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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갈라디아서 3:1-14, 요절 3:13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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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저울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저울 앞에만 서면 아주 경건해진다고 합니다. 일단 숨을 들이마시고 누가 보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고 저울에 올라섭니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저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울은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 1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원판불변의 법칙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겉모습은 알 수 있지만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지만 한길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알 수 없으니 겉모습을 보고 사람의 됨됨을 평가합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채용하고, 사람의 외모만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합니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저울에 올라서게 되면 나란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란 존재가 얼마나 위선자요 속이는 자요 형식주의자인가를 알고 애통하게 됩니다.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을 믿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1-9).
1-5절을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폭탄을 퍼붓듯이 질책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바울은 먼저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바울의 전도를 통해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단의 꾐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을 통한 구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한 가지만을 묻겠다고 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너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를 묻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고전12:3).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했습니다(롬8장). 성령을 받고 찐조기 같은 삶에서 기쁨과 감격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아 고난과 핍박도 이겼습니다(4,5). 이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6-9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실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창세기 15장 5,6절을 보면 하나님은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꼬투리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꼬투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현재 그는 자식 하나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닙니다. 그는 늙은 할아버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자식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감동하여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1-9절에 믿음이란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능력, 내 의지, 내 의를 포기하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 조건을 넘어서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내가 잘 나서 구원을 받고, 내가 변변해서 구원 받고, 내가 훌륭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나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한테 예수를 믿으라고 해’ ‘나는 부족해서 안 돼!’ ‘나는 변변치 못해서 안 돼’ ‘나는 자격이 없어’ 이런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한 것 같지만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완전주의자요, 율법주의자입니다. 우리가 언제 완전한 적이 있었으며, 변변한 적이 있었습니까? 본래 우리는 자격과는 멀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지?’ ‘집사가 저 모양이지?’ ‘목자가 왜 저러지’ 그러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그만하지, 안 믿었으면 더 형편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에 체질화되어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어떻게 받기만 해’ 이런 체면도 율법주의의 유형으로 믿음의 적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집 나간 탕자가 나옵니다. 그는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베푸는 주연에 참석하여 의젓하게 먹고 있습니다. 형은 동생의 이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고 아버지께 대듭니다. ‘아버지, 내게 언제 염소 새끼 한 번 잡아 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저런 탕자 같은 놈을 위해 잔치를 벌이다니 말이 됩니까?’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탕자처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의젓하게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둘째, 행위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10,11).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선행함으로, 좋은 덕을 쌓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지상 모든 종교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 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율법으로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그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기는커녕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10).” 왜냐하면 아무도 온전하게 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을 재해석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것도 살인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켰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헤매지만 그래도 한 때는 잘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만 잘 했느냐가 아니라 항상 잘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매 순간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래도 그 일만은 끝내주게 했지 않아요? 이 부분만큼은 인정을 해주셔야지요. 그런데 내게 저주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어느 것 잘 했고, 어느 것은 못했느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일입니다. 1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100%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100 아니면 99점이나 0점이나 다 똑같이 처리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진지하게 묻습니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그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 놓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을 통해 저주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양심대로 산 사람이 있습니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오. 우리의 내면은 위선과 거짓, 탐욕, 정욕, 이기심, 시기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입니다. 율법의 모든 행위는 우리 머리 위에 저주를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살다가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안 돼.’ ‘내 한계는 여기까지야.’ ‘나는 구원과는 먼 사람이야.’ ‘저주가 내 머리 위에 있어.’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 앞에 절망합니다.
이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를 일컬어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합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의 관계, 원수의 관계, 심판의 관계, 저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원수의 관계에서 사랑과 자녀의 관계로, 미움의 관계에서 화해의 관계로 바뀌어 집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에서 축복과 구원으로 바뀌어 집니다. 아멘.
셋째,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12-14).
