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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42:1-9(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가 붙드는 종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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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졸업을 해도 취업을 할 수 없다보니 절망의 늪을 헤매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구조조정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또한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비전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이기고 보배로운 자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나를 붙들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본문의 1-4절까지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ho에 대한 말씀, 다시 말해 여호와의 종의 특징이고, 5-9절까지는 메시아가 이 땅에서 하실 일, Work,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 사역을 닮아 부름 받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종 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택하신 종입니다(1).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여기에서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 그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종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사야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곳곳에서 메시아를 고난의 종, 겸손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면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종은 신분이 천한 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이란 단어를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를 종이라고 스스럼없이 소개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자기를 ‘내가 누구다’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함이 당신의 모습입니까? 여러분의 직함은 시간이 지나면 사랍니다. 라틴어 중에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선장군이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승리 퍼레이드를 벌릴 때에 한 노예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직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만이 영원합니다. 다 같이 “나는 여호와의 종이다” 하겠습니다.
종의 특징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종은 불만이 없습니다. 불만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종이라고 표현할 때 천한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인과 종과의 특별한 관계, 친밀한 관계,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붙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떠받혀 준다, 지원해준다(support), 인정하고,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종은 부족해도, 연약해도, 꼭 붙들어 주시고, 지혜롭게 하여 주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이는 마치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가지 비유와 비슷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면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면 장래가 염려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면 시대의 흐름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포도원이 다 황폐하여 겨우 원두막만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사야는 부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습니다. 삶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는 무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사야는 그 시대에 대해 조금도 위축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말씀 선포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1:2).” 하늘과 땅을 향해 선포하는 그의 웅장한 스케일, 그의 웅장한 포부,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결탁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절망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청년실업시대라 원서를 내도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는 연락이 없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달해도 배우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는 일마나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와 늘 함께 하십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작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흥하고 능력 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손을 떠나면 망하고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지금 미국이 어려움에 빠져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위대한 믿음을 버리고 탐욕과 이기심과 안인과 정욕의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때에 재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어떻게 합니까? 메주 많은 머리로 잔머리 굴리지 마십시오. 문제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시편 37편 5절을 읽겠습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중요한 말씀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붙들리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둘째, 여호와의 종은 성령을 부은 받은 종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종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1).” 메시아는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하나님은 종을 노예처럼 부려먹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에게 위대한 사명과 새 일을 맡기시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사61: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행10:38)”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마3:16)” 예수님은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나 지혜로 일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됩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but by my Spirit).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능력과 힘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계선교를 명령하신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세계선교는 오직 성령의 권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셔야 내가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영을 부어주셔야 내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의 힘과 능력, 그리고 내 지식으로 한다면 얼마 못가 바닥이 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여러분에게 부어지면 우리 교회가 민족을 향해,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되고, 여러분은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종들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을 때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 힘없는 자가 힘이 생기고, 소망 없는 자자 소망이 생기고, 꿈꾸지 못하는 자가 꿈을 꾸고, 원망과 불평하는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 보라(Behold)! 세상 어디를 가도 종을 내세우는 주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종을 보라며 내세우고 자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광스런 직책과 비전과 사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보라,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가 붙드셨고, 택하셨고, 기뻐하셨고, 내가 그에게 성령을 부어준 종이다. 그는 이방인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또한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비록 가난하고, 별 볼일 없고,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우리를 향해 “내 아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란 존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존귀한 자,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보라! 당신은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다.” 아멘.
셋째, 여호와의 종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2).
2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요즘은 목소리가 크고 튀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소리를 잘 칩니다.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떠들고,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헐뜯습니다. 그리고 말도 튀고, 글도 튀고, 옷차림도 튀고, 광고도 튑니다. 자기를 뭔가를 보여주기 뻥 튀기를 잘 합니다. 그러다보니 과장하고 가식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은 외치는데 겉으로 외치지 아니하고, 말하는데 목소리를 독점하지 아니하고,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외적이지 않고 내면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요즘은 이런 사람 ‘왕따’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소리 없이 일하고, 소리 없이 순교하는 사람, 과장하지 않는 사람, 가식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여호와의 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금 일을 해놓고 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십니다. 조금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이는 온유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잘 말해 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조용히 일을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 광을 냈지만 주님은 조용히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말없이 조용히 자기를 녹여 세상을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맛을 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리면 가릴수록,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더 더욱더 아름답게 드러나고 빛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사도바울의 위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시어야 합니다. 나의 자아실현이 아니라 예수님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종은 이름이 없습니다. 주인의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주인의 영광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리 없이 쓰임 받는 귀중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본입니다.
넷째, 여호와의 종은 희망의 주가 되십니다(3).
