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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4 강(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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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이 왜 잡히게 되었습니까? (막6:17,18) 이 사건이 그 시대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14)?
2. 예수님이 전파하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15)?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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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헌팅턴은 그가 쓴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라는 책에서,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에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했지?”라는 것입니다. 전자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지? 여기에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질문이 따르게 되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게 되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음모론과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퇴보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전자의 질문을 했기 때문에 경제 강국이 되었고, 라틴 아메리카는 후자의 질문으로 낙후되었다는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해방신학을 기초로 그들의 빈곤과 가난을 모두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칼 마르크스 이론을 기초로 한 신학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회의 구조 악에 있다고 보며, 이 구조악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급격한 변화, 피를 흘리는 혁명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문제는 구조나 제도에도 문제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인간의 내면, 죄성에 있습니다. 1776년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이래 230년간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자본주의가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인 탐욕을 불러 일으켜 지금 세계가 경제난국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탐욕을 회개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좋은 제도, 좋은 사상, 좋은 이상으로도 이 땅에 낙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낙원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1867년에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도 종언을 고한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을 흠 없이 지킬 만큼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탐심이 해결되지 않아 그는 장탄식을 했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 자기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만만하였지만 하나님과 이웃보다 물질을 더 사랑한 나머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롬3:10). 그리고 로마서 3장 9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죄는 우리가 흔히 짓는 잘못된 것들을 말하는 sins가 아니라 단수인 죄(Sin)로 움직이는 힘을 말합니다. 죄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권세가 있는 실체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은 죄 아래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죄가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이처럼 죄는 힘이 있기 때문에 죄에 한번 붙들리게 되면 죄의 세력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한 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에 손을 댔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도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의 세력, 도박의 힘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박에 빠져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가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고 이제는 도박을 절대로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비장한 각오로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다 잘랐습니다. 그로서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심도 한 순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도박판에 가서 발가락으로 도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이요, 죄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대변해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정욕의 죄의 덫에 걸리게 되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정과 자녀를 다 팽개치고 정욕을 쫓아 살게 됩니다. 탐심의 죄에 빠지게 되면 탐심에 이끌려 돈돈 하다가 돌아버립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20세기 초 성자로 추앙받던 존 헨리 조웨트 목사님은 “죄는 파괴적인 존재다”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몸과 인격과 마음과 양심, 그리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인간관계, 사회생활, 우리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못쓰게 합니다. 죄는 시각을 손상시켜 분별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죄는 청각을 마비시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촉각을 마비시켜 느낌만을 갖도록 하여 막장 드라마인 아내의 유혹을 즐겨 보도록 합니다. 죄는 밝고 은혜로운 얼굴을 일그러지고 흉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이끌어 밤 문화를 즐기도록 하고, 어두운 음악과 어두운 생각, 어두운 삶을 살게 합니다. 죄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앗아갑니다. 죄는 하나님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찬양을 멀리 하게 합니다. 죄는 행복을 앗아가고, 웃음을 앗아가고, 기쁨과 소망을 앗아가고, 살맛을 앗아갑니다.
사람이 처음 죄를 지으면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가 계속 죄를 짓게 되면 죄의식도 사라집니다. 특히 죄가 문화를 형성하게 되면 죄를 오히려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죄의 힘을 이기려면 죄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어야 합니다. 죄보다 더 힘 센 힘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바로 복음,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을 믿어 죄의 세력을 이기고 행복한 삶,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14).
14절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사역은 요한이 잡힌 후에 시작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힌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세례 요한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오신다며 사역의 일선에서 퇴장할 것을 암시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30).” 그래서 요한이 퇴장한 직후에 활동을 시작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고, 광야에서 40일간이나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히 일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이 퇴장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것은 정말 무고한 잡힘입니다. 우리도 명백히 내가 아닌 잘못된 외부의 행동에 의해 억울함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여론을 조성하고 탄원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체 구속 역사 속에서 요한의 구금 문제를 보셨습니다. 요한의 구금은 전체 역사 속에서 부분에 속한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길 닦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사역을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사람이 전체를 보지 못하면 작은 부분에 매몰됩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슈를 보면 부분의 문제를 놓고 보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전체 속에서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선포된 곳은 요단강가가 아닌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선지자들의 활동무대였던 요단강이 아닌 갈릴리에서 시작하지 않으신 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퇴장을 기다리셨다면, 요한의 후광을 충분히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요단강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 의 변방입니다. 많은 이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받아 순수한 혈통을 인정받지 못하던 소외된 지역입니다. 이사야서 9장을 보면 갈릴리를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외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 신음하고 고통을 받던 지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웅크린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소망을 품기 어려운 무시 받던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고, 스스로도 당연히 그렇게 여기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암울하고 고통을 받는 그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아멘.
