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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22 강(말씀, 8:26-40, 요절 8:35)
빌립의 에티오피아의 내시 전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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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두 사도가 와서 빌립의 전도 사역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이 빌립에게 들려 왔습니다. 광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26). 이에 빌립이 순종하여 광야로 갔습니다. 다시 성령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가라(29). 빌립은 달려가서 병거 가까이 갔습니다. 성령께서 또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전도하라. 그가 이사야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빌립을 강권적으로 붙드시어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사용하시어 선교역사에 쓰셨습니다. 선교역사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필요한 사람을 쓰십니다.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역사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의 역사를 친히 이루어나가십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빌립(26)
어느 날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성령께서 빌립을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사 대로’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약 200리쯤 되는 거리입니다. 가사 대로를 따라 가면 이집트가 나오고 더 가면 구스, 즉 에티오피아가 나옵니다. 그 길은 광야길입니다. 광야는 험한 곳입니다. 광야는 맹수와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무엇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무조건 그냥 그 길을 따라 가라 하셨습니다. 가라.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라고 명하신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28:18,빌2:10,11). “너희는 가라(Therefore go.)” ‘가라’는 뜻은 헬라어로 포류덴테스(τορευθέντες)로 한계를 넘어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가라는 전쟁 용어입니다. 총탄이 퍼붓는 곳이라도 가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절대적인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라! 하시면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UN 가입국 2006년 기준으로 192개국입니다. UN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200개국 이상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는 각기 족족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5,300개의 종족이 있습니다. 거기다 사마리아 족속, 세리 족속, 합병증 족속, 베드로 족속, 답답한 안드레 족속, 계산 잘 하는 빌립 족속, 의심을 잘 하는 도마 족속, 이기적인 마태 족속 등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족속’이란 한 세대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를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가라’는 명령은 끝없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는 빌립(27a)
빌립은 주님의 가라는 명령을 듣고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가라고 하십니까? 그 길은 광야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지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복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변명하고, 여러 이유를 달며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7a절을 보면 그는 일어나 출발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무조건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는 이유를 달지 않고 일어나 떠났습니다. 성령의 지시가 있자마자 두말없이 즉각 광야 길로 향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귀를 열고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말씀에 철저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미덕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도 더 낫고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나름대로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식으로, 자기 스타일로, 자기에게로 골인해 버립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계획, 자기 스타일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꼭 이 길 밖에 없는가?’ 속으로 자기 생각을 고집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관을 앞세워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순종을 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고 줏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번거로운 종교 행사보다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나름대로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을 구원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처음도 순종, 과정도 순종, 마지막도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모두가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 길로 그냥 전진했습니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무조건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는 끝까지 목표를 잃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목표 지점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분명한 목표, 예수님을 붙잡고 좇아갔습니다(빌3:14). 바울은 어떤 시련과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한눈팔지 않고 그 목표에 헌신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삶이란 삶의 목표를 잊지 않고 끝까지 질주하는 것입니다.
