳입니다. 광야는 처갓집 양이나 치는 별 볼일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내 운명을 팔아버린 비극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곳이 거룩한 땅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입니다. 우리가 비록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왔고 연봉에 따라 직장에 다니지만 이곳은 거룩한 캠퍼스, 거룩한 직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곳이고 사명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충성스러운 종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귀족이나 고관들은 긴 부츠와 같은 화려한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신발은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에 종들은 신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였습니다. 종은 오직 주인을 위하여 살고 주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받은 후 그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헌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신발을 벗어야 합니까?
첫째는 부정한 죄악의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 것은 과거와의 절대 단절을 의미합니다. 특히 우리가 자기를 소개하는 이력서를 쓰는데 이력서란 자기 발로 걸어온 경로입니다. 신발이 다닌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세의 과거의 이력이 끝나는 것입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애굽을 생각하거나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과거와의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진실한 회개를 통한 죄악과 단절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우리는 순결한 신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결혼한 순결한 신분인 것입니다. 혹시 이전에 사귀던 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혼하면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다시 연결되면 안 됩니다. 전에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온 신부가 신랑이 잠깐 나간 사이에 옛날 애인하고 전화하다가 들켜서 그 날로 파혼 당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면 죄악, 교만, 미움, 혹은 열등감, 절망, 불신, 나태, 자기사랑, 열등감, 미움 등,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딤전6:11)”고 했습니다.
둘째는 자기주장의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 4장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법정에서는 자기 권리를 포기할 때 신을 벗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신발을 벗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권리를 주인에게 이양하는 것으로 자기 권리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주권주의입니다. 이처럼 신을 벗는다는 것은 내려놓음을 말합니다. 나의 주장과 나의 고집, 나의 방법 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음은 겸손을 뜻합니다. 겸손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는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d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셋째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특수한 땅입니다. 신을 벗어야 들어가는 땅입니다. 여호수아 1장 3절에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5장 15절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신발바닥 도장이 아닌 발바닥 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며 믿음에는 순종이 따릅니다. 이를 볼 때에 신을 벗는다는 것은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회개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의 신을 벗고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애굽으로 보내리라(34-36)
부르심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34). 하나님은 애굽에서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과거 모세의 지팡이는 양을 보호하고 피로할 때 의지하는 지팡이이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한숨과 좌절과 운명의 지팡이였습니다. 이 지팡이에는 40년간의 모세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빨리 던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능력의 지팡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론과 함께 바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통해 노예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천박한 노예 백성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노예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무지와 교만으로 인해 모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세우시고 구원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모세를 배척했습니다. 이와 똑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3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메시야입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교만의 신을 벗고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생각과 고집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정욕과 육신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불평과 원망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이기심과 욕심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불신의 신을 벗습니다. 이제 앞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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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생애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 됨을 전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모세의 생애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비판하는 누이 미리암을 내리치셔서 문둥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으로 세우신 모세를 대적하는 백성을 징벌하셨습니다. 모세를 거역한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이 곧 모세 중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반면에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고, 교회에 종들을 세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통해 역하사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에 대한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간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이르자 모세를 호렙산의 불꽃가운데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냄새나는 신을 벗고 주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미디안에서 나그네가 되어(17-29)