율법의 요구는 “행하라. 그러면 구원이다”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다같이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형은 카르타고에서 민족 반역자를 죽이는데 사용한 사형도구입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참혹하지 1,000번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0번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십자가형틀에 못을 박을 때에도 손바닥이 아닌 신경이 다 모여 있는 손뼈에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형은 이렇게 잔인합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가 이 사형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정했습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해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죽을 수 없다.” “십자가는 치욕이고, 십자가는 저주고, 십자가는 형벌이고, 십자가는 패배이고, 십자가는 어둠이다. 십자가 문양은 로마 사람들과 영원히 상관없다.” 그래서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고,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형 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까? 거꾸로 십자가를 매달아주세요.” 그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형 집행인에게 “나도 감히 주님처럼 그 영광의 십자가에 달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주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나요? 십자가를 엇비슷하게 뉘어주세요.” 그래서 X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X자 십자가를 St. Andrew's Cross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는 사실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패배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닙니다.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아니 만민을 위하여 이처럼 참혹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로마 군인들의 무서운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후려치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말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손과 발목에 못이 박혔습니다. 머리 위의 가시관이 힘껏 눌려서 가시 끝이 박힌 곳에 피가 주르르 흘렀습니다. 옆구리에 창에 찔려 피가 흐릅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처럼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속량이란 노예 시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돈을 주고 산다. 값을 치렀다. 대신 치렀다. 사냈다는 뜻입니다. 여기 하나의 노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여기다 죄를 지어서 주인이 노예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중에 어떤 사람이 나서서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줍니다. 바로 그것이 속량입니다. 다시 말하여 이마에 찍힌 종의 마크를 없애고 자유인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가 5,0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노예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학대를 받고 얼마나 고문을 받으며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여러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환희! 그 감격! 그 놀라움! 그 희망! 저는 노예들의 해방되는 기쁨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쇼생크 탈출의 그 젊은이의 기쁨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 그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우리가 십계명에 비춰볼 때에 정욕의 노예, 물질의 노예, 미움과 시기심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였습니다. 작가 김홍신은 삶의 현장을 인간시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시대는 인간시장이 아닌 노예시장입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하는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3:3)” 사람들은 각색 정욕에 자유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도덕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얼마나 일삼습니까? 장자연 리스트. 박연차 리스트가 이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인간시장이 아닌 노예시장에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죄는 지독하여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그런데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의 모형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죄인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 율법과 죄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몸이 다 찢기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저주의 십자가로 지신 예수님을 믿으면 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 옮겨집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저주의 십자가를 믿으면 내 저주는 믿는 순간 끊어집니다. 이제 나는 저주의 근원이 아닌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를 믿습니까? 그런데 무슨 가계에 저주가 있습니까? 이제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저주의식이 우리 속에 지배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나는 제까지 살아오면서 왜 한 번도 내 마음에 행복한 날이 없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지? 무거운 억눌림! 내일 어떤 불길한 일이 나를 덮칠지 모르는 불안! 이런 저주의식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까? 이런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혼자 그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늪 속 깊은 곳으로 더 빨리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이 큰 막대기를 주어서 그 막대기를 붙잡으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옮겨놓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의 저주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모든 저주가 그 십자가에서 끊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저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바 되사”
이 시간 내 노력과 내 열심, 선행으로 저주를 해결하고자 하던 데서 믿음으로 저주를 십자가로 옮기십시오. 그리고 내 저주가 주님께 전가된 것을 믿으십시오. 찬양하십시오. 따라서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즉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즉시 내 저주는 사라졌다. 나의 저주는 주님께로 옮겨졌다. 내 저주는 끝났다. 이미 내 저주는 처형되었다. 저주는 나와 상관없다. 저주는 나의 사전에 없다. 나의 저주를 짊어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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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저울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저울 앞에만 서면 아주 경건해진다고 합니다. 일단 숨을 들이마시고 누가 보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고 저울에 올라섭니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저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울은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 1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원판불변의 법칙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겉모습은 알 수 있지만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지만 한길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알 수 없으니 겉모습을 보고 사람의 됨됨을 평가합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채용하고, 사람의 외모만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합니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저울에 올라서게 되면 나란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란 존재가 얼마나 위선자요 속이는 자요 형식주의자인가를 알고 애통하게 됩니다.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을 믿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1-9).
1-5절을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폭탄을 퍼붓듯이 질책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바울은 먼저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바울의 전도를 통해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단의 꾐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을 통한 구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한 가지만을 묻겠다고 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너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를 묻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고전12:3).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했습니다(롬8장). 성령을 받고 찐조기 같은 삶에서 기쁨과 감격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아 고난과 핍박도 이겼습니다(4,5). 이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6-9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실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창세기 15장 5,6절을 보면 하나님은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꼬투리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꼬투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현재 그는 자식 하나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닙니다. 그는 늙은 할아버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자식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감동하여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1-9절에 믿음이란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능력, 내 의지, 내 의를 포기하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 조건을 넘어서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내가 잘 나서 구원을 받고, 내가 변변해서 구원 받고, 내가 훌륭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나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한테 예수를 믿으라고 해’ ‘나는 부족해서 안 돼!’ ‘나는 변변치 못해서 안 돼’ ‘나는 자격이 없어’ 이런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한 것 같지만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완전주의자요, 율법주의자입니다. 우리가 언제 완전한 적이 있었으며, 변변한 적이 있었습니까? 본래 우리는 자격과는 멀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지?’ ‘집사가 저 모양이지?’ ‘목자가 왜 저러지’ 그러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그만하지, 안 믿었으면 더 형편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에 체질화되어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어떻게 받기만 해’ 이런 체면도 율법주의의 유형으로 믿음의 적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집 나간 탕자가 나옵니다. 그는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베푸는 주연에 참석하여 의젓하게 먹고 있습니다. 형은 동생의 이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고 아버지께 대듭니다. ‘아버지, 내게 언제 염소 새끼 한 번 잡아 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저런 탕자 같은 놈을 위해 잔치를 벌이다니 말이 됩니까?’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탕자처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의젓하게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둘째, 행위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10,11).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선행함으로, 좋은 덕을 쌓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지상 모든 종교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 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율법으로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그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기는커녕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10).” 왜냐하면 아무도 온전하게 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을 재해석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것도 살인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켰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헤매지만 그래도 한 때는 잘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만 잘 했느냐가 아니라 항상 잘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매 순간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래도 그 일만은 끝내주게 했지 않아요? 이 부분만큼은 인정을 해주셔야지요. 그런데 내게 저주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어느 것 잘 했고, 어느 것은 못했느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일입니다. 1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100%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100 아니면 99점이나 0점이나 다 똑같이 처리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진지하게 묻습니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그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 놓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을 통해 저주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양심대로 산 사람이 있습니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오. 우리의 내면은 위선과 거짓, 탐욕, 정욕, 이기심, 시기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입니다. 율법의 모든 행위는 우리 머리 위에 저주를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살다가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안 돼.’ ‘내 한계는 여기까지야.’ ‘나는 구원과는 먼 사람이야.’ ‘저주가 내 머리 위에 있어.’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 앞에 절망합니다.