3절을 읽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갈대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라 했으니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상한 갈대는 약간만 쳐도 부러집니다. 상한 갈대는 상처를 많이 받아서 아픔이 많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소망이 없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는 아무 쓸모없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남자는 강한 것 같지만 약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꺼져 가는 심지와 같고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무기력합니다. 유리그릇처럼 만지기만 해도 깨질 것 같습니다. 미풍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의심의 연기, 불평의 연기, 원망의 연기, 미움의 연기, 시기심의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때가 지난, 쓸모없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퇴출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상한 갈대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을 두십니다.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기 없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주십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호호 불어 불씨를 살리십니다.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희망을 주시고 용기를 부어 주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소망 없는 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북돋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찢기고, 죄로 인해 상처받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상한 갈대를 치료하여 튼튼한 갈대가 되게 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성령의 기름, 말씀의 기름, 사랑의 기름을 불어넣어 힘차게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역사를 복음이 최후의 심판에서 승리할 그 날까지 계속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심장을 닮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 여호와의 종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겨 냅니다(4).
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람이 살다 보면 낙담할 때가 많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쉽게 낙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하거나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제자가 배반하고 떠났을 때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낙심을 심습니다. 사람이 낙심하게 되면 기쁨 대신이 슬픔, 평강 대신에 불안, 소망 대신 좌절과 절망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로마서 15장 13절을 읽겠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망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 기쁨과 평강이 또 더 큰 소망을 갖게 됩니다. 더 큰 소망을 가지니까 또 기쁨과 평강이 생깁니다. 더 큰 소망이 생기니 기쁨과 평강이 생기고, 더 큰 소망 더 큰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의 특징은 ‘낙심은 영원히 아듀, 소망은 영원히!’입니다.
몽골사람의 시력이 좋은데 보통 사람의 시력이 2.9이고, 시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7.0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눈의 시력이 좋은 이유는 넓은 초원에서 멀리 바라보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 중에도 먼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영안이 10.0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독수리가 같은 눈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기를 원하십니다. 꿈을 꾸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래에 펼쳐질 푸른 꿈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절망 중에 소망을 품고 시련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십니다(5-9).
5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예수님의 사역을 결정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6절을 보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중보자요 이방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갇힌 자를 놓아 주십니다(7). 하나님은 계획한 것을 다 이루시는 분입니다(8). 하나님은 이 종에게 구원의 새 역사를 맡기시고, 새 일을 그에게 맡기십니다(9). 주님은 구원의 새 역사를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아멘.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택하신 종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성령을 부은 받은 종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여호와의 종은 희망의 주가 되십니다. 여호와의 종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겨 냅니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닮아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가 붙드는 종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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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졸업을 해도 취업을 할 수 없다보니 절망의 늪을 헤매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구조조정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또한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비전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이기고 보배로운 자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나를 붙들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본문의 1-4절까지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ho에 대한 말씀, 다시 말해 여호와의 종의 특징이고, 5-9절까지는 메시아가 이 땅에서 하실 일, Work,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 사역을 닮아 부름 받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종 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택하신 종입니다(1).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여기에서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 그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종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사야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곳곳에서 메시아를 고난의 종, 겸손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면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종은 신분이 천한 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이란 단어를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를 종이라고 스스럼없이 소개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자기를 ‘내가 누구다’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함이 당신의 모습입니까? 여러분의 직함은 시간이 지나면 사랍니다. 라틴어 중에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선장군이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승리 퍼레이드를 벌릴 때에 한 노예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직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만이 영원합니다. 다 같이 “나는 여호와의 종이다” 하겠습니다.
종의 특징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종은 불만이 없습니다. 불만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종이라고 표현할 때 천한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인과 종과의 특별한 관계, 친밀한 관계,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붙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떠받혀 준다, 지원해준다(support), 인정하고,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종은 부족해도, 연약해도, 꼭 붙들어 주시고, 지혜롭게 하여 주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이는 마치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가지 비유와 비슷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면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면 장래가 염려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면 시대의 흐름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포도원이 다 황폐하여 겨우 원두막만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사야는 부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습니다. 삶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는 무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사야는 그 시대에 대해 조금도 위축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말씀 선포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1:2).” 하늘과 땅을 향해 선포하는 그의 웅장한 스케일, 그의 웅장한 포부,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결탁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절망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청년실업시대라 원서를 내도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는 연락이 없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달해도 배우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는 일마나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와 늘 함께 하십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작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흥하고 능력 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손을 떠나면 망하고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지금 미국이 어려움에 빠져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위대한 믿음을 버리고 탐욕과 이기심과 안인과 정욕의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때에 재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어떻게 합니까? 메주 많은 머리로 잔머리 굴리지 마십시오. 문제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시편 37편 5절을 읽겠습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중요한 말씀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붙들리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둘째, 여호와의 종은 성령을 부은 받은 종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종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1).” 메시아는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하나님은 종을 노예처럼 부려먹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에게 위대한 사명과 새 일을 맡기시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사61: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행10:38)”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마3:16)” 예수님은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나 지혜로 일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됩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but by my Spirit).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능력과 힘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계선교를 명령하신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세계선교는 오직 성령의 권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셔야 내가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영을 부어주셔야 내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의 힘과 능력, 그리고 내 지식으로 한다면 얼마 못가 바닥이 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여러분에게 부어지면 우리 교회가 민족을 향해,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되고, 여러분은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종들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을 때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 힘없는 자가 힘이 생기고, 소망 없는 자자 소망이 생기고, 꿈꾸지 못하는 자가 꿈을 꾸고, 원망과 불평하는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 보라(Behold)! 세상 어디를 가도 종을 내세우는 주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종을 보라며 내세우고 자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광스런 직책과 비전과 사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보라,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가 붙드셨고, 택하셨고, 기뻐하셨고, 내가 그에게 성령을 부어준 종이다. 그는 이방인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또한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비록 가난하고, 별 볼일 없고,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우리를 향해 “내 아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란 존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존귀한 자,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보라! 당신은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다.” 아멘.
