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사도행전 제 20 강(말씀, 7:51-58, 요절 7:55)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D. 360년에 줄리안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무명의 순교자가 원형경기장의 사자 밥이 되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황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무명의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또 묻습니다. “어째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줄리안 황제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주님이 살아 계시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 나사렛 목수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지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폐하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관을 짜고 계십니다.” 이는 A.D. 361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는 2년 후 A.D. 363년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승리자다.”
오늘 말씀은 스데반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장엄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동시에 참 순교의 표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본문을 보면 가해자와 순교자, 그리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누가 스데반을 죽였느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는가? 그리고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나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가해자인가? 아니면 스데반의 위치에 서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깊이 깨닫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저희가 이 말을 듣고(51-54, 57-58)
스데반은 그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51-53).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반역 행위를 했느냐? 역사를 보라!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었는데 그 후손들인 너희가 메시야까지 죽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고 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의인을 살인하더니 너희들도 똑같이 메시야까지 죽였다. 회개하라!” 스데반이 이 설교를 마치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54). 대체로 설교를 잘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고, 또 하나는 찔림을 줍니다. 저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누가 스데반을 죽였습니까? 불신자가 스데반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말씀을 듣고 나서 그랬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린 후였습니다. 저들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입니다. 이 뜻은 ‘화살이 꽂혔다. 정곡을 찔렀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전한 말씀을 자신들에게 전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이 말씀이 양심에 꽂혔습니다.
찔림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요 하나님께서 나사렛으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했다. 그런데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들어 그를 못 박아 죽였다. 너희는 살인자다. 너희는 십자가에 못을 박은 죄인이다(행2:22-36).” 베드로는 3000명을 향하여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항의할 수 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지금 누구에게 살인누명을 씌우는 거야? 예수를 죽인 자는 빌라도야! 그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어! 그리고 못 박은 사람은 로마 군병들이야! 동의한 사람들은 이 나라 최고 권력지도자들이야! 우리는 옆에서 구경만 했어. 당신이 뭔데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살인누명을 씌우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맞아 우리가 죽였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군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찔린 그들에게 “회개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그날에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인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를 갈았습니다. 마음이 오히려 더 굳어졌습니다. 악의가 생겼습니다. 양심에 찔리면 회개해야 하는데 반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고 똑같이 찔림을 받았는데 한쪽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가는 마음은 증오심입니다. 증오심은 사람을 죽이게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릴 때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구원의 계기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멸망의 계기가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말씀을 들었는데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목사님의 저 말씀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공개적으로 저럴 수 있어. 저 말씀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야”고 합니다. 자,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도들이 들으라고 전하지 지나가는 개보고 들으라고 전합니까? 목사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보고 들으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주일에 제일 은혜를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 오늘 설교 말씀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야. 회개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말씀을 듣고는 쓴 뿌리를 품도록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원수는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죽이는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교회의 원수 노릇하고 교회를 훼방합니다.
그들은 이를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귀까지 막았습니다(57). 귀를 열면 돌을 들어 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합니다. 듣는 자세가 없습니다. 귀를 막습니다. 특히 악에 바치면 귀를 막고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반면에 사람이 귀를 열고 ‘그래 얘기 해봐 들을게’ 하면 절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부부 싸움을 왜 하지요? “당신 얘기해보세요. 내가 듣겠소.” 해보세요. 싸울 수 없습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니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간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57,58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는 군중심리, 집단화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군중심리에 휩쓸리게 되면 이성이 마비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 됩니다. 법을 어기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 못합니다. 악의가 집단화할 때에 그 파장은 엄청납니다. 결국 그들은 악의가 집단화되어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서도 싸움꾼들을 볼 수 있는데, 싸움꾼들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귀를 막고 남의 소리를 안 듣고, 그리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귀를 열고 듣는 겸허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현대 교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면 ‘당신이나 회개하쇼! 뭘 회개하란 말입니까?’ 회개 안 합니다. 현대 교인들은 설교를 지닌 심판적인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교인들은 오늘 스데반을 돌로 치는 현장에 있는 공의회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귀를 간지럽게 하는 축복의 말씀만 좋아하지 회개의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 귀를 막습니다. ‘누가 감히 나에게 회개하라고 해’ 회개하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쓴 뿌리를 품고 복수심으로 나타납니다. 스데반이 깡패나 불신자들에게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믿음이 좋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를 깨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기의 삶의 스타일을 바꿔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구원이 있습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을 치며 불신과 위선과 거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안일과 탐욕과 정욕과 음란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와 사치와 허영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나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5)”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찔림이 되면 변명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에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55-56, 59-60).