애굽에 거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과 합하여 모두 70명이었습니다(창46:27,출1:5). 그들은 요셉의 후광으로 고센 땅에서 목축을 하면서 지냈습니다(창46:26-34). 당시 목축업은 하층민들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 무려 장정만 60만 3550명이나 되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애굽 인구가 900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 이스라엘이 2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하늘의 뭇별과 해변의 모래알과 같은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들이 일어나자 이스라엘의 형편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혹시 전쟁이 나면 반기를 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노예가 되면 후손들이 모두 노예가 됩니다. 일단 노예가 되면 그 순간부터 자유가 박탈됩니다. 주권이 박탈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목적과 방향이 상실됩니다. ‘내일’이란 단어가 사라집니다. 내일이 없으니 희망이 있을 리 없습니다. 느는 것은 눈치뿐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감사가 없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이 입에 붙어 있고, 받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역사성과 역사의식이 없게 됩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기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갖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독수리가 창공을 나는 것과 같은 비전과 영적인 소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생깁니다. 습관은 습관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노예생활을 계속하다보면 근성이 생기는데 그 근성이 노예근성입니다. 노예근성은 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노예근성의 모습은 사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사탄의 노예가 되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1차원적인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이런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하는 위대한 사명을 가진 존귀한 존재입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과 비전이 넘치는 visionful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학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번성하여지자 히브리 산파인 십보라와 부아에게 이스라엘 중에 남자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습니다(출1:15-16). 그러나 산파는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출1:17). 이는 보이는 바로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가 태어나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지라고 공개 살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 곧 하수에 빠져 죽어야 하는 비참한 운명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태어나자 그의 부모는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임금의 명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 동안 키웠습니다. 부모는 더 이상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갈 상자에 넣어 나일강가의 갈대숲에 띄웠습니다(출2:3). 그리고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에게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공주는 그 안에 히브리 아이가 울고 있음을 보고는 모세를 궁중에 데려다가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 때 누이는 재치 있게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히브리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이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Tyler는 3세 이전에 인격의 92%가 형성된다고 했고, 우리 속담에도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에게서 받은 신앙교육은 모세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그의 피 속에는 히브리 사상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어 최고의 선진국인 애굽에서 학문을 배우고 궁중예절과 궁중무술을 배워 문무예지가 겸비한 왕자가 되었습니다(22). 이 궁중 교육은 후에 모세 5경을 기록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자 형제 이스라엘을 돌 볼 생각이 났습니다(23). 나이 40이 되었다는 것은 히브리사람으로서 자아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모세는 고민해야 하였습니다. 현재 모세는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히브리인이 된다면 이 모든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공주의 은혜와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는 아픔입니다. 모세는 여러 날 밤을 새며 고민해야 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냐?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 뜻대로 살 것인가? 히브리 백성으로서의 Identity를 가지고 살 것인가? 아니면 공주의 기대대로 살 것인가? 마침내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세상의 쾌락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단했습니다(히11:24,25). 이 결단으로 그는 위대한 모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이런 결단을 해야 합니다. 결단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영광과 축복이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모세가 히브리 백성의 고통을 돌아볼 때에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으로부터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궁중에서 배운 무술로 단숨에 애굽 사람을 죽이고 재빨리 모래사장에 묻었습니다. 이튿날 나가보니 오늘은 같은 히브리인끼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싸우는 것을 말리려다가 동족으로부터 오히려 배척을 받고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고 이드로 장인 집에서 40년간 자기 양도 아닌 처가 집 양을 치며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다보니 광야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창하게 하던 애굽 말도 다 잊어버렸습니다(출4:10). 화려하던 그의 풍모와 광채는 온데간데없고 양 똥 냄새만 풍기는 양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품었던 위대한 이상과 꿈과 동족에 대한 열정도 다 사라졌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문무예지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꿈은 산산이 깨어진 그 이름 모세였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린다고 산산이 깨어진 모세의 꿈이 되살아 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로 보내어 이런 혹독한 훈련을 받도록 했을까요?
첫째는 모세의 강한 자아를 깨어 겸손케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궁중 교육이 인간 기초훈련이었다면 광야훈련은 신앙교육으로 자아를 깨는 훈련이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이 자기 동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창한 언변과 인간조건을 믿었습니다. 이때야말로 자기 동족을 위하여 큰일을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과 혈기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광야 훈련을 통해 겸손과 온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민12:3).