셋째, 여호와의 종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2).
2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요즘은 목소리가 크고 튀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소리를 잘 칩니다.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떠들고,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헐뜯습니다. 그리고 말도 튀고, 글도 튀고, 옷차림도 튀고, 광고도 튑니다. 자기를 뭔가를 보여주기 뻥 튀기를 잘 합니다. 그러다보니 과장하고 가식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은 외치는데 겉으로 외치지 아니하고, 말하는데 목소리를 독점하지 아니하고,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외적이지 않고 내면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요즘은 이런 사람 ‘왕따’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소리 없이 일하고, 소리 없이 순교하는 사람, 과장하지 않는 사람, 가식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여호와의 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금 일을 해놓고 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십니다. 조금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이는 온유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잘 말해 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조용히 일을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 광을 냈지만 주님은 조용히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말없이 조용히 자기를 녹여 세상을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맛을 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리면 가릴수록,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더 더욱더 아름답게 드러나고 빛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사도바울의 위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시어야 합니다. 나의 자아실현이 아니라 예수님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종은 이름이 없습니다. 주인의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주인의 영광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리 없이 쓰임 받는 귀중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본입니다.
넷째, 여호와의 종은 희망의 주가 되십니다(3).
3절을 읽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갈대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라 했으니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상한 갈대는 약간만 쳐도 부러집니다. 상한 갈대는 상처를 많이 받아서 아픔이 많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소망이 없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는 아무 쓸모없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남자는 강한 것 같지만 약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꺼져 가는 심지와 같고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무기력합니다. 유리그릇처럼 만지기만 해도 깨질 것 같습니다. 미풍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의심의 연기, 불평의 연기, 원망의 연기, 미움의 연기, 시기심의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때가 지난, 쓸모없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퇴출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상한 갈대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을 두십니다.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기 없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주십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호호 불어 불씨를 살리십니다.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희망을 주시고 용기를 부어 주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소망 없는 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북돋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찢기고, 죄로 인해 상처받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상한 갈대를 치료하여 튼튼한 갈대가 되게 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성령의 기름, 말씀의 기름, 사랑의 기름을 불어넣어 힘차게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역사를 복음이 최후의 심판에서 승리할 그 날까지 계속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심장을 닮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 여호와의 종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겨 냅니다(4).
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람이 살다 보면 낙담할 때가 많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쉽게 낙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하거나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제자가 배반하고 떠났을 때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낙심을 심습니다. 사람이 낙심하게 되면 기쁨 대신이 슬픔, 평강 대신에 불안, 소망 대신 좌절과 절망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로마서 15장 13절을 읽겠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망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 기쁨과 평강이 또 더 큰 소망을 갖게 됩니다. 더 큰 소망을 가지니까 또 기쁨과 평강이 생깁니다. 더 큰 소망이 생기니 기쁨과 평강이 생기고, 더 큰 소망 더 큰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의 특징은 ‘낙심은 영원히 아듀, 소망은 영원히!’입니다.
몽골사람의 시력이 좋은데 보통 사람의 시력이 2.9이고, 시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7.0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눈의 시력이 좋은 이유는 넓은 초원에서 멀리 바라보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 중에도 먼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영안이 10.0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독수리가 같은 눈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기를 원하십니다. 꿈을 꾸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래에 펼쳐질 푸른 꿈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절망 중에 소망을 품고 시련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십니다(5-9).
5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예수님의 사역을 결정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6절을 보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중보자요 이방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갇힌 자를 놓아 주십니다(7). 하나님은 계획한 것을 다 이루시는 분입니다(8). 하나님은 이 종에게 구원의 새 역사를 맡기시고, 새 일을 그에게 맡기십니다(9). 주님은 구원의 새 역사를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아멘.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택하신 종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성령을 부은 받은 종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여호와의 종은 희망의 주가 되십니다. 여호와의 종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겨 냅니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닮아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