마젤란이 처음으로 세계를 항해로 일주할 때 많은 시련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2년 동안 계획했던 항해가 3년 이상이나 걸렸습니다. 식량이 고갈됩니다. 배의 모든 장비가 마모되기 시작합니다. 파선 직전에 이릅니다. 설상가상으로 몇 사람들이 선상 반란을 시도합니다. 이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젤란 함장은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계속해서 한 가지 단어만을 되풀이했습니다. “계속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우리가 인생의 소명을 성취하는 일, 그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일, 그것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셋째,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 빌립(27b-29)
빌립이 광야 길로 나갔을 때 마침 여기에는 병거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 행렬은 에티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가라. 29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는 명령에 순종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병거에 탄 인물이 누구입니까? 병거에 탄 사람은 에티오피아 왕족입니다. 중요한 인물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재무부 장관입니다. 본문을 보면 병거 한 대가 달랑 광야를 지나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국의 재무부 장관이 행차하는데 한 병거만 갔겠습니까? 거기다가 광야 길을 혼자 갔겠습니까? 적어도 그 행렬이 50명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촌사람인 빌립이 그 병거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잘못하다간 강도로 몰려 죽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낯선 사람에게로 성큼 다가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이 가까이 가라고 하니 그는 가까이 나갔습니다. 이것은 모험입니다. 그가 모험을 무릅쓰고 나갔을 때에 국고를 맡은 에티오피아 내시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선교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와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다니고, 예배를 드릴 때에도 친한 사람들끼리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선교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 옆에서 예배를 드리고 끝나고 나서 인사도 나누고 또 교제를 갖는 것이 선교적입니다. 매주 낯선 사람과 만나고 폭 넓은 교제를 가져보세요. 우리의 삶의 폭이 넓어집니다. 반면에 교회에 와서 아는 사람끼리만 만나 보세요. 폭 넓은 교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지난 8월에 한반도평화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CMI에서는 저와 고광옥 목사님이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남북문제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이 모두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주로 고광옥 목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를 본 홍정길 목사님이 둘이 붙어 다니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다른 분들과 대화도 하고 교제를 갖고 면함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북문제에 대해 식견이 넓어지었습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점이 있지만 그 틀을 깨어야합니다. 그래야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의 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선교의 영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혹은 직장에서도 친한 사람끼리 함께 하지 말고 폭넓은 교제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제의 폭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빌립(30-35)
빌립이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이사야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가마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은 한눈에 바로 이 사람이 성령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임을 확신하였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읽으시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의 대답은 지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성경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또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혼자 읽고 기도하다가 터득했다느니 직통 계시를 받았다느니 하는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성경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과 더불어 겸손히 가르침을 받은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달달 암송한다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크리스천입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크리스천입니다. 성경은 도덕률이나 인간 철학을 배우는 윤리서나 철학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읽더라도, 신약을 읽더라도, 요한계시록을 읽더라도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선생이 절대로 필요하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 선생을 양성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낯선 사람인 빌립으로부터도 배우고자 하는 learning mind,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을 병거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읽고 있는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7,8절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지로 가는 양이 누구를 말하는가? 저가 선지자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빌립은 내시의 질문을 받자마자 내시가 읽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35). 32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7절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구약의 복음서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양으로 비유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의 특징과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양에 대해 친숙합니다. 양의 특징은 조용하고 순종적입니다. 반면에 염소의 특징은 반동적이고 불순종의 대명사입니다. 목자가 어린양은 안고 가도 양은 가만히 있습니다. 물론 양도 크면 버팅기기도 하지만 어린 양은 조용하고 순종적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말이 없고 겸손하고 온유하던 사람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다 싶으면 사납고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곤욕을 당하여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반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악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 갖가지 변명합니다. 저명한 변호사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합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을 써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조금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거짓 고소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몸으로 120대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엮어 푹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에는 한 줄기 두 줄기 피가 흘려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70kg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몇 발짝 가시다가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군병들이 발길질과 채찍이 가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 가시다가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군병들은 옆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쾅! 쾅! 쾅!’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까? 왜 채찍에 맞고, 수치와 멸시를 당하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은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4,25).”
예수님은 나의 패배감과 열등감과 미움과 증오심과 시기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부끄러운 정욕의 죄 때문에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탐심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나오면 아무 조건 없이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죄로 인한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정욕으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합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움과 증오심, 열등감과 운명주의로 무기력한 삶을 사는 분도 있습니다. 완벽주의로 인해 늘 불안한 사람도 있습니다. 시대를 비판하는 냉소주의와 우울증으로 인한 단잠을 자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누가 죄 문제와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철학? 종교생활? 예술? 스포츠? 컴퓨터 게임? 명상? 이런 것으로 결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과 내면의 상처들은 오직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버림받으신 예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혼자 괴로워 할 것이 아닙니다. 나의 허물과 죄악을 짊어지고 비참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 대신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 때 모든 죄의 고통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화가 내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섯째,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빌립(36-40).
빌립의 말씀을 들은 내시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과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솟아났습니다. 그리하여 내시는 빌립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36). 이리하여 그렇게도 은혜를 사모하던 내시는 고향 땅에 이르기 전에 성령의 역사로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세례는 사죄의 은총을 입었다는 표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평생 주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자 결단입니다.
