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마가복음 제 6 강(1:21-28)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가지 아니함이러라(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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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 교회의 기능을 다섯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예배의 기능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일차적 기능입니다. 교회에 아무리 좋고 많은 프로그램이 있다 할지라도 예배가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매개로 찾아오십니다. 성도는 예배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광과 은혜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는 전도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의 전초기지로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전도와 선교의 기능이 있습니다. 전도는 동일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지역 구석구석과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8월 2일-5일까지 역사적인 CMI 국제수양회가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주제는 전도를 통한 부흥입니다. 한국 교회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마이너스 곡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1990년 전반 대까지만 해도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기능 중의 하나인 전도가 회복되어 다시 한 번 한국 교회가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친교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는 아름다운 아가페적인 사랑을 토대로 성도들 간의 격의 없이 피차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신경을 통한 신앙고백을 하는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초대 교회는 뜨거운 성도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다운 코이노니아 속에 하나님 나라가 내재됩니다.
넷째는 봉사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섬기는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는 한 결 같이 봉사의 임무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신령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이러한 봉사를 위하여 교회 안에 각종 직임과 직책이 있습니다. 직책과 직임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봉사를 하되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섬김의 본으로 각기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교재로 하여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속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 있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으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로 굳게 서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를 알게 되고, 그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틈만 있으면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에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은 모습으로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것을 볼 때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현실 세계에만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이며, 무엇을 위해 살 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 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없어 육신과 정욕과 감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자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이 없어 비전이 없는 그들에게 비전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배운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1절에서 그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우리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마28:19,20, 막16:15, 눅24:47, 요21:15,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전하고 가르치는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벨상의 2/3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그럴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출생한 신생아들의 지능지수를 조사했는데 유대인 신생아들의 평균 지능지수가 백인보다 결코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훌륭한 3종류의 선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선생은 토라 선생입니다. 토라는 성경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이 일생을 바꾸어놓는 위대한 선생이 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얻습니다. 특별히 잠언은 지혜 중의 지혜서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신앙의 선생으로 모시고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성공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 속에서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선생은 모라 선생입니다. 모라는 학교선생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교육을 시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모라인 학교 선생은 전인교육을 시킵니다.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 공부하던 한국인이 유대인 초등학생의 성적표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 학교 성적이 엉망인데 네 앞날이 걱정되지 않니?” 초등학생이 말하기를 “걱정 없어요. 하나님이 나에게는 공부 잘하는 머리를 주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커서 회사 사장이 되어서 공부 잘하는 애들을 사원, 비서로 채용해서 쓸 것입니다.” 이렇게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훌륭한 학교 선생님인 모라가 있습니다.
세 번째 선생은 호라 선생입니다. 호라는 부모선생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를 가진 부모를 호라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가정의 훌륭한 선생 호라가 있기에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자녀들이 배출하게 됩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힘든 것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기만 하면 부모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부모란 직업은 세상의 어떤 전문직보다 정교하고 복잡하고 고도의 실력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면허증이 없는 무면허 부모들이 많습니다. 무면허 운전사가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듯이, 무면허 부모, 무면허 부부들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이로 인해 아이들이 상처를 받아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호라 선생님들은 무면허 부모가 아니라 성경을 사랑하고 지혜와 지식이 겸비된 면허증을 소유한 부모들로 자녀들에게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성경을 가르치고,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을 가르치고, 부권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철저하게 교육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에서 철저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칠 때만이 깨어진 가정이 살아나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회가 살아나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 살아나고, 빛과 맛을 잃은 교회가 살아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힘써서 성경을 가르치고, 후배들에게 성경 말씀을 옳게 가르치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울 때 우리 가정과 대학과 직장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르쳐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와 민족을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뭇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첫 번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당시에 교통의 요충지요 어업이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이 모여서 토라를 공부하고 예배를 보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33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가르친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써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인간이 불행한 것은 물질이 없고, 환경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해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물질과 정욕의 노예가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희망을 찾지 못해 절망적이고 슬프고 운명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영혼의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 참된 가치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이 땅에서의 사명 등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겠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뭘 믿어야 할지 믿음이 내용, 믿음의 대상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훈은 영어로 보면 교리,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에 호소하지 않고 지성에 호소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의 메시지는 논리적이고 지성적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요엘서 2장과 시편 16편의 내용을 가지고 구속사적 사건을 장엄한 스케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묻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만을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슴을 치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응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명백한 답을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는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의지하여 지성으로 전할 때 반응이 있고 그 반응의 결과의 은혜로 성령이 임하고 다시 지성으로 가르치게 됩니다. 이같이 성령은 지성과 함께 일하십니다.
