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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24 강(말씀, 9:20-31, 요절, 9:21)
사울의 첫 전도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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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의 그릇에는 불의와 불순종과 유대교의 교리가 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울을 주님의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부르시어 그의 그릇에 의와 순종과 복음을 담으셨습니다. 이제 사울은 성경을 유대교 중심에서 십자가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핍박자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화끈한 변화를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해 체계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과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의 깊이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 성경을 들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것을 성경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했습니다(갈1:17).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복음을 아는 만큼, 경험하고 체험한 만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광야 훈련을 통한 믿음의 연단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즉시 복음을 전하는 사울(20-22)
사람이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확 바꾼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삶의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더욱 더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환인, 환웅, 단군, 이 삼신을 섬겼습니다. 환인, 환웅, 단군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를 아십니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입니다. 의당 부처를 모신 전을 불전(佛殿)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부처를 모신 전을 불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라고 했습니다. 불전이 대웅전으로 된 사연은 이러합니다.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은 환인, 환웅, 단군 등, 3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3신이 불교 사찰로 대체되면서 인간신 중에서 제일 으뜸으로 여겼던 환웅을 부처로 바꾸어 환웅보다 큰 웅을 모시는 전, 大雄殿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놓고 보니 지금까지 섬겼던 3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대웅전의 위의 오른쪽에 3신각을 만들어 3신을 계속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서 예불을 하고나서 3신각에 가서 삼신에게 또 비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교 신자는 별로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토속적인 신앙, 기복 신앙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들어오자 기독교를 기복 종교로 만들어,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을 여기고 예배당을 대성전으로 부릅니다. 이처럼 삶의 방법은 오랜 동안 습관과 관습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과 무식의식 세계를 지배합니다. 따라서 방법,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토속신앙을 섬기던 데서 기독교로 바꾸는 것도 사실 쉽지 않지만 그것보다 방법, 삶의 형태를 바꾸어 기독교 문화화하고 인격화하고 사회화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혼할 때에 날을 잡고, 이사를 할 때에 좋은 날을 잡는다고 점쟁이를 찾는 다 이런데서 기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을 보세요. 그는 삶의 목적이 확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 신봉자에서 기독교신봉자로 순간에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교를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는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그 즉시로 전했습니다. 그가 복음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완전히 납득을 하고, 체계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 믿고 확신하고 아는 것만큼 전했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 알아야 전도하고, 또 가르치고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아는 만큼’, ‘믿는 만큼’, ‘체험한 만큼’ 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합리적인 이론이나 지식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지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이론이나 지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나름대로 확신에 찬 사람에게 합리적인 이론과 지식으로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I’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사울은 복음에 대해 합리적인 이론이 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체험한 사실을 전했습니다. “나를 다메섹에서 부활과 빛으로 찾아오시고 만나 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아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로고스가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3위의 한분이신 2위이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세계에 사시고 역사적인 존재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동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령하고 영화로우신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신령하고 영화로우신 몸으로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령이나 천사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영화로우신 몸으로 계십니다. 그 영화로우신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시는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나와 같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에 앞서 가시는 대장이십니다.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나를 위대한 그릇으로 쓰십니다. 나를 가꾸시고,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당신의 종으로 쓰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실패했을 때나, 성공했을 때나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좋을 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세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반드시 임재하십니다.
21절을 보면 사울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된 줄로 알고 믿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조롱했습니다. 사울을 비웃었습니다. “아니 저 친구,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잔해하던 사람이 아니야! 저 친구 예수쟁이들을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기 위해 여기 왔던 사람이 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런 조롱과 비웃음은 오히려 사울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전하도록 하게 했습니다(22). 그는 더욱 더 확신 있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믿는 만큼, 내가 체험한 만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할 수 있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 사울의 아라비아 광야생활(23-25).