둘째는 사람을 살리는 목자로 키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양은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양으로 비유합니다. 모세는 40년 간 양을 치며 노예근성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하고 품고 사랑하고 도울 수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대들고 원망하는 노예백성들을 끝까지 섬겨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광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의욕으로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아를 깨는 겸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광야 훈련을 통해 혈기가 죽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본성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광야 훈련을 통해 겸손한 자로 빚어질 때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네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30-33)
모세의 광야 훈련 40년 째였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광야 떨기나무에 나타나셨습니다. 가시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았습니다. 그 불꽃은 보통 불꽃과 달랐습니다. 모세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그 불꽃을 보기 위하여 떨기나무 가까이 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2,33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였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깊은 실의와 좌절 가운데 있는 모세에게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심령에 불꽃같은 비전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왜 신을 벗어야 합니까?
첫째는 그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입니까? 모세가 볼 때에 자기가 서 있는 광야는 거룩한 땅이 아니라 저주받은 땅이었습니다. 광야는 자신의 모든 꿈과 소망을 앗아간 곳입니다. 광야는 슬픔과 운명을 안겨 준 곳입니다. 광야는 사명을 앗아간 곳입니다. 광야는 좌절과 체념을 심어준 곳입니다. 광야는 처갓집 양이나 치는 별 볼일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내 운명을 팔아버린 비극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곳이 거룩한 땅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입니다. 우리가 비록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왔고 연봉에 따라 직장에 다니지만 이곳은 거룩한 캠퍼스, 거룩한 직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곳이고 사명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충성스러운 종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귀족이나 고관들은 긴 부츠와 같은 화려한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신발은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에 종들은 신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였습니다. 종은 오직 주인을 위하여 살고 주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받은 후 그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헌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신발을 벗어야 합니까?
첫째는 부정한 죄악의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 것은 과거와의 절대 단절을 의미합니다. 특히 우리가 자기를 소개하는 이력서를 쓰는데 이력서란 자기 발로 걸어온 경로입니다. 신발이 다닌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세의 과거의 이력이 끝나는 것입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애굽을 생각하거나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과거와의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진실한 회개를 통한 죄악과 단절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우리는 순결한 신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결혼한 순결한 신분인 것입니다. 혹시 이전에 사귀던 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혼하면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다시 연결되면 안 됩니다. 전에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온 신부가 신랑이 잠깐 나간 사이에 옛날 애인하고 전화하다가 들켜서 그 날로 파혼 당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면 죄악, 교만, 미움, 혹은 열등감, 절망, 불신, 나태, 자기사랑, 열등감, 미움 등,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딤전6:11)”고 했습니다.
둘째는 자기주장의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 4장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법정에서는 자기 권리를 포기할 때 신을 벗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신발을 벗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권리를 주인에게 이양하는 것으로 자기 권리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주권주의입니다. 이처럼 신을 벗는다는 것은 내려놓음을 말합니다. 나의 주장과 나의 고집, 나의 방법 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음은 겸손을 뜻합니다. 겸손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는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d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셋째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특수한 땅입니다. 신을 벗어야 들어가는 땅입니다. 여호수아 1장 3절에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5장 15절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신발바닥 도장이 아닌 발바닥 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며 믿음에는 순종이 따릅니다. 이를 볼 때에 신을 벗는다는 것은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회개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의 신을 벗고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애굽으로 보내리라(34-36)
부르심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34). 하나님은 애굽에서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과거 모세의 지팡이는 양을 보호하고 피로할 때 의지하는 지팡이이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한숨과 좌절과 운명의 지팡이였습니다. 이 지팡이에는 40년간의 모세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빨리 던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능력의 지팡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론과 함께 바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통해 노예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천박한 노예 백성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노예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무지와 교만으로 인해 모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세우시고 구원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모세를 배척했습니다. 이와 똑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3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메시야입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교만의 신을 벗고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생각과 고집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정욕과 육신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불평과 원망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이기심과 욕심의 신을 벗습니다. 나의 불신의 신을 벗습니다. 이제 앞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