둘째,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왕의 비행을 책망하다가 참수 당했습니다(막6:17-29). 이제 이스라엘은 희망의 빛이 꺼지고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예언하시고 준비하신 구속 역사가 임했다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란 헬라어 바실레이아, 영토가 아니라 통치를 뜻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지금까지 세상은 마귀가 통치했습니다. 과거 사단의 우리를 통치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 땅에는 살인, 폭력, 행음, 시기, 미움, 질투, 간음, 분쟁, 거짓, 술수, 강포 등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늘 불안하고 쉼이 없었습니다. 요구하는 마음과 정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운명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남편을 돕는 배필이 아니라 바라는 배필로 생각하여 가정이 시끄러웠습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어두운 자화상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세상에 성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 왕의 왕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 전혀 다르십니다. 세상 왕은 무력으로 다스립니다. 세상 왕들은 백마 타고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루한 옷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평화가 임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겸손과 공의의 왕이십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겸손과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 공의 왕, 겸손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에 어두운 자화상에서 밝은 자화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혼돈과 방황과 어두움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역동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15b절을 보겠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 ‘생각을 다르게 하라’, ‘생각을 고쳐라’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란 방향, 삶의 목적, 가치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회개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해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서 방향을 바꾸는 것, 결정된 마음과 뜻을 돌이켜 U-turn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삶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회개와 후회는 다릅니다. 회개는 행동이 수반됩니다. 회개했으면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삶의 변화가 없이 콧물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끝나면 이는 후회요 감상에 불과합니다. 회개는 죄를 후회하고 애통이 뒤따를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일대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요, 성경 속에 있는 큰 흐름입니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첫 전도를 할 때에도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행20:21). 교회의 부흥이나 영적 각성 운동의 시발점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1907년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100만 명 구령운동도 뜨거운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남자만 연일 1500명에서 2000명이 모였으며 여자들은 별도 밖의 마당에 자리를 만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첫 날 길선주 목사님이 ‘맛을 잃어버린 말라빠진 사람들아’ 외쳤을 때 여기저기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회개의 장면을 한 선교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살인, 강도,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불결한 죄와 음란, 도둑, 거짓, 질투를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런 고백이 나올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회개의 역사였다. 공중 앞에서 털어 놓은 저런 죄의 고백은 사경회의 파장과 함께 흘러넘쳐 가득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침체 위기의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저로부터 모든 성도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를 깨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기의 삶의 스타일을 바꿔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침체의 위기의 국면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죄입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은 전혀 믿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물은 0도나 99도나 물입니다. 아무리 데워도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에 불과합니다. 100도가 되어야 끓고 끓어야 액체인 물에서 기체로 변하게 됩니다. 온전히 100% 믿을 때에 중생의 체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겨자씨만 믿음이라도 온전한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99%의 믿음에서 1%를 올려 100%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99%의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99%의 믿음, 1%를 믿지 못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돌아오다가 남의 담에 달려 있는 호박을 따가지고 온다는 말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누구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귀신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위기는 바로 알고도 행치 않는 데서 옵니다.
지금은 회개할 좋은 기회입니다. 하인리 법칙이 있는데 이 법칙은 한 사건이 생기기까지는 1:29:300, 즉 한 번의 사건이 생기기까지는 29번의 경미한 사고, 그 주변에 300번의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닥치는 위기는 하나님께서 여러 번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제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리가 내면에 탐욕을 회개하고,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을 회개하고, 우리 속에 있는 거짓을 회개하고,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없고 늘 부족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이야 말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 good chance입니다.
넷째, 이제 회개했으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 것입니다(롬1:21a).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으십니다(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살아남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지독하여 금과 은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생명,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일시적으로 정결케 할 뿐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1-15). 예수님의 피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 할지라도 이 예수님의 피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롬3:25).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여서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하여 주시며 소생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공급하여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내 심장에서 박동 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피가 살아 숨 쉴 때 세상의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병든 마음과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의 광선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부흥의 역사,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피는 강한 죄의 사슬을 끊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믿음은 동시적입니다(행20:21).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는 회개하면 구원이요, 회개치 않으면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가 동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용서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고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 봄바람에 눈 녹듯이 모든 죄가 사하여집니다. 더럽고 추한 죄가 정결케 됩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됩니다.