선교는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에 선교는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십니다.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빌립의 에티오피아의 내시 전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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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두 사도가 와서 빌립의 전도 사역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이 빌립에게 들려 왔습니다. 광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26). 이에 빌립이 순종하여 광야로 갔습니다. 다시 성령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가라(29). 빌립은 달려가서 병거 가까이 갔습니다. 성령께서 또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전도하라. 그가 이사야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빌립을 강권적으로 붙드시어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사용하시어 선교역사에 쓰셨습니다. 선교역사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필요한 사람을 쓰십니다.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역사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의 역사를 친히 이루어나가십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빌립(26)
어느 날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성령께서 빌립을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사 대로’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약 200리쯤 되는 거리입니다. 가사 대로를 따라 가면 이집트가 나오고 더 가면 구스, 즉 에티오피아가 나옵니다. 그 길은 광야길입니다. 광야는 험한 곳입니다. 광야는 맹수와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무엇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무조건 그냥 그 길을 따라 가라 하셨습니다. 가라.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라고 명하신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28:18,빌2:10,11). “너희는 가라(Therefore go.)” ‘가라’는 뜻은 헬라어로 포류덴테스(τορευθέντες)로 한계를 넘어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가라는 전쟁 용어입니다. 총탄이 퍼붓는 곳이라도 가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절대적인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라! 하시면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UN 가입국 2006년 기준으로 192개국입니다. UN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200개국 이상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는 각기 족족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5,300개의 종족이 있습니다. 거기다 사마리아 족속, 세리 족속, 합병증 족속, 베드로 족속, 답답한 안드레 족속, 계산 잘 하는 빌립 족속, 의심을 잘 하는 도마 족속, 이기적인 마태 족속 등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족속’이란 한 세대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를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가라’는 명령은 끝없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는 빌립(27a)
빌립은 주님의 가라는 명령을 듣고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가라고 하십니까? 그 길은 광야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지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복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변명하고, 여러 이유를 달며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7a절을 보면 그는 일어나 출발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무조건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는 이유를 달지 않고 일어나 떠났습니다. 성령의 지시가 있자마자 두말없이 즉각 광야 길로 향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귀를 열고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말씀에 철저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미덕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도 더 낫고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나름대로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식으로, 자기 스타일로, 자기에게로 골인해 버립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계획, 자기 스타일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꼭 이 길 밖에 없는가?’ 속으로 자기 생각을 고집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관을 앞세워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순종을 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고 줏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번거로운 종교 행사보다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나름대로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을 구원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처음도 순종, 과정도 순종, 마지막도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모두가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 길로 그냥 전진했습니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무조건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는 끝까지 목표를 잃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목표 지점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분명한 목표, 예수님을 붙잡고 좇아갔습니다(빌3:14). 바울은 어떤 시련과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한눈팔지 않고 그 목표에 헌신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삶이란 삶의 목표를 잊지 않고 끝까지 질주하는 것입니다.