이와 달리 스데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방언도 터지고 진동도 하고 황홀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영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한없는 자유와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입니다. 담대함으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표독스럽고 일그러진 모습이 천사의 얼굴로 변합니다. 절대적인 샬롬, 평화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과 공포에 쌓여 있습니다. 그때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주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위를 보면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폭등하였다. 농민이 마땅히 받을 직불금을 고급 공무원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받았다는 기사를 보면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립니다. 화가 납니다. 원망과 불평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자녀를 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마 스데반이 땅을 처다 보았다면 먼저 처자식이 보였을 것입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렵습니다. 공포심으로 얼굴이 창백해집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절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의 것은 눈에 일체의 것입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반면에 위의 것은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긍휼과 인내와 순결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스데반은 눈을 들어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늘을 향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56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인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서 계신 예수님! 사도신경에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벵겔이라는 주석가는 주님께서 스데반을 환영하시기 위해 일어서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순교자를 보시고 구출작전을 펴지 않으시고 장렬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켜보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키어 기뻐하시고 영접하셨습니다. “나를 환영하기 위해 일어나서 서 계신 예수님, 내가 무엇이건대 주님이 일어서서 환영하시나니!” 스데반을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에 우편에 서서 나를 환영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위를 보니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 평화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였습니다. 찬송가 469장을 불러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데서 밝은 가락 울려나오네.....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마음에 기쁨과 찬송이 나옵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감사가 나옵니다. 유대인 속담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거든 위를 바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용서와 사랑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면 마음이 평안과 자유와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이웃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땅을 보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이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이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나란 존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면 해같이 빛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실수를 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는 여러 번 실수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위를 보지 못하고 백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때 위를 보지 않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다가 실수했습니다.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데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두 번 쳤습니다(민20:11). 그 때에 만일 그가 위를 보고 한번만 쳤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위를 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땅을 보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세상을 보다보니 그만 실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보고 땅을 보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보면 길이 보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땅을 보며 불뱀을 잡기 운동을 벌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놋뱀은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그들이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에 살았습니다. 불신의 불뱀, 원망의 불뱀, 절망의 불뱀, 두려움의 불뱀이 우리 주위를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힘입니다. 따라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 순간 절망에서 희망이 보입니다. 불신에서 믿음이 보입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이 생깁니다.
59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위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기도와 비슷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러나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속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제사함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기도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스데반 자신은 저들의 죄를 사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죄를 사할 권리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죄를 사하시고 심판하실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내 실수로 저들이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 기도를 드리고 그의 생이 마감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잔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은 언젠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깨어나게 됩니다. 아멘.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와 기도는 금방 큰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거꾸러뜨려서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열매가 바로 바울이 된 겁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후에 바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울은 후에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보고, 신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바울의 신학은 스데반의 설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경청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사울의 얼굴을 또다시 천사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먼저 보지 말고, 세상을 먼저 보지 말고, 하늘을 먼저 보고 보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D. 360년에 줄리안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무명의 순교자가 원형경기장의 사자 밥이 되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황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무명의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또 묻습니다. “어째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줄리안 황제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주님이 살아 계시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 나사렛 목수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지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폐하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관을 짜고 계십니다.” 이는 A.D. 361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는 2년 후 A.D. 363년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승리자다.”
오늘 말씀은 스데반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장엄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동시에 참 순교의 표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본문을 보면 가해자와 순교자, 그리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누가 스데반을 죽였느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는가? 그리고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나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가해자인가? 아니면 스데반의 위치에 서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깊이 깨닫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저희가 이 말을 듣고(51-54, 57-58)
스데반은 그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51-53).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반역 행위를 했느냐? 역사를 보라!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었는데 그 후손들인 너희가 메시야까지 죽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고 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의인을 살인하더니 너희들도 똑같이 메시야까지 죽였다. 회개하라!” 스데반이 이 설교를 마치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54). 대체로 설교를 잘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고, 또 하나는 찔림을 줍니다. 저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누가 스데반을 죽였습니까? 불신자가 스데반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말씀을 듣고 나서 그랬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린 후였습니다. 저들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입니다. 이 뜻은 ‘화살이 꽂혔다. 정곡을 찔렀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전한 말씀을 자신들에게 전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이 말씀이 양심에 꽂혔습니다.
찔림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요 하나님께서 나사렛으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했다. 그런데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들어 그를 못 박아 죽였다. 너희는 살인자다. 너희는 십자가에 못을 박은 죄인이다(행2:22-36).” 베드로는 3000명을 향하여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항의할 수 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지금 누구에게 살인누명을 씌우는 거야? 예수를 죽인 자는 빌라도야! 그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어! 그리고 못 박은 사람은 로마 군병들이야! 동의한 사람들은 이 나라 최고 권력지도자들이야! 우리는 옆에서 구경만 했어. 당신이 뭔데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살인누명을 씌우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맞아 우리가 죽였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군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찔린 그들에게 “회개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그날에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인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를 갈았습니다. 마음이 오히려 더 굳어졌습니다. 악의가 생겼습니다. 양심에 찔리면 회개해야 하는데 반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고 똑같이 찔림을 받았는데 한쪽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가는 마음은 증오심입니다. 증오심은 사람을 죽이게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릴 때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구원의 계기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멸망의 계기가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말씀을 들었는데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목사님의 저 말씀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공개적으로 저럴 수 있어. 저 말씀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야”고 합니다. 자,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도들이 들으라고 전하지 지나가는 개보고 들으라고 전합니까? 목사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보고 들으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주일에 제일 은혜를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 오늘 설교 말씀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야. 회개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말씀을 듣고는 쓴 뿌리를 품도록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원수는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죽이는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교회의 원수 노릇하고 교회를 훼방합니다.
