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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성탄메시지(2) 누가복음 2:8-14
큰 기쁨의 소식 구주탄생하셨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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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대학의 토마스 홈스 교수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때를 조사했는데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배우자의 죽음을 100으로 할 경우 이혼이 73%, 임신 40%, 집의 이사나 고침이 25%,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12%이었습니다. 이만큼 크리스마스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를 맞은 사람들은 들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하면 굉장히 근사하고 낭만적인 연상을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닙니다. 목자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가장 비루한 집단의 대명사였습니다. 목자는 들에서 양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옷은 늘 땀과 짐승 냄새로 진동하고 한번 멋진 신사복을 입지 못했고 늘 때 묻은 막옷만 걸치고 다녀야 했습니다. 목자는 들에서 짐승들과 생활하다보니 까다로운 율법들을 제대로 준수할 없었습니다. 음식을 가려먹는 일이나 손발을 깨끗하게 씻는 규례를 거의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를 한번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을 만큼 세리나 창기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비록 신분이 낮고 천하고 가난하지만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에 그들은 추운 밤에 깨어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세상에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깨어 메시아를 기다리던 진리의 파수꾼들이었습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이런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부요하며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성탄의 기쁜 소식이 임하지 않습니다. 오늘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한 성탄 메시지를 통해 말구유에 태어나신 구주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1-7절을 보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 황제가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린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두세를 걷고자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군대 징집을 위함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온 백성들에게 어둡고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B.C 700년경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미5:2). 하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이 아니었다면 만삭이 된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갈 리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예언의 말씀은 거짓이 되고, 메시아의 정통성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예언의 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거대한 로마 제국을 움직이셨습니다.
이를 볼 때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는 도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세속사와 구속사가 있습니다. 세속사는 바다 위에 출렁이는 물결이라면, 구속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면면히 흐르는 저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흥하고 망함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중에도 조용히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십니다. 겉으로 보면 세상은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미국 역사는 오바마에 의해 움직여 나나갈 것 같습니다. 아니 세계역사가 그에 의해 움직여나갈 것 같습니다.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좌지우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도구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7,8년간 부시 대통령이 미국과 전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시도 신발짝 세례를 받으며 부스스하게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도 내일도 역사를 친히 섭리하시고 운전하시고 나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절망의 때에도 희망을 갖고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모세에게나 나타날 법한 주님의 영광이 두루 비치고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세상에는 큰 기쁜 좋은 소식보다는 슬픈 소식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날 매스컴을 보세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금년 한 해를 돌아보세요. 기쁜 뉴스보다 슬픈 뉴스가 더 많습니다. 남대문소실을 비롯하여 광우병 사건, 금융위기, 안양초등학교 살해사건, AI 공포, 최진실 자살, 남북문제, 청년 실업자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외국인 대상으로 성매매 기승을 부린다는 보도는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이런 중에도 기쁜 소식이 있기는 습니다. 그것은 문근영씨의 아름다운 기부문화, 북경 올림픽 야구 금메달, 김연아 피겨 스케이트, 이소연씨 우주선 탑승 등은 우리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도 우리를 영원히 기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에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소식들은 상대적입니다. 한 사람이 기쁘면 다른 사람은 슬픕니다. 북경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쿠바에게는 매우 슬픈 소식입니다. 우주선에 탑승한 이소연 씨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탈락한 고산 씨는 슬픈 소식입니다. 이처럼 좋은 소식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배 아픈 소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죄와 죽음 아래 놓여있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기쁨을 찾고자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먹는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물질을 소유하고, 타이틀을 얻는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영화를 관람하고, 스포츠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육신의 쾌락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쾌락은 순간이요, 그 후에는 영원한 파멸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의 범위는 온 백성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종족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또 세상에는 다양한 계층이 있습니다. 이런 계층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노사 간의 대립, 이념 간의 대립,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등입니다. 천사는 이런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미치는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쁨은 모든 사람, 빈부귀천, 남녀노소, 이념과 체제와 피부 색깔을 넘어서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기쁨이 더 충만케 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진정한 만족을 주고 또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벧전1:8). 그래서 천사는 이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소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성육신하셨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4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요1:14,계19:13). 태초에 계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이를 한 가지라도 부정하거나 덜 중요시해도 안 됩니다.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나눠 육은 악하고, 영은 거룩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상이 당시 성행했던 영지주의입니다. 