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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7강 말씀 1:29-39(요절, 1:38)
목적 있는 삶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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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동시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즐겁지만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목적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그러니 행복할리 없습니다. 이를 볼 때에 의미와 목적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지만 의미와 목적은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문화의 급속한 발달과 더불어 정신적 가치관에서 대한 관심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들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허전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에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묘비는 의미와 목적 없이 ‘우물쭈물하다’ 살다가 인생을 허망하게 날려 보내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봅니다. 사람이 의미와 목적 없이 허전하고 우울한 상태가 계속되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보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우울증은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인생은 기쁨만을 찾아 좇을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여하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의미와 목적에는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작은 고난과 역경에 쉽게 좌절합니다. 반면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어떤 역경에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공부 한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공부하고 직장에 다닌다. 나는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 한편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옥에 갇혀 있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나이가 60이 훨씬 넘은 노인입니다. 그는 죽도록 주님과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늙은 나이에 복음을 전하다가 춥고 어둠침침하고 음울하고 쾨쾨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께 “주님, 힘듭니다. 저를 감옥에서 내 보내 주세요.” 한 마디 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가 더 활발해지고 있음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도리어’란 단어는 의외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역경 앞에 오히려 역경을 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끌려가는 인생, 쫓기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똑같은 길이라도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습니다.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고, 오는 길은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실 자체는 차이가 없지만 똑같은 길이라도 체감이 다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20,21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자신이 살고 흥하고 부하고 출세하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죽든지 살든지 자기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문제에 빠지고 힘들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행복지수가 떨어집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할 때일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장래는 장미 빛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야 된다고 생각할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무엇을 위해 하느냐?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 무엇을 위해 직장에 다니느냐? 무엇을 위해 결혼하느냐?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느냐? 나의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당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리문답 제 1 문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요,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나아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자기의 유익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분별하고 결정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어가 아니라 ‘주님’이 주어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목적어가 되었습니다. 이 때 감옥이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생기발랄한 대학생들이 어깨를 축 늘어진 모습으로 등교합니다. 직장인들은 석고상 같이 굳은 모습으로 출퇴근합니다. 왜 그럴까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에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는 분명한 차원 높은 목적과 의미를 갖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차원 높은 의미와 목적은 바로 사명, 미선입니다. 사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에게 넘치는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흥미를 갖도록 합니다. 열정을 쏟도록 만듭니다.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러다 보니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니 성공하게 됩니다. 성공하니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니 계속 성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짧은 생애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완수하실 수 있었을까요? 본문을 보면 “내가 이를 위해 왔다.” 이런 분명한 목적, 분명한 소명, 분명한 미선을 가지고 그 목적에 전념, all in 하셨기 때문입니다. 38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21-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고 심방하시고 각색 병든 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일찍 일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35절을 보면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영적인 쉼과 영적인 힘을 공급받고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루의 우선순위를 정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먼저 하느냐?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두느냐? 그 사람의 우선순위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장 먹고 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가치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갑니다. 그래서 인간을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유형입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지적인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지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셋째는 가치 추구 유형입니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육을 가진 존재기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 욕구 이론 중 첫 단계가 생리적 요구입니다. 이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원에 대해 생각하고 영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인생에는 끝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코 긴 인생이 아닌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12장 1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생애 동안 삶의 우선순위(Priority)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입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최선의 것은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차선의 것은 차선의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실패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너무 약해서 실패하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긴급한 일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하고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학자 엔드류 보나의 생활원칙은 “첫째는 예수님께 먼저 말씀 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해야 아름다운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범인이 되느냐, 비범한 사람이 되느냐는 바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아기와 자기에게 우선순위를 두면 아기와 자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최고 가치를 추구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자 시몬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 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자 자신들도 유명 인사가 된 듯이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의 인기에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의미와 목적에 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38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내가 전도하러 왔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이란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곳, 복음을 절실히 필요한 곳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컴퓨터 문화와 교통의 발달로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습니다. 단 몇 초 만에 세계의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서는 국가 개념이 없습니다. 먼 나라, 가까운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가 모두 가까운 이웃입니다. 세계는 모두가 가까운 이웃이요 가까운 마을입니다. 가까운 마을은 복음을 듣지 못한 곳입니다. 복음이 절실히 필요로 한 곳입니다. 지도를 보세요.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가야 합니다. 