70년대까지 한국의 부흥 사경회는 이름 그대로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부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도 하디 선교사가 요한 1서를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는 사경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현대 지성인이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하나는 귀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것은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자기들도 지키기 힘든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막7장).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율법에 매이도록 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아서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뭇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쳤습니다. 까다로운 율법의 규례나 장로들의 유전보다도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 쪼갭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사죄의 은혜와 삶의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동력과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죄와 마귀와 사망에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포로부터 자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 사탄의 권세에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에게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사망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욕심과 소유욕으로부터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소유, 물질, 명예, 권세, 정은 선한 것이지만, 소유욕, 물욕, 명예욕, 권세욕, 정욕, 이처럼 慾이 붙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慾’字를 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생명은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랑의 줄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왜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까? 로마서 8장 2절을 보면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는 이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이만큼 희생했으니 이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완벽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항상 머리가 아프고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항상 긴장하게 되고 삶이 여유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여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됩니다. 실수하면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8,9).”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 찬양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네,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네,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마침 회당에 앉아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말씀을 듣고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말씀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이게 귀신의 특징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잘 알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잘 알지만 말씀에 순종치 않는 믿음을 야고보서에서는 귀신적인 믿음, 허탄한 믿음, 헛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18-20).”
그는 예수님과 관계성 맺기를 꺼려했습니다. 이는 그 속에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단지 정신 현상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이상심리요법(psycho therapy)으로 치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하듯이 귀신도 존재합니다.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와 그의 말씀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반발하는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5).”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은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귀신을 분리해서 보시고 그를 괴롭히는 귀신의 세력을 말씀으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다 놀라 말했습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 하는도다(27).” 예수님은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의 세력을 제어하실 수 있는 영적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신들린 자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 그리고 이 땅을 변화시키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 하는 일에 총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 아닌 참된 지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은 영적인 파워가 있기 때문에 정욕과 물욕과 명예욕과 권세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자유하게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성경을 가르침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성경을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동료들에게 선배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가지 아니함이러라(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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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 교회의 기능을 다섯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예배의 기능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일차적 기능입니다. 교회에 아무리 좋고 많은 프로그램이 있다 할지라도 예배가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매개로 찾아오십니다. 성도는 예배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광과 은혜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는 전도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의 전초기지로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전도와 선교의 기능이 있습니다. 전도는 동일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지역 구석구석과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8월 2일-5일까지 역사적인 CMI 국제수양회가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주제는 전도를 통한 부흥입니다. 한국 교회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마이너스 곡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1990년 전반 대까지만 해도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기능 중의 하나인 전도가 회복되어 다시 한 번 한국 교회가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친교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는 아름다운 아가페적인 사랑을 토대로 성도들 간의 격의 없이 피차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신경을 통한 신앙고백을 하는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초대 교회는 뜨거운 성도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다운 코이노니아 속에 하나님 나라가 내재됩니다.
넷째는 봉사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섬기는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는 한 결 같이 봉사의 임무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신령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이러한 봉사를 위하여 교회 안에 각종 직임과 직책이 있습니다. 직책과 직임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봉사를 하되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섬김의 본으로 각기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교재로 하여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속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 있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으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로 굳게 서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를 알게 되고, 그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틈만 있으면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에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은 모습으로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것을 볼 때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현실 세계에만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이며, 무엇을 위해 살 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 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없어 육신과 정욕과 감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자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이 없어 비전이 없는 그들에게 비전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배운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1절에서 그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우리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마28:19,20, 막16:15, 눅24:47, 요21:15,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전하고 가르치는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벨상의 2/3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그럴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출생한 신생아들의 지능지수를 조사했는데 유대인 신생아들의 평균 지능지수가 백인보다 결코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훌륭한 3종류의 선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선생은 토라 선생입니다. 토라는 성경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이 일생을 바꾸어놓는 위대한 선생이 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얻습니다. 특별히 잠언은 지혜 중의 지혜서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신앙의 선생으로 모시고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성공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 속에서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선생은 모라 선생입니다. 모라는 학교선생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교육을 시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모라인 학교 선생은 전인교육을 시킵니다.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 공부하던 한국인이 유대인 초등학생의 성적표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 학교 성적이 엉망인데 네 앞날이 걱정되지 않니?” 초등학생이 말하기를 “걱정 없어요. 하나님이 나에게는 공부 잘하는 머리를 주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커서 회사 사장이 되어서 공부 잘하는 애들을 사원, 비서로 채용해서 쓸 것입니다.” 이렇게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훌륭한 학교 선생님인 모라가 있습니다.