그들은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거부했고,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추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있고, 육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우리 속에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내에서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교회만 나가면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지 않고 이중적입니다. 영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도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하고 다녀서는 안 되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하고 다녀야 합니다. 학생들은 학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직장을 소명의 장으로 여겨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구주, 그리스도 주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 부은 자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주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땅에 죄와 사망이 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1:15). 하나님은 죄 지은 인간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사형선고를 내리셨습니다. 이 세상에 슬픈 소식이 많다고 하지만 영원한 이별, 죽음보다 더 슬픈 소식이 있을까요?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올드미스들과 노총각들은 올해 결혼을 못했지만 내년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죽음, 얼마나 슬픈 소식입니까?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고, 재벌이 되고, CEO가 되고, 판검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50에 죽던지, 천수를 누려 100세에 죽든지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먼저 가고 좀 늦게 가는 것뿐입니다. 소펜하워가 말한 대로 ‘인간은 권태와 고통의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또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험한 세상에서 더 이상 고생할 필요 없이 죽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심판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죽지도 않고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계21:8).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죄와 사망권세가 나를 지배합니다. 사망이 세도를 부려 이 세상을 공동묘지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망은 잔인합니다. 사망은 쏘는 독화살과 같습니다. 사망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립니다. 사망과 죄가 지배하는 내면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안 된다, 못한다는 부정적 생각과 패배감, 부전패, 허무, 좌절, 절망에 시달립니다. 냉소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죄와 죽음은 우리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의욕을 앗아갑니다. 그런데 죄의식과 죄와 죽음의 문제는 그 무엇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순결하게 살고 싶지만 원치 않게 죄의 소욕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원치 않게 추한 삶을 삽니다. 죄의식을 잊고자 명상을 하고, 술을 마시고, 어떤 일에 골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더 악한 죄를 지음으로 죄의식을 잊고자 합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 앞에 어쩔 수 없는(Helpless) 존재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의 소욕과 죄의식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의 문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의 문제를 알 수 있느냐?”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는 세상에서 죽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을 인식시켜 줌으로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알렉산더, 징기스칸 등 세상을 정복한 사람들도 죽음만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생명과학도 죽음만은 해결치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연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6:10).”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엡2:1,5).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빛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골1:13).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갈3:13).
예수님은 마귀의 올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살려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벧전1:3,4).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평강을, 포로 된 자에서 자유를, 죄의식에서 죄 사함을, 연약함에서 강함을, 어두움에서 빛을, 율법에서 은혜의 삶으로, 마귀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은혜와 진리, 사랑과 지혜, 온유와 인내의 근원이십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내 마음 속에 새롭게 탄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은 어제도 아니고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날은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거의 사건이나 또 미래에 있을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2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오늘날입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항상 현재 계속 역사하십니다(사9:6). 항상 현재 속에 계십니다. 따라서 나중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현재, 지금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내일이 아닌 today, 오늘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해야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요5:24).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요, 우리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요, 그리스도 곧 주로 영접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표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어디에 탄생하셨습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니라.” 천사는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단어는 이적과 달리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정신과 그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1:3). 예수님은 영화와 존귀로 옷 입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Somebody가 되기를 바라지 Nobody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들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Nobody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인생들을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겸손과 온유 자체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조용한 말구유 역사입니다. 가이사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하고 군림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는 매스컴을 동원하여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에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무력하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온유와 섬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온유와 희생은 강하고 화려한 가이사의 로마 제국을 제패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구유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입니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헌신, 희생, 섬김, 온유입니다. 반면에 가이사는 교만, 섬김 받고, 명령하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복음 역사를 위해 많이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위해 온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이전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 희생과 섬김의 예수님을 배우며 들레지 않고 조용히 일대일 성경 말씀으로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더 나아가 세계를 복음화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나자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 인간과 인간과의 진정한 화평이 임하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에서 새롭게 탄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큰 기쁨의 소식 구주탄생하셨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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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대학의 토마스 홈스 교수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때를 조사했는데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배우자의 죽음을 100으로 할 경우 이혼이 73%, 임신 40%, 집의 이사나 고침이 25%,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12%이었습니다. 