23절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가 나옵니다. ‘여러 날’은 갈라디아서 1장 16,17의 아라비아 3년 광야 생활기간을 말합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예수님을 만나 변화한 사울은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사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혈육에게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이해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울은 바리새인이요 공회의원으로 잘 나가는 젊은 청년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단으로 낙인찍힌 예수교를 전한다고 할 때 부모님들이 용인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아니했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
사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학자들은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약 3년 동안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하여 영적 훈련 받은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 생활을 한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공적인 사역을 하기 앞서 광야에서 거처한 것과 같습니다(눅1:80). 무엇보다도 주님의 공생애 시작에 40일 동안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되어지기 위해서 아라비아의 3년이란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3년 동안 광야에 가서 묵상하며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한 곳에 가서 구약 성경을 읽고 그 뜻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 때 그는 복음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길게 또는 짧게 연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 기간에 주님과 더 깊은 교제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기간은 더 깊은 영성을 갖추기 위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자꾸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빨리 가야하는데 길이 막힙니다. 다 된 것 같았다가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더 훈련 받아야 하고, 더 준비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 시련의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금방 눈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지는 것 또한 아닙니다.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성령 충만하여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23,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습니다. 사울은 이제 핍박하던 자가 핍박자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나타나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를 하였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고 하던 자가 오히려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울이 변해도 확실하게 변하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면서 무엇 때문에 갈등을 느낍니까? 예수 잘 믿어 보려고 하는데 삶이 꼬일 때가 아닐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된다면 갈등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이전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무엇이 잘 안 돼요? 이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바울을 보세요. 이제 예수님을 믿고 광야에서 3년 동안 훈련을 받고 성령 충만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핍박자들이 나타나 사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눈앞에 어려움이 있다고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요’, ‘공사 중’이라는 점입니다. 사방이 꽉 막히고 4방이 깜깜해지면 하나님이 구원의 창문을 여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5절 보면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11장 32절 이하에 보면 사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때에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그러니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울에게 감정이 있어 핍박하고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메섹 왕의 명령을 받고 방백이 군사를 풀어 사울을 잡으려고 조직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울의 인생은 완전히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니 아니합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사방이 깜깜해지면 캄캄할수록 하늘에 별 빛이 보이듯이 하늘 문 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창문을 활짝 열어 믿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절망의 때에 희망을 가지십시오.
나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명한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글에 보면 감옥 안에서 너무 혹독한 고통으로 죄수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프랭클이 보니 사람들이 고통으로 죽는 것보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절망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한 죄수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창 너머 봐야 희색 담벼락 밖에 더 없지 않소?” 그러자 프랭클이 “아니 그 희색 담벼락 넘어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푸른 하늘을 보십시오. 밤에도 빛나는 저 별들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현실의 어둡고 칙칙하고 차가운 벽만 바라보지 말고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창문을 바라보십시오. 그 구원의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고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젊은이들의 취업문이 난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실업자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수출은 줄고 내수는 얼어붙어 경제가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남북문제가 꽉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 민족은 이보다 더 혹독한 시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련들을 이겼습니다. 지금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기로소니 50, 60년대 보리 고개가 있던 시절보다야 더 하겠습니까? 어려울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구원의 창문을 통해 우리에게 비치는 구원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사방이 캄캄해지면 구원의 창문이 열려짐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31장 4절을 부르겠습니다. ♪영화롭게 시온성문 들어가서 다닐 때 흰옷 입고 황금 길을 다니며 금거문고 맞추어서 새노래를 부를 때 세상 고생 모두 잊어버리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서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셋째, 동역자 바나바를 만나는 사울(26-31)
사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다메섹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길로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사귀고자 했지만 사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때 누가 사울을 돕습니까? 바나바입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의 보증이 된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에 대해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한 사람이라고 하며 변호해 주었습니다. 이때에 사울은 바나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눈물 날 정도로 그를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4장 36절에 본래는 요셉이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은혜 받아 유무상통할 때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이름 하여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요셉’이란 뛰어난 사람, 개성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요셉을 볼 때에 남을 배려하는 심성이 있었기 때문에 바나바, 즉 돕는 자, 위로하는 자, 별명을 부쳐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울을 아직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았지만 바나바는 사울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을 품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을 믿고 세워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을 인정해 주고, 섬기고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바클레이는 이런 바나바를 가리켜 최선의 사람, 바나바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개성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바나바와 같이 돕는 자, 위로할 줄 아는 위로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을 쌓도록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서 관계성을 회복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바나바와 같이 위로하고 보듬어주고 인정해 주고 섬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대기 집사는 바로 바나바와 같은 목자입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겨주고 보듬어줍니다. 우리가 이런 바나바와 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바나바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런 만남을 통해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류 문화를 바꾸는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요 변증가요 학자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바뀝니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와의 만남(Ich und Du)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런 만남은 너와의 만남,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그것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불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세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승(멘토), 친구, 남편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두 여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 또한 있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아내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란 시가 있습니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 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다하여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은 이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20세기 위대한 목자 존 스토트 뒤에는 멘토이자 스승인 배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멘토를 가졌습니까? 젊은 청년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좋은 멘토를 만나십시오.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십시오.
사울이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면 핍박이나 환난이 찾아 왔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나타나는 공식입니다. 형제들이 사울을 가이사랴로 해서 고향 다소로 보냈습니다.