가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생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만족하여 가버나움에 안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복음이 전파되자 갈릴리에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온 세계가 복음화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증인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자 할 때 사람들의 요구에 중심을 잃기 쉬웠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대로 살 때에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인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길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굳게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명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중도에서 사명을 포기하고, 중도에 방향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제자로 출발한 지가 어언 39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캠퍼스 선교, 세계 선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27년 전, 1982년 10월 17일에 저와 제 아내는 두 살 먹은 다윗과 배속에 조은이를 안고 인하대 복음화의 목적을 가지고 인천에 왔습니다. 인하대에서 처음 만만 학생은 토목과 1학년 김봉중 형제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인천은 대전과 다르다. 이곳은 수도권이다. 이불 싸들고 대전으로 내려가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주 점잖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음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일 년도 안 되어 전라북도 위도 대전 수양회에 18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다음 해는 자립적으로 공주에서 3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CMI 안에 어린이 방과 후 학교, 아버지 학교 등을 만드는 등 캠퍼스 사역보다 일반 사역으로 바꾸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이름도 정서에 접근하는 이름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캠퍼스 사역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저는 교회 이름도 캠퍼스 선교가 담긴 대학마을교회로 이름 했습니다. 그리고 50대에 인하대에 박사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은 신학을 공부하도록 충언했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하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 아들, 딸까지 모두 인하대 동문이 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하대 복음화라는 본래의 사명과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초심을 잃지 않고자 함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인하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1982년 인천에 올 때의 목적과 사명을 잃지 않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로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명이 흐려지고, 사명이 흔들릴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왜 인천에 왔지? 자문해 봅니다. 그 때마다 저의 뇌리에 캠퍼스 복음화, 세계 캠퍼스 복음화가 스쳐지나갑니다. 또한 주님은 제게 사명과 목적을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눈을 들어 캠퍼스를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가 끝까지 사명과 목적을 붙들었을 때에 새롭게 캠퍼스에 복음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인하대와 인천대, 그리고 경인교대에 복음의 싹들, 복음의 작은 불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제자 양성의 시급함과 중요성을 깨닫고 전도와 일대일 공부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습니다. 캠퍼스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캠퍼스에 부흥의 피도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번 평창 여름수양회를 깃점으로 전국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가 복음의 물결로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본래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오직 한 일’, one thing one point에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목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었습니다. 바울은 한 우물을 팠습니다. 그는 샘물이 나오기까지 한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유능한 사냥꾼은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울대 교수 이면우 박사는 송곳이론으로 이를 정립했습니다. 한 가지 일(one point)에 몰두하고 집중하면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목적,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삶을 결산할 그 날에 우리의 목표 그 이상의 배가의 역사로 결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이 길은 외롭고 힘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때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도록 기도합시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부르심의 목적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가정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더 나아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목적 있는 삶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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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동시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즐겁지만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목적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그러니 행복할리 없습니다. 이를 볼 때에 의미와 목적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지만 의미와 목적은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문화의 급속한 발달과 더불어 정신적 가치관에서 대한 관심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들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허전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에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묘비는 의미와 목적 없이 ‘우물쭈물하다’ 살다가 인생을 허망하게 날려 보내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봅니다. 사람이 의미와 목적 없이 허전하고 우울한 상태가 계속되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보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우울증은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인생은 기쁨만을 찾아 좇을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여하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의미와 목적에는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작은 고난과 역경에 쉽게 좌절합니다. 반면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어떤 역경에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공부 한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공부하고 직장에 다닌다. 나는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 한편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옥에 갇혀 있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나이가 60이 훨씬 넘은 노인입니다. 그는 죽도록 주님과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늙은 나이에 복음을 전하다가 춥고 어둠침침하고 음울하고 쾨쾨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께 “주님, 힘듭니다. 저를 감옥에서 내 보내 주세요.” 한 마디 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가 더 활발해지고 있음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도리어’란 단어는 의외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역경 앞에 오히려 역경을 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끌려가는 인생, 쫓기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똑같은 길이라도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습니다.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고, 오는 길은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실 자체는 차이가 없지만 똑같은 길이라도 체감이 다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20,21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자신이 살고 흥하고 부하고 출세하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죽든지 살든지 자기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문제에 빠지고 힘들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행복지수가 떨어집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할 때일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장래는 장미 빛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야 된다고 생각할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무엇을 위해 하느냐?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 무엇을 위해 직장에 다니느냐? 무엇을 위해 결혼하느냐?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느냐? 나의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당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리문답 제 1 문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요,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나아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자기의 유익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분별하고 결정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어가 아니라 ‘주님’이 주어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목적어가 되었습니다. 이 때 감옥이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생기발랄한 대학생들이 어깨를 축 늘어진 모습으로 등교합니다. 직장인들은 석고상 같이 굳은 모습으로 출퇴근합니다. 왜 그럴까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에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는 분명한 차원 높은 목적과 의미를 갖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차원 높은 의미와 목적은 바로 사명, 미선입니다. 