이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를 일컬어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합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의 관계, 원수의 관계, 심판의 관계, 저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원수의 관계에서 사랑과 자녀의 관계로, 미움의 관계에서 화해의 관계로 바뀌어 집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에서 축복과 구원으로 바뀌어 집니다. 아멘.
셋째,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12-14).
율법의 요구는 “행하라. 그러면 구원이다”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다같이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형은 카르타고에서 민족 반역자를 죽이는데 사용한 사형도구입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참혹하지 1,000번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0번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십자가형틀에 못을 박을 때에도 손바닥이 아닌 신경이 다 모여 있는 손뼈에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형은 이렇게 잔인합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가 이 사형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정했습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해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죽을 수 없다.” “십자가는 치욕이고, 십자가는 저주고, 십자가는 형벌이고, 십자가는 패배이고, 십자가는 어둠이다. 십자가 문양은 로마 사람들과 영원히 상관없다.” 그래서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고,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형 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까? 거꾸로 십자가를 매달아주세요.” 그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형 집행인에게 “나도 감히 주님처럼 그 영광의 십자가에 달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주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나요? 십자가를 엇비슷하게 뉘어주세요.” 그래서 X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X자 십자가를 St. Andrew's Cross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는 사실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패배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닙니다.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아니 만민을 위하여 이처럼 참혹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로마 군인들의 무서운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후려치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말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손과 발목에 못이 박혔습니다. 머리 위의 가시관이 힘껏 눌려서 가시 끝이 박힌 곳에 피가 주르르 흘렀습니다. 옆구리에 창에 찔려 피가 흐릅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처럼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속량이란 노예 시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돈을 주고 산다. 값을 치렀다. 대신 치렀다. 사냈다는 뜻입니다. 여기 하나의 노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여기다 죄를 지어서 주인이 노예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중에 어떤 사람이 나서서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줍니다. 바로 그것이 속량입니다. 다시 말하여 이마에 찍힌 종의 마크를 없애고 자유인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가 5,0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노예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학대를 받고 얼마나 고문을 받으며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여러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환희! 그 감격! 그 놀라움! 그 희망! 저는 노예들의 해방되는 기쁨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쇼생크 탈출의 그 젊은이의 기쁨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 그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우리가 십계명에 비춰볼 때에 정욕의 노예, 물질의 노예, 미움과 시기심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였습니다. 작가 김홍신은 삶의 현장을 인간시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시대는 인간시장이 아닌 노예시장입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하는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3:3)” 사람들은 각색 정욕에 자유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도덕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얼마나 일삼습니까? 장자연 리스트. 박연차 리스트가 이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인간시장이 아닌 노예시장에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죄는 지독하여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그런데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의 모형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죄인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 율법과 죄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몸이 다 찢기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저주의 십자가로 지신 예수님을 믿으면 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 옮겨집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저주의 십자가를 믿으면 내 저주는 믿는 순간 끊어집니다. 이제 나는 저주의 근원이 아닌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를 믿습니까? 그런데 무슨 가계에 저주가 있습니까? 이제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저주의식이 우리 속에 지배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나는 제까지 살아오면서 왜 한 번도 내 마음에 행복한 날이 없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지? 무거운 억눌림! 내일 어떤 불길한 일이 나를 덮칠지 모르는 불안! 이런 저주의식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까? 이런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혼자 그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늪 속 깊은 곳으로 더 빨리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이 큰 막대기를 주어서 그 막대기를 붙잡으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옮겨놓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의 저주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모든 저주가 그 십자가에서 끊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저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바 되사”
이 시간 내 노력과 내 열심, 선행으로 저주를 해결하고자 하던 데서 믿음으로 저주를 십자가로 옮기십시오. 그리고 내 저주가 주님께 전가된 것을 믿으십시오. 찬양하십시오. 따라서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즉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즉시 내 저주는 사라졌다. 나의 저주는 주님께로 옮겨졌다. 내 저주는 끝났다. 이미 내 저주는 처형되었다. 저주는 나와 상관없다. 저주는 나의 사전에 없다. 나의 저주를 짊어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