마젤란이 처음으로 세계를 항해로 일주할 때 많은 시련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2년 동안 계획했던 항해가 3년 이상이나 걸렸습니다. 식량이 고갈됩니다. 배의 모든 장비가 마모되기 시작합니다. 파선 직전에 이릅니다. 설상가상으로 몇 사람들이 선상 반란을 시도합니다. 이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젤란 함장은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계속해서 한 가지 단어만을 되풀이했습니다. “계속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우리가 인생의 소명을 성취하는 일, 그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일, 그것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셋째,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 빌립(27b-29)
빌립이 광야 길로 나갔을 때 마침 여기에는 병거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 행렬은 에티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가라. 29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는 명령에 순종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병거에 탄 인물이 누구입니까? 병거에 탄 사람은 에티오피아 왕족입니다. 중요한 인물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재무부 장관입니다. 본문을 보면 병거 한 대가 달랑 광야를 지나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국의 재무부 장관이 행차하는데 한 병거만 갔겠습니까? 거기다가 광야 길을 혼자 갔겠습니까? 적어도 그 행렬이 50명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촌사람인 빌립이 그 병거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잘못하다간 강도로 몰려 죽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낯선 사람에게로 성큼 다가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이 가까이 가라고 하니 그는 가까이 나갔습니다. 이것은 모험입니다. 그가 모험을 무릅쓰고 나갔을 때에 국고를 맡은 에티오피아 내시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선교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와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다니고, 예배를 드릴 때에도 친한 사람들끼리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선교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 옆에서 예배를 드리고 끝나고 나서 인사도 나누고 또 교제를 갖는 것이 선교적입니다. 매주 낯선 사람과 만나고 폭 넓은 교제를 가져보세요. 우리의 삶의 폭이 넓어집니다. 반면에 교회에 와서 아는 사람끼리만 만나 보세요. 폭 넓은 교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지난 8월에 한반도평화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CMI에서는 저와 고광옥 목사님이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남북문제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이 모두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주로 고광옥 목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를 본 홍정길 목사님이 둘이 붙어 다니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다른 분들과 대화도 하고 교제를 갖고 면함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북문제에 대해 식견이 넓어지었습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점이 있지만 그 틀을 깨어야합니다. 그래야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의 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선교의 영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혹은 직장에서도 친한 사람끼리 함께 하지 말고 폭넓은 교제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제의 폭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빌립(30-35)
빌립이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이사야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가마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은 한눈에 바로 이 사람이 성령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임을 확신하였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읽으시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의 대답은 지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성경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또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혼자 읽고 기도하다가 터득했다느니 직통 계시를 받았다느니 하는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성경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과 더불어 겸손히 가르침을 받은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달달 암송한다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크리스천입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크리스천입니다. 성경은 도덕률이나 인간 철학을 배우는 윤리서나 철학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읽더라도, 신약을 읽더라도, 요한계시록을 읽더라도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선생이 절대로 필요하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 선생을 양성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낯선 사람인 빌립으로부터도 배우고자 하는 learning mind,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을 병거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읽고 있는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7,8절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지로 가는 양이 누구를 말하는가? 저가 선지자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빌립은 내시의 질문을 받자마자 내시가 읽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35). 32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7절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구약의 복음서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양으로 비유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의 특징과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양에 대해 친숙합니다. 양의 특징은 조용하고 순종적입니다. 반면에 염소의 특징은 반동적이고 불순종의 대명사입니다. 목자가 어린양은 안고 가도 양은 가만히 있습니다. 물론 양도 크면 버팅기기도 하지만 어린 양은 조용하고 순종적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말이 없고 겸손하고 온유하던 사람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다 싶으면 사납고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곤욕을 당하여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반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악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 갖가지 변명합니다. 저명한 변호사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합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을 써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조금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거짓 고소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몸으로 120대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엮어 푹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에는 한 줄기 두 줄기 피가 흘려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70kg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몇 발짝 가시다가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군병들이 발길질과 채찍이 가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 가시다가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군병들은 옆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쾅! 쾅! 쾅!’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까? 왜 채찍에 맞고, 수치와 멸시를 당하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은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4,25).”
예수님은 나의 패배감과 열등감과 미움과 증오심과 시기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부끄러운 정욕의 죄 때문에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탐심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나오면 아무 조건 없이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죄로 인한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정욕으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합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움과 증오심, 열등감과 운명주의로 무기력한 삶을 사는 분도 있습니다. 완벽주의로 인해 늘 불안한 사람도 있습니다. 시대를 비판하는 냉소주의와 우울증으로 인한 단잠을 자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누가 죄 문제와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철학? 종교생활? 예술? 스포츠? 컴퓨터 게임? 명상? 이런 것으로 결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과 내면의 상처들은 오직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버림받으신 예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혼자 괴로워 할 것이 아닙니다. 나의 허물과 죄악을 짊어지고 비참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 대신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 때 모든 죄의 고통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화가 내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섯째,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빌립(36-40).
빌립의 말씀을 들은 내시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과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솟아났습니다. 그리하여 내시는 빌립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36). 이리하여 그렇게도 은혜를 사모하던 내시는 고향 땅에 이르기 전에 성령의 역사로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세례는 사죄의 은총을 입었다는 표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평생 주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자 결단입니다.
선교는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에 선교는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십니다.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