사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에게 넘치는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흥미를 갖도록 합니다. 열정을 쏟도록 만듭니다.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러다 보니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니 성공하게 됩니다. 성공하니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니 계속 성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짧은 생애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완수하실 수 있었을까요? 본문을 보면 “내가 이를 위해 왔다.” 이런 분명한 목적, 분명한 소명, 분명한 미선을 가지고 그 목적에 전념, all in 하셨기 때문입니다. 38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21-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고 심방하시고 각색 병든 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일찍 일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35절을 보면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영적인 쉼과 영적인 힘을 공급받고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루의 우선순위를 정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먼저 하느냐?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두느냐? 그 사람의 우선순위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장 먹고 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가치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갑니다. 그래서 인간을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유형입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지적인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지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셋째는 가치 추구 유형입니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육을 가진 존재기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 욕구 이론 중 첫 단계가 생리적 요구입니다. 이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원에 대해 생각하고 영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인생에는 끝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코 긴 인생이 아닌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12장 1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생애 동안 삶의 우선순위(Priority)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입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최선의 것은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차선의 것은 차선의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실패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너무 약해서 실패하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긴급한 일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하고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학자 엔드류 보나의 생활원칙은 “첫째는 예수님께 먼저 말씀 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해야 아름다운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범인이 되느냐, 비범한 사람이 되느냐는 바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아기와 자기에게 우선순위를 두면 아기와 자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최고 가치를 추구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자 시몬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 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자 자신들도 유명 인사가 된 듯이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의 인기에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의미와 목적에 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38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내가 전도하러 왔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이란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곳, 복음을 절실히 필요한 곳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컴퓨터 문화와 교통의 발달로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습니다. 단 몇 초 만에 세계의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서는 국가 개념이 없습니다. 먼 나라, 가까운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가 모두 가까운 이웃입니다. 세계는 모두가 가까운 이웃이요 가까운 마을입니다. 가까운 마을은 복음을 듣지 못한 곳입니다. 복음이 절실히 필요로 한 곳입니다. 지도를 보세요.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가야 합니다. 가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생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만족하여 가버나움에 안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복음이 전파되자 갈릴리에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온 세계가 복음화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증인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자 할 때 사람들의 요구에 중심을 잃기 쉬웠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대로 살 때에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인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길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굳게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명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중도에서 사명을 포기하고, 중도에 방향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제자로 출발한 지가 어언 39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캠퍼스 선교, 세계 선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27년 전, 1982년 10월 17일에 저와 제 아내는 두 살 먹은 다윗과 배속에 조은이를 안고 인하대 복음화의 목적을 가지고 인천에 왔습니다. 인하대에서 처음 만만 학생은 토목과 1학년 김봉중 형제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인천은 대전과 다르다. 이곳은 수도권이다. 이불 싸들고 대전으로 내려가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주 점잖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음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일 년도 안 되어 전라북도 위도 대전 수양회에 18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다음 해는 자립적으로 공주에서 3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CMI 안에 어린이 방과 후 학교, 아버지 학교 등을 만드는 등 캠퍼스 사역보다 일반 사역으로 바꾸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이름도 정서에 접근하는 이름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캠퍼스 사역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저는 교회 이름도 캠퍼스 선교가 담긴 대학마을교회로 이름 했습니다. 그리고 50대에 인하대에 박사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은 신학을 공부하도록 충언했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하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 아들, 딸까지 모두 인하대 동문이 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하대 복음화라는 본래의 사명과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초심을 잃지 않고자 함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인하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1982년 인천에 올 때의 목적과 사명을 잃지 않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로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명이 흐려지고, 사명이 흔들릴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왜 인천에 왔지? 자문해 봅니다. 그 때마다 저의 뇌리에 캠퍼스 복음화, 세계 캠퍼스 복음화가 스쳐지나갑니다. 또한 주님은 제게 사명과 목적을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눈을 들어 캠퍼스를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가 끝까지 사명과 목적을 붙들었을 때에 새롭게 캠퍼스에 복음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인하대와 인천대, 그리고 경인교대에 복음의 싹들, 복음의 작은 불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제자 양성의 시급함과 중요성을 깨닫고 전도와 일대일 공부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습니다. 캠퍼스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캠퍼스에 부흥의 피도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번 평창 여름수양회를 깃점으로 전국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가 복음의 물결로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본래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오직 한 일’, one thing one point에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목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었습니다. 바울은 한 우물을 팠습니다. 그는 샘물이 나오기까지 한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유능한 사냥꾼은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울대 교수 이면우 박사는 송곳이론으로 이를 정립했습니다. 한 가지 일(one point)에 몰두하고 집중하면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목적,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삶을 결산할 그 날에 우리의 목표 그 이상의 배가의 역사로 결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이 길은 외롭고 힘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때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도록 기도합시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부르심의 목적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가정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더 나아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