찬송가 199장을 부르겠습니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아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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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이 왜 잡히게 되었습니까? (막6:17,18) 이 사건이 그 시대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14)?
2. 예수님이 전파하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15)?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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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헌팅턴은 그가 쓴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라는 책에서,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에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했지?”라는 것입니다. 전자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지? 여기에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질문이 따르게 되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게 되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음모론과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퇴보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전자의 질문을 했기 때문에 경제 강국이 되었고, 라틴 아메리카는 후자의 질문으로 낙후되었다는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해방신학을 기초로 그들의 빈곤과 가난을 모두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칼 마르크스 이론을 기초로 한 신학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회의 구조 악에 있다고 보며, 이 구조악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급격한 변화, 피를 흘리는 혁명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문제는 구조나 제도에도 문제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인간의 내면, 죄성에 있습니다. 1776년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이래 230년간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자본주의가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인 탐욕을 불러 일으켜 지금 세계가 경제난국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탐욕을 회개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좋은 제도, 좋은 사상, 좋은 이상으로도 이 땅에 낙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낙원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1867년에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도 종언을 고한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을 흠 없이 지킬 만큼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탐심이 해결되지 않아 그는 장탄식을 했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 자기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만만하였지만 하나님과 이웃보다 물질을 더 사랑한 나머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롬3:10). 그리고 로마서 3장 9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죄는 우리가 흔히 짓는 잘못된 것들을 말하는 sins가 아니라 단수인 죄(Sin)로 움직이는 힘을 말합니다. 죄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권세가 있는 실체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은 죄 아래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죄가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이처럼 죄는 힘이 있기 때문에 죄에 한번 붙들리게 되면 죄의 세력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한 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에 손을 댔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도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의 세력, 도박의 힘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박에 빠져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가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고 이제는 도박을 절대로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비장한 각오로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다 잘랐습니다. 그로서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심도 한 순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도박판에 가서 발가락으로 도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이요, 죄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대변해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정욕의 죄의 덫에 걸리게 되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정과 자녀를 다 팽개치고 정욕을 쫓아 살게 됩니다. 탐심의 죄에 빠지게 되면 탐심에 이끌려 돈돈 하다가 돌아버립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20세기 초 성자로 추앙받던 존 헨리 조웨트 목사님은 “죄는 파괴적인 존재다”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몸과 인격과 마음과 양심, 그리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인간관계, 사회생활, 우리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못쓰게 합니다. 죄는 시각을 손상시켜 분별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죄는 청각을 마비시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촉각을 마비시켜 느낌만을 갖도록 하여 막장 드라마인 아내의 유혹을 즐겨 보도록 합니다. 죄는 밝고 은혜로운 얼굴을 일그러지고 흉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이끌어 밤 문화를 즐기도록 하고, 어두운 음악과 어두운 생각, 어두운 삶을 살게 합니다. 죄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앗아갑니다. 죄는 하나님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찬양을 멀리 하게 합니다. 죄는 행복을 앗아가고, 웃음을 앗아가고, 기쁨과 소망을 앗아가고, 살맛을 앗아갑니다.
사람이 처음 죄를 지으면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가 계속 죄를 짓게 되면 죄의식도 사라집니다. 특히 죄가 문화를 형성하게 되면 죄를 오히려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죄의 힘을 이기려면 죄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어야 합니다. 죄보다 더 힘 센 힘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바로 복음,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을 믿어 죄의 세력을 이기고 행복한 삶,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14).
14절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사역은 요한이 잡힌 후에 시작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힌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세례 요한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오신다며 사역의 일선에서 퇴장할 것을 암시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30).” 그래서 요한이 퇴장한 직후에 활동을 시작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고, 광야에서 40일간이나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히 일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이 퇴장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것은 정말 무고한 잡힘입니다. 우리도 명백히 내가 아닌 잘못된 외부의 행동에 의해 억울함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여론을 조성하고 탄원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체 구속 역사 속에서 요한의 구금 문제를 보셨습니다. 요한의 구금은 전체 역사 속에서 부분에 속한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길 닦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사역을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사람이 전체를 보지 못하면 작은 부분에 매몰됩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슈를 보면 부분의 문제를 놓고 보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전체 속에서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선포된 곳은 요단강가가 아닌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선지자들의 활동무대였던 요단강이 아닌 갈릴리에서 시작하지 않으신 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퇴장을 기다리셨다면, 요한의 후광을 충분히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요단강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 의 변방입니다. 많은 이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받아 순수한 혈통을 인정받지 못하던 소외된 지역입니다. 이사야서 9장을 보면 갈릴리를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외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 신음하고 고통을 받던 지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웅크린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소망을 품기 어려운 무시 받던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고, 스스로도 당연히 그렇게 여기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암울하고 고통을 받는 그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아멘.
