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마가복음 제 5 강 (1:16-20, 요절, 1:17)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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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정에서 나서 사회라는 환경에서 자랍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맹자는 진심편에서 군자의 3낙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父母具存 兄弟無故, 즉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탈 없이 우애롭게 지내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재물 때문에 형제들끼리 서로 싸우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 글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나가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넘어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셋째는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군자의 낙중에 들어갈까요? 철 밥통이니까 그럴까요? 교직이 3락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은 저는 이렇게 봅니다. 첫째는 제자를 기름으로써 그 이름을 계속 남길 수 있는 불사조(phoenix)의 직업이라는 점, 둘째는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항상 순수하고 젊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만년 청춘의 직업이라는 점, 셋째는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사랑과 지식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섬김의 직업이라는 점, 넷섯째는 제자의 성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청출어람을 즐길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첫 사역으로 고기를 낚는 어부를 불러 인류의 스승으로 키우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해변으로 나가 그물을 손질하고 배를 띄워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현장은 이겨야 산다는 필승의 원리, 가져야 산다는 힘의 원리, 법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잔꾀의 원리, 죽여야 산다는 상극의 원리,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성공의 원리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과연 행복이 있을까요? 정글의 법칙, 일등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숨 쉬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어부들을 불러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을 돕고 섬기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셨습니다(16,17a).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맑고 깨끗하여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의 생업은 주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이 호수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다가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문이나 매스컴에 제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고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만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시며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보셨다’는 주목하고 깊이 관찰하셨다는 뜻입니다.
고기를 잡는 그들의 겉모습은 멋이 있어 보입니다. 햇볕에 선팅으로 그을린 구릿빛 나는 얼굴, 딱 벌어진 어깨, 야성미 넘치는 그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멋져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빈둥빈둥 놀며 로또 복권이나 사서 벼락부자가 되고 벼락출세하고자 사는 그런 청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정직하게 사는 정직의 원리, 활동의 원리를 가지고 사는 건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바다에서 삶의 기쁨과 희망이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물을 던지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 깊은 좌절과 깊은 절망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람쥐 체 바퀴 돌리듯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권태감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7).” 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시몬과 안드레의 삶의 방향은 ‘자기’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란 직장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의 생의 목적은 오직 자기였습니다. 자기 부모, 자기 아내와 자식,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살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자기를 위해 움켜쥐는 데 있지 않습니다. 괴테는 ‘행복이란 타인을 행복하게 하여 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을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연애 기간은 행복한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릭 프롬은 ‘행복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데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행복이란 ‘섬김, 봉사, 자기희생’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살맛과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살맛과 보람은 자기를 위한 삶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살맛과 보람은 가치와 의미에서 옵니다.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가격으로 판단합니다. 싸다, 비싸다, 많다, 적다. 크다, 작다 등 모든 것을 수치로, 수량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 수량 속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를 찾을 때 살맛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살맛과 보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원치 않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여유와 쉼이 없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하는 필승의 원리, 성공의 원리, 상극의 원리가 몸에 밴 그들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서로 뜯고 찢기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곳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삶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하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수량으로 판단하는 가치관에서 의미와 가치 있는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격으로 환산하는 가치관에서 의미를 찾는 가치관으로 바꿀 때 진정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 지수가 올라갑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삶으로 바꿀 때 데 행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서 ‘따르라’는 뜻은 가까이에서 좇으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를 볼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잠깐 와서 은혜나 받고 가는, 병 고침과 인생 문제를 해결 받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우되 아주 가까이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우되 일부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 인격, 예수님의 전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만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희생, 헌신을 배울 때에 부활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좋아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몇 십 년 해도 그 내면이 성장하지 않아 천박합니다. 신앙이 유아틱, childish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을 배우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에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고,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행복은 헌신과 희생에서 옵니다. 부모님의 행복은 자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자녀들을 사랑하는데서 옵니다. 행복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예수님의 전인격과 생애를 배워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옛 생활의 청산이자 새로운 생활로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떠나서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과거가 있습니다.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좋지 않은 과거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는 이런 성공과 실패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믿지 않았을 때에 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과거의 영광과 과거에 실수했던 것, 억울하고 섭섭했던 것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과거든, 싫은 과거를 버려야 합니다. 특히 실패의 경험을 잊어야 합니다. 허물과 실수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십시오. 사랑이란 실수와 허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용서의 복음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둘베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과거의 실패와 모든 죄책감을 십자가 밑에 다 묻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둘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17b).