그들은 이를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귀까지 막았습니다(57). 귀를 열면 돌을 들어 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합니다. 듣는 자세가 없습니다. 귀를 막습니다. 특히 악에 바치면 귀를 막고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반면에 사람이 귀를 열고 ‘그래 얘기 해봐 들을게’ 하면 절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부부 싸움을 왜 하지요? “당신 얘기해보세요. 내가 듣겠소.” 해보세요. 싸울 수 없습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니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간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57,58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는 군중심리, 집단화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군중심리에 휩쓸리게 되면 이성이 마비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 됩니다. 법을 어기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 못합니다. 악의가 집단화할 때에 그 파장은 엄청납니다. 결국 그들은 악의가 집단화되어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서도 싸움꾼들을 볼 수 있는데, 싸움꾼들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귀를 막고 남의 소리를 안 듣고, 그리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귀를 열고 듣는 겸허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현대 교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면 ‘당신이나 회개하쇼! 뭘 회개하란 말입니까?’ 회개 안 합니다. 현대 교인들은 설교를 지닌 심판적인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교인들은 오늘 스데반을 돌로 치는 현장에 있는 공의회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귀를 간지럽게 하는 축복의 말씀만 좋아하지 회개의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 귀를 막습니다. ‘누가 감히 나에게 회개하라고 해’ 회개하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쓴 뿌리를 품고 복수심으로 나타납니다. 스데반이 깡패나 불신자들에게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믿음이 좋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를 깨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기의 삶의 스타일을 바꿔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구원이 있습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을 치며 불신과 위선과 거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안일과 탐욕과 정욕과 음란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와 사치와 허영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나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5)”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찔림이 되면 변명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에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55-56, 59-60).
이와 달리 스데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방언도 터지고 진동도 하고 황홀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영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한없는 자유와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입니다. 담대함으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표독스럽고 일그러진 모습이 천사의 얼굴로 변합니다. 절대적인 샬롬, 평화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과 공포에 쌓여 있습니다. 그때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주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위를 보면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폭등하였다. 농민이 마땅히 받을 직불금을 고급 공무원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받았다는 기사를 보면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립니다. 화가 납니다. 원망과 불평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자녀를 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마 스데반이 땅을 처다 보았다면 먼저 처자식이 보였을 것입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렵습니다. 공포심으로 얼굴이 창백해집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절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의 것은 눈에 일체의 것입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반면에 위의 것은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긍휼과 인내와 순결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스데반은 눈을 들어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늘을 향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56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인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서 계신 예수님! 사도신경에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벵겔이라는 주석가는 주님께서 스데반을 환영하시기 위해 일어서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순교자를 보시고 구출작전을 펴지 않으시고 장렬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켜보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키어 기뻐하시고 영접하셨습니다. “나를 환영하기 위해 일어나서 서 계신 예수님, 내가 무엇이건대 주님이 일어서서 환영하시나니!” 스데반을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에 우편에 서서 나를 환영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위를 보니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 평화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였습니다. 찬송가 469장을 불러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데서 밝은 가락 울려나오네.....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마음에 기쁨과 찬송이 나옵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감사가 나옵니다. 유대인 속담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거든 위를 바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용서와 사랑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면 마음이 평안과 자유와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이웃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땅을 보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이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이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나란 존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면 해같이 빛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실수를 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는 여러 번 실수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위를 보지 못하고 백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때 위를 보지 않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다가 실수했습니다.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데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두 번 쳤습니다(민20:11). 그 때에 만일 그가 위를 보고 한번만 쳤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위를 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땅을 보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세상을 보다보니 그만 실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보고 땅을 보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보면 길이 보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땅을 보며 불뱀을 잡기 운동을 벌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놋뱀은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그들이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에 살았습니다. 불신의 불뱀, 원망의 불뱀, 절망의 불뱀, 두려움의 불뱀이 우리 주위를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힘입니다. 따라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 순간 절망에서 희망이 보입니다. 불신에서 믿음이 보입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이 생깁니다.
59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위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기도와 비슷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러나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속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제사함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기도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스데반 자신은 저들의 죄를 사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죄를 사할 권리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죄를 사하시고 심판하실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내 실수로 저들이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 기도를 드리고 그의 생이 마감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잔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은 언젠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깨어나게 됩니다. 아멘.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와 기도는 금방 큰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거꾸러뜨려서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열매가 바로 바울이 된 겁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후에 바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울은 후에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보고, 신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바울의 신학은 스데반의 설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경청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사울의 얼굴을 또다시 천사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먼저 보지 말고, 세상을 먼저 보지 말고, 하늘을 먼저 보고 보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