둘째,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왕의 비행을 책망하다가 참수 당했습니다(막6:17-29). 이제 이스라엘은 희망의 빛이 꺼지고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예언하시고 준비하신 구속 역사가 임했다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란 헬라어 바실레이아, 영토가 아니라 통치를 뜻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지금까지 세상은 마귀가 통치했습니다. 과거 사단의 우리를 통치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 땅에는 살인, 폭력, 행음, 시기, 미움, 질투, 간음, 분쟁, 거짓, 술수, 강포 등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늘 불안하고 쉼이 없었습니다. 요구하는 마음과 정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운명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남편을 돕는 배필이 아니라 바라는 배필로 생각하여 가정이 시끄러웠습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어두운 자화상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세상에 성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 왕의 왕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 전혀 다르십니다. 세상 왕은 무력으로 다스립니다. 세상 왕들은 백마 타고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루한 옷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평화가 임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겸손과 공의의 왕이십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겸손과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 공의 왕, 겸손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에 어두운 자화상에서 밝은 자화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혼돈과 방황과 어두움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역동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15b절을 보겠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 ‘생각을 다르게 하라’, ‘생각을 고쳐라’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란 방향, 삶의 목적, 가치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회개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해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서 방향을 바꾸는 것, 결정된 마음과 뜻을 돌이켜 U-turn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삶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회개와 후회는 다릅니다. 회개는 행동이 수반됩니다. 회개했으면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삶의 변화가 없이 콧물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끝나면 이는 후회요 감상에 불과합니다. 회개는 죄를 후회하고 애통이 뒤따를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일대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요, 성경 속에 있는 큰 흐름입니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첫 전도를 할 때에도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행20:21). 교회의 부흥이나 영적 각성 운동의 시발점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1907년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100만 명 구령운동도 뜨거운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남자만 연일 1500명에서 2000명이 모였으며 여자들은 별도 밖의 마당에 자리를 만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첫 날 길선주 목사님이 ‘맛을 잃어버린 말라빠진 사람들아’ 외쳤을 때 여기저기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회개의 장면을 한 선교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살인, 강도,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불결한 죄와 음란, 도둑, 거짓, 질투를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런 고백이 나올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회개의 역사였다. 공중 앞에서 털어 놓은 저런 죄의 고백은 사경회의 파장과 함께 흘러넘쳐 가득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침체 위기의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저로부터 모든 성도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를 깨는 아픔이 따릅니다. 자기의 삶의 스타일을 바꿔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침체의 위기의 국면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죄입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은 전혀 믿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물은 0도나 99도나 물입니다. 아무리 데워도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에 불과합니다. 100도가 되어야 끓고 끓어야 액체인 물에서 기체로 변하게 됩니다. 온전히 100% 믿을 때에 중생의 체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겨자씨만 믿음이라도 온전한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99%의 믿음에서 1%를 올려 100%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99%의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99%의 믿음, 1%를 믿지 못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돌아오다가 남의 담에 달려 있는 호박을 따가지고 온다는 말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누구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귀신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위기는 바로 알고도 행치 않는 데서 옵니다.
지금은 회개할 좋은 기회입니다. 하인리 법칙이 있는데 이 법칙은 한 사건이 생기기까지는 1:29:300, 즉 한 번의 사건이 생기기까지는 29번의 경미한 사고, 그 주변에 300번의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닥치는 위기는 하나님께서 여러 번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제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리가 내면에 탐욕을 회개하고,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을 회개하고, 우리 속에 있는 거짓을 회개하고,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없고 늘 부족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이야 말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 good chance입니다.
넷째, 이제 회개했으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 것입니다(롬1:21a).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으십니다(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살아남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지독하여 금과 은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생명,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일시적으로 정결케 할 뿐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1-15). 예수님의 피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 할지라도 이 예수님의 피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롬3:25).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여서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하여 주시며 소생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공급하여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내 심장에서 박동 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피가 살아 숨 쉴 때 세상의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병든 마음과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의 광선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부흥의 역사,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피는 강한 죄의 사슬을 끊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믿음은 동시적입니다(행20:21).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는 회개하면 구원이요, 회개치 않으면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가 동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용서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고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 봄바람에 눈 녹듯이 모든 죄가 사하여집니다. 더럽고 추한 죄가 정결케 됩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됩니다.
찬송가 199장을 부르겠습니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