31절을 보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이 평안은 내적인 평안입니다. 초대 교회 만큼 외적인 환난과 핍박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였습니다. 든든히 서가는 교회는 외적인 건강한 교회입니다. 내, 외적으로 건강한 교회 강하면 외부의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도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의 첫 전도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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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의 그릇에는 불의와 불순종과 유대교의 교리가 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울을 주님의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부르시어 그의 그릇에 의와 순종과 복음을 담으셨습니다. 이제 사울은 성경을 유대교 중심에서 십자가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핍박자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화끈한 변화를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해 체계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과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의 깊이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 성경을 들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것을 성경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했습니다(갈1:17).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복음을 아는 만큼, 경험하고 체험한 만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광야 훈련을 통한 믿음의 연단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즉시 복음을 전하는 사울(20-22)
사람이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확 바꾼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삶의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더욱 더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환인, 환웅, 단군, 이 삼신을 섬겼습니다. 환인, 환웅, 단군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를 아십니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입니다. 의당 부처를 모신 전을 불전(佛殿)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부처를 모신 전을 불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라고 했습니다. 불전이 대웅전으로 된 사연은 이러합니다.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은 환인, 환웅, 단군 등, 3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3신이 불교 사찰로 대체되면서 인간신 중에서 제일 으뜸으로 여겼던 환웅을 부처로 바꾸어 환웅보다 큰 웅을 모시는 전, 大雄殿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놓고 보니 지금까지 섬겼던 3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대웅전의 위의 오른쪽에 3신각을 만들어 3신을 계속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서 예불을 하고나서 3신각에 가서 삼신에게 또 비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교 신자는 별로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토속적인 신앙, 기복 신앙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들어오자 기독교를 기복 종교로 만들어,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을 여기고 예배당을 대성전으로 부릅니다. 이처럼 삶의 방법은 오랜 동안 습관과 관습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과 무식의식 세계를 지배합니다. 따라서 방법,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토속신앙을 섬기던 데서 기독교로 바꾸는 것도 사실 쉽지 않지만 그것보다 방법, 삶의 형태를 바꾸어 기독교 문화화하고 인격화하고 사회화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혼할 때에 날을 잡고, 이사를 할 때에 좋은 날을 잡는다고 점쟁이를 찾는 다 이런데서 기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을 보세요. 그는 삶의 목적이 확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 신봉자에서 기독교신봉자로 순간에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교를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는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그 즉시로 전했습니다. 그가 복음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완전히 납득을 하고, 체계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 믿고 확신하고 아는 것만큼 전했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 알아야 전도하고, 또 가르치고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아는 만큼’, ‘믿는 만큼’, ‘체험한 만큼’ 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합리적인 이론이나 지식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지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이론이나 지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나름대로 확신에 찬 사람에게 합리적인 이론과 지식으로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I’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사울은 복음에 대해 합리적인 이론이 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체험한 사실을 전했습니다. “나를 다메섹에서 부활과 빛으로 찾아오시고 만나 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아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로고스가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3위의 한분이신 2위이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세계에 사시고 역사적인 존재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동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령하고 영화로우신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신령하고 영화로우신 몸으로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령이나 천사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영화로우신 몸으로 계십니다. 그 영화로우신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시는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나와 같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에 앞서 가시는 대장이십니다.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나를 위대한 그릇으로 쓰십니다. 나를 가꾸시고,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당신의 종으로 쓰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실패했을 때나, 성공했을 때나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좋을 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세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반드시 임재하십니다.
21절을 보면 사울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된 줄로 알고 믿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조롱했습니다. 사울을 비웃었습니다. “아니 저 친구,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잔해하던 사람이 아니야! 저 친구 예수쟁이들을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기 위해 여기 왔던 사람이 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런 조롱과 비웃음은 오히려 사울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전하도록 하게 했습니다(22). 그는 더욱 더 확신 있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믿는 만큼, 내가 체험한 만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할 수 있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 사울의 아라비아 광야생활(23-25).