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소망을 두고 부르셨습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의 대상은 고기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목적은 죽이는데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목적은 살리는데 있습니다. 고기 낚는 어부의 삶의 장소와 스케일은 좁고 한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 어부의 장소와 스케일은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적입니다. 그리고 고기 낚는 어부는 그 가치관이 수량, 가격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오늘 몇 마리 잡았는데 얼마 벌었다. 그러나 낚는 어부의 가치관은 의미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일 년을 즐겁게 하려면 화초를 가꾸고 10년을 즐겁게 하려면 나무를 심고 30년을 즐겁게 보내려면 사람을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돕고 키우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를 잘못합니다. 이는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 부족과 또 사람보다 낚는 데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초점은 사람을 살리는데 두어야 합니다. 사람을 돕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상품만 팔아서는 세일즈 마스터가 될 수 없다. 진심을 담아 그들의 미래를 담아 그들의 미래를 아름다운 그림처럼 설계해줘야 한다.” 코닥의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먼이 세일즈 직원들에게 물었습니다. 코닥이 파는 상품이 무엇입니까? 카메라? 필름? 사진기? “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파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돕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숫자를 늘리려고 전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쌍 눈에 쌍불을 켜고 고기를 잡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반복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이를 계속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권태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직장을 옮겨 봅니다. 건수를 만들어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러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면 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대개 직장 생활 5년이 지나면 권태감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밥 몇 술 뜨고 신발 끈을 졸라매고 직장으로 출근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라고 늘 지겹고 피곤한 것만은 아닙니다. 보너스를 타서 자기 아내와 자식들에게 선물을 사들고 집에 갈 때 기분이 좋습니다. 적금통장을 만들어 조금씩 모아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모은 적금을 타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가용을 장만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첨단 가전제품을 사놓고 문화생활을 즐기며 사는 재미도 있습니다. 고기를 낚는 삶에도 나름대로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근본적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룩한 사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없는 삶은 잘 먹고, 잘 산다 할지라도 행복이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할지라도 그 행복은 상대적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보지만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열매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기 낚는 어부는 의미가 없고 소망도 없다며 놀아야 합니까?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이 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두고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따르기만 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로 키워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소원을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키워 주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썩어 없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벧후1:4).
셋째,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18,20).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8,20).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손익을 계산하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위해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3:7,8).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압도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셋째로 부르심은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의 부름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 아들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이요,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대통령은 쓸모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쓸모없다 싶으면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돌보아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어리석은 자를 지혜로운 자로, 천한 자를 귀한 자로, 평범한 사람을 위대한 자로, 쓸모없는 자들을 쓸모 있는 자로 키우십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부르심 그 자체가 은총이다’고 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약소민족의 백성으로 태어나 일생동안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낚다가 물거품처럼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사라질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그들은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그들을 부르셔서 쓸모 있는 사람들로 키우신 위대한 조각가, 조련사, 위대한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가 단 한 번 밖에 없는 이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살맛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을 배우십시오. 이 때 위대한 예술가요, 조각가요, 조련사가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대한 예술품으로 빚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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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정에서 나서 사회라는 환경에서 자랍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맹자는 진심편에서 군자의 3낙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父母具存 兄弟無故, 즉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탈 없이 우애롭게 지내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재물 때문에 형제들끼리 서로 싸우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 글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나가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넘어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셋째는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군자의 낙중에 들어갈까요? 철 밥통이니까 그럴까요? 교직이 3락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은 저는 이렇게 봅니다. 첫째는 제자를 기름으로써 그 이름을 계속 남길 수 있는 불사조(phoenix)의 직업이라는 점, 둘째는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항상 순수하고 젊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만년 청춘의 직업이라는 점, 셋째는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사랑과 지식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섬김의 직업이라는 점, 넷섯째는 제자의 성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청출어람을 즐길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첫 사역으로 고기를 낚는 어부를 불러 인류의 스승으로 키우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해변으로 나가 그물을 손질하고 배를 띄워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현장은 이겨야 산다는 필승의 원리, 가져야 산다는 힘의 원리, 법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잔꾀의 원리, 죽여야 산다는 상극의 원리,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성공의 원리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과연 행복이 있을까요? 정글의 법칙, 일등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숨 쉬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어부들을 불러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을 돕고 섬기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셨습니다(16,17a).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맑고 깨끗하여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의 생업은 주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이 호수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다가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문이나 매스컴에 제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고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만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시며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보셨다’는 주목하고 깊이 관찰하셨다는 뜻입니다.