세 번째 선생은 호라 선생입니다. 호라는 부모선생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를 가진 부모를 호라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가정의 훌륭한 선생 호라가 있기에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자녀들이 배출하게 됩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힘든 것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기만 하면 부모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부모란 직업은 세상의 어떤 전문직보다 정교하고 복잡하고 고도의 실력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면허증이 없는 무면허 부모들이 많습니다. 무면허 운전사가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듯이, 무면허 부모, 무면허 부부들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이로 인해 아이들이 상처를 받아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호라 선생님들은 무면허 부모가 아니라 성경을 사랑하고 지혜와 지식이 겸비된 면허증을 소유한 부모들로 자녀들에게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성경을 가르치고,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을 가르치고, 부권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철저하게 교육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에서 철저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칠 때만이 깨어진 가정이 살아나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회가 살아나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 살아나고, 빛과 맛을 잃은 교회가 살아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힘써서 성경을 가르치고, 후배들에게 성경 말씀을 옳게 가르치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울 때 우리 가정과 대학과 직장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르쳐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와 민족을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뭇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첫 번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당시에 교통의 요충지요 어업이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이 모여서 토라를 공부하고 예배를 보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33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가르친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써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인간이 불행한 것은 물질이 없고, 환경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해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물질과 정욕의 노예가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희망을 찾지 못해 절망적이고 슬프고 운명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영혼의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 참된 가치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이 땅에서의 사명 등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겠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뭘 믿어야 할지 믿음이 내용, 믿음의 대상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훈은 영어로 보면 교리,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에 호소하지 않고 지성에 호소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의 메시지는 논리적이고 지성적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요엘서 2장과 시편 16편의 내용을 가지고 구속사적 사건을 장엄한 스케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묻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만을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슴을 치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응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명백한 답을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는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의지하여 지성으로 전할 때 반응이 있고 그 반응의 결과의 은혜로 성령이 임하고 다시 지성으로 가르치게 됩니다. 이같이 성령은 지성과 함께 일하십니다.
70년대까지 한국의 부흥 사경회는 이름 그대로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부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도 하디 선교사가 요한 1서를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는 사경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현대 지성인이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하나는 귀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것은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자기들도 지키기 힘든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막7장).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율법에 매이도록 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아서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뭇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쳤습니다. 까다로운 율법의 규례나 장로들의 유전보다도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 쪼갭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사죄의 은혜와 삶의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동력과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죄와 마귀와 사망에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포로부터 자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 사탄의 권세에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에게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사망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욕심과 소유욕으로부터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소유, 물질, 명예, 권세, 정은 선한 것이지만, 소유욕, 물욕, 명예욕, 권세욕, 정욕, 이처럼 慾이 붙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慾’字를 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생명은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랑의 줄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왜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까? 로마서 8장 2절을 보면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는 이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이만큼 희생했으니 이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완벽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항상 머리가 아프고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항상 긴장하게 되고 삶이 여유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여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됩니다. 실수하면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8,9).”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 찬양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네,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네,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마침 회당에 앉아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말씀을 듣고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말씀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이게 귀신의 특징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잘 알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잘 알지만 말씀에 순종치 않는 믿음을 야고보서에서는 귀신적인 믿음, 허탄한 믿음, 헛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18-20).”
그는 예수님과 관계성 맺기를 꺼려했습니다. 이는 그 속에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단지 정신 현상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이상심리요법(psycho therapy)으로 치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하듯이 귀신도 존재합니다.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와 그의 말씀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반발하는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5).”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은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귀신을 분리해서 보시고 그를 괴롭히는 귀신의 세력을 말씀으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다 놀라 말했습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 하는도다(27).” 예수님은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의 세력을 제어하실 수 있는 영적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신들린 자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 그리고 이 땅을 변화시키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 하는 일에 총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 아닌 참된 지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은 영적인 파워가 있기 때문에 정욕과 물욕과 명예욕과 권세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자유하게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성경을 가르침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성경을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동료들에게 선배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