23절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가 나옵니다. ‘여러 날’은 갈라디아서 1장 16,17의 아라비아 3년 광야 생활기간을 말합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예수님을 만나 변화한 사울은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사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혈육에게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이해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울은 바리새인이요 공회의원으로 잘 나가는 젊은 청년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단으로 낙인찍힌 예수교를 전한다고 할 때 부모님들이 용인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아니했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
사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학자들은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약 3년 동안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하여 영적 훈련 받은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 생활을 한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공적인 사역을 하기 앞서 광야에서 거처한 것과 같습니다(눅1:80). 무엇보다도 주님의 공생애 시작에 40일 동안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되어지기 위해서 아라비아의 3년이란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3년 동안 광야에 가서 묵상하며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한 곳에 가서 구약 성경을 읽고 그 뜻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 때 그는 복음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길게 또는 짧게 연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 기간에 주님과 더 깊은 교제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기간은 더 깊은 영성을 갖추기 위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자꾸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빨리 가야하는데 길이 막힙니다. 다 된 것 같았다가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더 훈련 받아야 하고, 더 준비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 시련의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금방 눈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지는 것 또한 아닙니다.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성령 충만하여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23,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습니다. 사울은 이제 핍박하던 자가 핍박자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나타나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를 하였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고 하던 자가 오히려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울이 변해도 확실하게 변하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면서 무엇 때문에 갈등을 느낍니까? 예수 잘 믿어 보려고 하는데 삶이 꼬일 때가 아닐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된다면 갈등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이전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무엇이 잘 안 돼요? 이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바울을 보세요. 이제 예수님을 믿고 광야에서 3년 동안 훈련을 받고 성령 충만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핍박자들이 나타나 사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눈앞에 어려움이 있다고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요’, ‘공사 중’이라는 점입니다. 사방이 꽉 막히고 4방이 깜깜해지면 하나님이 구원의 창문을 여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5절 보면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11장 32절 이하에 보면 사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때에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그러니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울에게 감정이 있어 핍박하고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메섹 왕의 명령을 받고 방백이 군사를 풀어 사울을 잡으려고 조직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울의 인생은 완전히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니 아니합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사방이 깜깜해지면 캄캄할수록 하늘에 별 빛이 보이듯이 하늘 문 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창문을 활짝 열어 믿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절망의 때에 희망을 가지십시오.
나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명한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글에 보면 감옥 안에서 너무 혹독한 고통으로 죄수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프랭클이 보니 사람들이 고통으로 죽는 것보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절망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한 죄수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창 너머 봐야 희색 담벼락 밖에 더 없지 않소?” 그러자 프랭클이 “아니 그 희색 담벼락 넘어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푸른 하늘을 보십시오. 밤에도 빛나는 저 별들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현실의 어둡고 칙칙하고 차가운 벽만 바라보지 말고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창문을 바라보십시오. 그 구원의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고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젊은이들의 취업문이 난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실업자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수출은 줄고 내수는 얼어붙어 경제가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남북문제가 꽉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 민족은 이보다 더 혹독한 시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련들을 이겼습니다. 지금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기로소니 50, 60년대 보리 고개가 있던 시절보다야 더 하겠습니까? 어려울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구원의 창문을 통해 우리에게 비치는 구원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사방이 캄캄해지면 구원의 창문이 열려짐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31장 4절을 부르겠습니다. ♪영화롭게 시온성문 들어가서 다닐 때 흰옷 입고 황금 길을 다니며 금거문고 맞추어서 새노래를 부를 때 세상 고생 모두 잊어버리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서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셋째, 동역자 바나바를 만나는 사울(26-31)
사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다메섹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길로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사귀고자 했지만 사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때 누가 사울을 돕습니까? 바나바입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의 보증이 된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에 대해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한 사람이라고 하며 변호해 주었습니다. 이때에 사울은 바나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눈물 날 정도로 그를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4장 36절에 본래는 요셉이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은혜 받아 유무상통할 때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이름 하여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요셉’이란 뛰어난 사람, 개성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요셉을 볼 때에 남을 배려하는 심성이 있었기 때문에 바나바, 즉 돕는 자, 위로하는 자, 별명을 부쳐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울을 아직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았지만 바나바는 사울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을 품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을 믿고 세워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을 인정해 주고, 섬기고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바클레이는 이런 바나바를 가리켜 최선의 사람, 바나바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개성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바나바와 같이 돕는 자, 위로할 줄 아는 위로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을 쌓도록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서 관계성을 회복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바나바와 같이 위로하고 보듬어주고 인정해 주고 섬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대기 집사는 바로 바나바와 같은 목자입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겨주고 보듬어줍니다. 우리가 이런 바나바와 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바나바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런 만남을 통해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류 문화를 바꾸는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요 변증가요 학자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바뀝니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와의 만남(Ich und Du)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런 만남은 너와의 만남,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그것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불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세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승(멘토), 친구, 남편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두 여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 또한 있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아내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란 시가 있습니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 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다하여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은 이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20세기 위대한 목자 존 스토트 뒤에는 멘토이자 스승인 배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멘토를 가졌습니까? 젊은 청년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좋은 멘토를 만나십시오.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십시오.
사울이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면 핍박이나 환난이 찾아 왔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나타나는 공식입니다. 형제들이 사울을 가이사랴로 해서 고향 다소로 보냈습니다.
31절을 보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이 평안은 내적인 평안입니다. 초대 교회 만큼 외적인 환난과 핍박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였습니다. 든든히 서가는 교회는 외적인 건강한 교회입니다. 내, 외적으로 건강한 교회 강하면 외부의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도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