고기를 잡는 그들의 겉모습은 멋이 있어 보입니다. 햇볕에 선팅으로 그을린 구릿빛 나는 얼굴, 딱 벌어진 어깨, 야성미 넘치는 그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멋져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빈둥빈둥 놀며 로또 복권이나 사서 벼락부자가 되고 벼락출세하고자 사는 그런 청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정직하게 사는 정직의 원리, 활동의 원리를 가지고 사는 건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바다에서 삶의 기쁨과 희망이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물을 던지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 깊은 좌절과 깊은 절망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람쥐 체 바퀴 돌리듯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권태감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7).” 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시몬과 안드레의 삶의 방향은 ‘자기’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란 직장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의 생의 목적은 오직 자기였습니다. 자기 부모, 자기 아내와 자식,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살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자기를 위해 움켜쥐는 데 있지 않습니다. 괴테는 ‘행복이란 타인을 행복하게 하여 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을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연애 기간은 행복한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릭 프롬은 ‘행복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데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행복이란 ‘섬김, 봉사, 자기희생’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살맛과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살맛과 보람은 자기를 위한 삶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살맛과 보람은 가치와 의미에서 옵니다.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가격으로 판단합니다. 싸다, 비싸다, 많다, 적다. 크다, 작다 등 모든 것을 수치로, 수량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 수량 속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를 찾을 때 살맛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살맛과 보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원치 않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여유와 쉼이 없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하는 필승의 원리, 성공의 원리, 상극의 원리가 몸에 밴 그들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서로 뜯고 찢기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곳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삶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하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수량으로 판단하는 가치관에서 의미와 가치 있는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격으로 환산하는 가치관에서 의미를 찾는 가치관으로 바꿀 때 진정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 지수가 올라갑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삶으로 바꿀 때 데 행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서 ‘따르라’는 뜻은 가까이에서 좇으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를 볼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잠깐 와서 은혜나 받고 가는, 병 고침과 인생 문제를 해결 받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우되 아주 가까이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우되 일부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 인격, 예수님의 전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만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희생, 헌신을 배울 때에 부활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좋아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몇 십 년 해도 그 내면이 성장하지 않아 천박합니다. 신앙이 유아틱, childish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을 배우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에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고,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행복은 헌신과 희생에서 옵니다. 부모님의 행복은 자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자녀들을 사랑하는데서 옵니다. 행복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예수님의 전인격과 생애를 배워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옛 생활의 청산이자 새로운 생활로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떠나서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과거가 있습니다.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좋지 않은 과거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는 이런 성공과 실패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믿지 않았을 때에 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과거의 영광과 과거에 실수했던 것, 억울하고 섭섭했던 것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과거든, 싫은 과거를 버려야 합니다. 특히 실패의 경험을 잊어야 합니다. 허물과 실수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십시오. 사랑이란 실수와 허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용서의 복음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둘베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과거의 실패와 모든 죄책감을 십자가 밑에 다 묻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둘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17b).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소망을 두고 부르셨습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의 대상은 고기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목적은 죽이는데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목적은 살리는데 있습니다. 고기 낚는 어부의 삶의 장소와 스케일은 좁고 한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 어부의 장소와 스케일은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적입니다. 그리고 고기 낚는 어부는 그 가치관이 수량, 가격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오늘 몇 마리 잡았는데 얼마 벌었다. 그러나 낚는 어부의 가치관은 의미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일 년을 즐겁게 하려면 화초를 가꾸고 10년을 즐겁게 하려면 나무를 심고 30년을 즐겁게 보내려면 사람을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돕고 키우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를 잘못합니다. 이는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 부족과 또 사람보다 낚는 데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초점은 사람을 살리는데 두어야 합니다. 사람을 돕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상품만 팔아서는 세일즈 마스터가 될 수 없다. 진심을 담아 그들의 미래를 담아 그들의 미래를 아름다운 그림처럼 설계해줘야 한다.” 코닥의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먼이 세일즈 직원들에게 물었습니다. 코닥이 파는 상품이 무엇입니까? 카메라? 필름? 사진기? “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파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돕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숫자를 늘리려고 전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쌍 눈에 쌍불을 켜고 고기를 잡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반복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이를 계속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권태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직장을 옮겨 봅니다. 건수를 만들어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러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면 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대개 직장 생활 5년이 지나면 권태감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밥 몇 술 뜨고 신발 끈을 졸라매고 직장으로 출근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라고 늘 지겹고 피곤한 것만은 아닙니다. 보너스를 타서 자기 아내와 자식들에게 선물을 사들고 집에 갈 때 기분이 좋습니다. 적금통장을 만들어 조금씩 모아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모은 적금을 타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가용을 장만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첨단 가전제품을 사놓고 문화생활을 즐기며 사는 재미도 있습니다. 고기를 낚는 삶에도 나름대로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근본적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룩한 사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없는 삶은 잘 먹고, 잘 산다 할지라도 행복이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할지라도 그 행복은 상대적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보지만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열매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기 낚는 어부는 의미가 없고 소망도 없다며 놀아야 합니까?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이 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두고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따르기만 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로 키워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소원을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키워 주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썩어 없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벧후1:4).
셋째,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18,20).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8,20).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손익을 계산하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위해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3:7,8).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압도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셋째로 부르심은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의 부름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 아들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이요,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대통령은 쓸모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쓸모없다 싶으면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돌보아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어리석은 자를 지혜로운 자로, 천한 자를 귀한 자로, 평범한 사람을 위대한 자로, 쓸모없는 자들을 쓸모 있는 자로 키우십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부르심 그 자체가 은총이다’고 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약소민족의 백성으로 태어나 일생동안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낚다가 물거품처럼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사라질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그들은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그들을 부르셔서 쓸모 있는 사람들로 키우신 위대한 조각가, 조련사, 위대한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가 단 한 번 밖에 없는 이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살맛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을 배우십시오. 이 때 위대한 예술가요, 조각가요, 조련사가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대한 예술품으로 빚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