이만큼 크리스마스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를 맞은 사람들은 들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하면 굉장히 근사하고 낭만적인 연상을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닙니다. 목자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가장 비루한 집단의 대명사였습니다. 목자는 들에서 양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옷은 늘 땀과 짐승 냄새로 진동하고 한번 멋진 신사복을 입지 못했고 늘 때 묻은 막옷만 걸치고 다녀야 했습니다. 목자는 들에서 짐승들과 생활하다보니 까다로운 율법들을 제대로 준수할 없었습니다. 음식을 가려먹는 일이나 손발을 깨끗하게 씻는 규례를 거의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를 한번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을 만큼 세리나 창기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비록 신분이 낮고 천하고 가난하지만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에 그들은 추운 밤에 깨어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세상에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깨어 메시아를 기다리던 진리의 파수꾼들이었습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이런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부요하며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성탄의 기쁜 소식이 임하지 않습니다. 오늘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한 성탄 메시지를 통해 말구유에 태어나신 구주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1-7절을 보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 황제가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린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두세를 걷고자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군대 징집을 위함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온 백성들에게 어둡고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B.C 700년경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미5:2). 하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이 아니었다면 만삭이 된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갈 리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예언의 말씀은 거짓이 되고, 메시아의 정통성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예언의 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거대한 로마 제국을 움직이셨습니다.
이를 볼 때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는 도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세속사와 구속사가 있습니다. 세속사는 바다 위에 출렁이는 물결이라면, 구속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면면히 흐르는 저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흥하고 망함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중에도 조용히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십니다. 겉으로 보면 세상은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미국 역사는 오바마에 의해 움직여 나나갈 것 같습니다. 아니 세계역사가 그에 의해 움직여나갈 것 같습니다.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좌지우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도구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7,8년간 부시 대통령이 미국과 전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시도 신발짝 세례를 받으며 부스스하게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도 내일도 역사를 친히 섭리하시고 운전하시고 나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절망의 때에도 희망을 갖고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모세에게나 나타날 법한 주님의 영광이 두루 비치고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세상에는 큰 기쁜 좋은 소식보다는 슬픈 소식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날 매스컴을 보세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금년 한 해를 돌아보세요. 기쁜 뉴스보다 슬픈 뉴스가 더 많습니다. 남대문소실을 비롯하여 광우병 사건, 금융위기, 안양초등학교 살해사건, AI 공포, 최진실 자살, 남북문제, 청년 실업자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외국인 대상으로 성매매 기승을 부린다는 보도는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이런 중에도 기쁜 소식이 있기는 습니다. 그것은 문근영씨의 아름다운 기부문화, 북경 올림픽 야구 금메달, 김연아 피겨 스케이트, 이소연씨 우주선 탑승 등은 우리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도 우리를 영원히 기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에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소식들은 상대적입니다. 한 사람이 기쁘면 다른 사람은 슬픕니다. 북경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쿠바에게는 매우 슬픈 소식입니다. 우주선에 탑승한 이소연 씨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탈락한 고산 씨는 슬픈 소식입니다. 이처럼 좋은 소식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배 아픈 소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죄와 죽음 아래 놓여있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기쁨을 찾고자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먹는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물질을 소유하고, 타이틀을 얻는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영화를 관람하고, 스포츠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육신의 쾌락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쾌락은 순간이요, 그 후에는 영원한 파멸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의 범위는 온 백성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종족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또 세상에는 다양한 계층이 있습니다. 이런 계층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노사 간의 대립, 이념 간의 대립,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등입니다. 천사는 이런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미치는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쁨은 모든 사람, 빈부귀천, 남녀노소, 이념과 체제와 피부 색깔을 넘어서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기쁨이 더 충만케 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진정한 만족을 주고 또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벧전1:8). 그래서 천사는 이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소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성육신하셨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4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요1:14,계19:13). 태초에 계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이를 한 가지라도 부정하거나 덜 중요시해도 안 됩니다.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나눠 육은 악하고, 영은 거룩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상이 당시 성행했던 영지주의입니다. 그들은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거부했고,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추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있고, 육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우리 속에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내에서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교회만 나가면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지 않고 이중적입니다. 영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도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하고 다녀서는 안 되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하고 다녀야 합니다. 학생들은 학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직장을 소명의 장으로 여겨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구주, 그리스도 주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 부은 자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주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땅에 죄와 사망이 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1:15). 하나님은 죄 지은 인간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사형선고를 내리셨습니다. 이 세상에 슬픈 소식이 많다고 하지만 영원한 이별, 죽음보다 더 슬픈 소식이 있을까요?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올드미스들과 노총각들은 올해 결혼을 못했지만 내년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죽음, 얼마나 슬픈 소식입니까?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고, 재벌이 되고, CEO가 되고, 판검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50에 죽던지, 천수를 누려 100세에 죽든지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먼저 가고 좀 늦게 가는 것뿐입니다. 소펜하워가 말한 대로 ‘인간은 권태와 고통의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또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험한 세상에서 더 이상 고생할 필요 없이 죽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심판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죽지도 않고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계21:8).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죄와 사망권세가 나를 지배합니다. 사망이 세도를 부려 이 세상을 공동묘지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망은 잔인합니다. 사망은 쏘는 독화살과 같습니다. 사망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립니다. 사망과 죄가 지배하는 내면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안 된다, 못한다는 부정적 생각과 패배감, 부전패, 허무, 좌절, 절망에 시달립니다. 냉소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죄와 죽음은 우리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의욕을 앗아갑니다. 그런데 죄의식과 죄와 죽음의 문제는 그 무엇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순결하게 살고 싶지만 원치 않게 죄의 소욕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원치 않게 추한 삶을 삽니다. 죄의식을 잊고자 명상을 하고, 술을 마시고, 어떤 일에 골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더 악한 죄를 지음으로 죄의식을 잊고자 합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 앞에 어쩔 수 없는(Helpless) 존재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의 소욕과 죄의식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의 문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의 문제를 알 수 있느냐?”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는 세상에서 죽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을 인식시켜 줌으로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알렉산더, 징기스칸 등 세상을 정복한 사람들도 죽음만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생명과학도 죽음만은 해결치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연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6:10).”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엡2:1,5).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빛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골1:13).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갈3:13).
예수님은 마귀의 올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살려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벧전1:3,4).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평강을, 포로 된 자에서 자유를, 죄의식에서 죄 사함을, 연약함에서 강함을, 어두움에서 빛을, 율법에서 은혜의 삶으로, 마귀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은혜와 진리, 사랑과 지혜, 온유와 인내의 근원이십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내 마음 속에 새롭게 탄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은 어제도 아니고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날은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거의 사건이나 또 미래에 있을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2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오늘날입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항상 현재 계속 역사하십니다(사9:6). 항상 현재 속에 계십니다. 따라서 나중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현재, 지금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내일이 아닌 today, 오늘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해야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요5:24).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요, 우리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요, 그리스도 곧 주로 영접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표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어디에 탄생하셨습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니라.” 천사는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단어는 이적과 달리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정신과 그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1:3). 예수님은 영화와 존귀로 옷 입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Somebody가 되기를 바라지 Nobody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들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Nobody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인생들을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겸손과 온유 자체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조용한 말구유 역사입니다. 가이사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하고 군림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는 매스컴을 동원하여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에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무력하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온유와 섬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온유와 희생은 강하고 화려한 가이사의 로마 제국을 제패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구유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입니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헌신, 희생, 섬김, 온유입니다. 반면에 가이사는 교만, 섬김 받고, 명령하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복음 역사를 위해 많이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위해 온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이전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 희생과 섬김의 예수님을 배우며 들레지 않고 조용히 일대일 성경 말씀으로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더 나아가 세계를 복음화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나자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 인간과 인간과의 진정한 화평이 임하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에서 새롭게 탄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